바흐는 진정 ‘중심에 위치한 태양으로 음악의 모든 지혜는 그로부터 나왔다.’

작곡가로서 바흐의 순수한 위상은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정상인이 성취할 수 있는 스케일을 넘어서 있다. 그를 신격화하거나 초인(超人)으로 추앙하는 경향은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구나 천재를 흠모하고 싶어 한다.

바흐의 인간성은 그의 음악 사상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발전되고 다듬어져 왔다. 그의 실제 행동 패턴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어떤 경우는 음악가로서의 삶과 일상적인 삶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결과물로 해석됐다. 바흐 음악의 작곡 및 연주 과정을 이중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작곡가 자신의 인간다운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인상은
오늘날 재창조와 재연의 경험을 통해서만 농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왜 위대한 음악은 위대한 인간에게서만 탄생한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음악은 우리에게 영감과 행복을 주겠지만, 그렇다고 그 작곡가가 반드시
영감을 주는 (영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런 경우도 때로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굳이 전제할 필요는 없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보다 훨씬 빈약하거나 매력이 부족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다른 많은 작곡가도 그렇지만 특히 바흐의 경우는 창의적인 표현 핵심을 처음부터 정의하거나 관통하기보다는 장인처럼 음악 재료를 시간을 들여 다듬고 변형시키는 절차를 추적하는 편이 훨씬 더
용이하다.

연주는 애매한 태도를 취할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온전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견해와 해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그 느낌은 음악을 움직이는 모터와 춤곡 리듬에 연결되어 있고, 일련의 화성과 복잡한 대위법 소리망에, 그들의 공간 관계에, 만화경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기악과 성악(함께 연주되어 서로 충돌할 뿐 아니라 제각기 연주될 때)의 변화에 휘말려 있다.

바흐의 모든 선율이 성악가에게 친절하지만은 않고, 퍼셀이나 슈베르트처럼 듣기 좋은 것도 아니다. 종종 모가 나 있고, 프레이즈는 불편할 정도로 길며, 작은 소용돌이와 장식음을 계속 퍼붓고, 노래를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요구하는 바가 많으며, 이 요구들은 강철 같은 호흡 조절을 필요로 한다. 이는 비단 성악뿐 아니라 기악 파트에도 해당되는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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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의 위기 동안 동유럽과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정부에도 해주지 않았던 양보를 그리스 극좌파 정부에 해준다면 그 결과로 돌아올 건 재앙뿐이었다. 그리스 국민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은 유로존의 더 광범위한 경제적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이 싸움은 독일 정부의 보수적 글로벌리스트들이 생각하는 대로 더 광범위한 정치적 원칙과 권위에 대한 문제이며 장기적인 경제적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했다.

만일 그리스가 이 채권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지급불이행을 선언한다면 유럽중앙은행은 심각한 손실을 입을 것이며 채권 매입에 대한 위험성이 강조되고 또 어떤 식으로든 독일 우파들이 양적완화 조치의 적법성에 대한 의문을 다시 재기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유로존 위기의 결과로 한 국가의 경제정책은 국제적인 합의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유로그룹 입장에서 그리스 채무 관련 협약은 하나의 기준점이었고 그리스 정부의 입장과는 전혀 상관없이 협약은 지켜져야만 했다. 협약 자체는 변동이 없었지만 신경전이 시작되었고 야니스 바루파키스와 네덜란드의 예룬 데이셀블룸이 거의 주먹다짐까지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재정승수(fiscal multiplier)와 같은 문제에는 IMF도 좀 더 "진보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장기적인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오랜 관습을 고수했다.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스는 노동시장 규제를 철폐하고 사업 인허가 제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세하고 철저한 "공급자 중심의 개혁"이 필요했다. 또한 그리스 정부는 민영화 과정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이런 조치들을 실행하는 건 어느 정부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시리자 같은 좌파들의 연합체로서는 정치적인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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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연변이 매와 돌연변이 찌르레기가 더 잘 날았기에 생존에 보다 유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개선이 이루어지려면 알맞은 돌연변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처럼 들린다. 알맞은 ‘고독한 천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다. 인류의 혁신이 반드시 고독한 천재를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진화에서 새로운 ‘착상’의 궁극적인 원천이 돌연변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성 생식은 유전자들을 뒤섞어서 많은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은 자연 선택의 대상이 된다. 공학자의 착상처럼, 유전자도 뒤섞이고 재조합된 뒤에 검사를 받는다. 탁월한 돌연변이(즉, 고독한 천재)가 출현할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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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설계와 진화적 설계의 최종 산물은 양쪽 다 아주 좋으며, 매우 잘 날기에 우리는 두 개선 과정이 얼마나 다른지를 그냥 편리하게 잊곤 한다. 이 망각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독자는 이 책에서 내가 일종의 축약언어를 써 왔다는 점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나는 새와 박쥐, 익룡과 곤충이 우리 인간 공학자들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비행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고 썼다. 마치 다윈 자연 선택이 아니라 새 자신이 문제를 푼다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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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마침내 연준이 결정을 내렸다. 5월부터 해온 준비가 마무리된 후 FOMC는 금리는 현 상태를 유지하며 "경제가 안정되고 있다는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올 때까지" 현행 이율로 채권 매입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5월 이후 시장을 긴장시켜온 연준 대차대조표 축소에 대한 논의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만일 연준이 조급하고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으로 인한 중단 없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일에만 전념하려 했다면 통화 부양책의 축소에 대해 채권시장이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찰활동과 통화스와프는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능적 권력과 행정적 효율성만큼은 어떤 공식적인 정치적 권한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사찰과 통화스와프는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중요한 위치와 미국 내에서는 물론 미국과 정치적, 그리고 사업적으로 얽힌 국가들 안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또 다른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일본과 베트남을 미국이 생각하는 지리경제학적 동맹체제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손쉬운 일이었다. 이들 국가가 중국을 막아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미국이 아시아에서 이런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면 해당 지역에서의 상황이 복잡해지는 동시에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있었고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국경 서쪽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지만 극빈층은 국가가 지급하는 연금과 에너지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했고 여기에만 GDP의 17퍼센트가 쓰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유럽연합 가입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국영 언론은 유럽연합 협약 참여가 유럽연합과 유로존의 정식 회원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선전했다. 유럽연합은 이에 대해 어떤 공식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서방측 언론들은 빌뉴스 정상회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빼내와 유럽연합에 편입시키려는 6년간의 노력"의 최종 단계라고 공개적으로 보도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위협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제재위협도 여전히 큰 문제였다. 우크라이나 수출의 25퍼센트는 유럽연합으로 들어갔지만 러시아 수출 규모도 26퍼센트나 되었다.

유럽연합은 연장된 이행기를 의도했지만 사태는 혁명적 전복으로 진행되었다. 율리아 티모셴코의 조국당과 일부 혁명세력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선거를 기다리지 않고 새로운 체제 수립에 나섰다. 지난 11월 있었던 야누코비치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뒤집어 러시아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러시아가 아닌 IMF, 그리고 유럽연합과 새로운 금융 협정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서방측의 이해관계도 위기에 처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세계시장에서 2위에 해당하는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국이었다. 신흥시장국가 경제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시점에서 미국은 원자재 시장에서 더는 긴장상태가 불거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전쟁을 원하는 강경파들은 절망했지만 미국 정부는 자제력을 발휘하며 결코 전면적인 경제제재라는 무기를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2008년 조지아에서 벌어진 대리전에서 예고되었던 서방측과 러시아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인 전면 충돌은 이제 한층 더 심각한 단계로 발전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호 문제가 위기에 처하자 2014년 4월 13일 우크라이나 임시정부는 도네츠크를 포함하는 이른바 돈바스(Donbass)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대테러" 작전을 개시했다.

러시아 정부는 좀 더 고전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서방측으로 향하는 가스 공급을 차단하는 대신 유럽에서 들어오는 농산물 수입을 금지시켰고 동시에 돈바스 반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늘려갔다. 반군은 8월 23일에서 24일 사이 처절한 반격을 시작했다. 전황이 어려워지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어쩔 수 없이 9월 5일 민스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중재 아래 휴전협정을 받아들인다.

유럽 전역에 걸쳐 시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과거에는 압도적으로 유럽통합을 지지했던 국가들에서조차 그 지지도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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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4년 5월 유럽연합 의회 선거가 다가왔다. 선거 결과는 유럽의 정치시스템을 뒤흔들어놓았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중심 정당들이 대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유럽 정치의 변방에 있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분노 자체는 비록 위기에 대한 각 정부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지지세력을 끌어모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새롭게 부각된 것은 좌파들의 응집력이었다

그렇지만 2015년 1월 25일의 선거에서는 그리스 유권자들의 본심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 정부와 유럽연합 본부의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대를 배신이라도 하듯 연정 상대로 중도파이자 친유럽 성향의 포타미당이 아닌 극우민족주의 성향의 독립그리스인당(ANEL)을 택한 것이다. ANEL은 종교나 문화적 가치에 대해 그리 복잡한 견해를 갖고 있는 정당은 아니었지만 유럽연합과의 대결에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할 가능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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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민간 부문 채무를 정리하는 대신 정부가 유럽연합과 IMF로부터 받은 대출로 민간 부채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그리스 국채에 도박을 걸었던 민간 투자자들의 불만도 불만이었지만 보수적인 북유럽의 납세자들이 유럽연합에 비협조적인 그리스 좌파 정부를 위해 또다시 큰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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