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1920년) 10월, 혼춘의 비적사건을 구실로, '비적소탕'이란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 혼춘을 강점하고 우리 겨레의 학살을 감행했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록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조손(祖孫)이 동시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혼백 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 _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하)> , p214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1920년대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에서 행해진 양민학살의 참상을 전하지만, 이같은 참상이 간도 지역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3.1운동 직후 국내에서도 수많은 학살이 있었고, 간도지역에서는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의 패전 직후 보복성 학살을 일제는 감행한다.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의 시공간은 독립운동의 거대한 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의 장이었다. 3.1운동의 온 과정에서 무수한 폭력행위가 자행되었다. 시위 참가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부상을 입은 시위 참가자에 대한 방치,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에게 가해진 폭행, 조사 과정에서의 고문, 마을 방화와 재파괴 등 그 형태도 다양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행위들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어왔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19/322


 지난 2019년 발행된 <3.1운동 100년> 중 한 연구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학살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무고한 양민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관점은 언뜻 문제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학살자 중심의 관점이라는 지적이다. '무고(無辜)'에 초점을 맞출 경우, 일제의 만행이 지나쳤다는 정도로 희석될 수 있기에, 본질적으로 학살의 성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살은 학살자의 의도와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피학살자의 조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존 연구에서 3.1운동 당시의 학살이 '평화적'이며 '비폭력적'인 상황에서 자행되었다고 서술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을 자행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서술에 따르면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된 사망자에게는 '피학살자'라는 표현이 가능하지만, 폭력적 시위가 발생한 지역에서 사망한 사망자들은 '피학살자'로 보기 어렵다. 이는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들을 '폭민'으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탄압을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설명하고자 한 일제 측의 논리와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0/322


 저자 김강산은 연구를 통해 3.1운동이후 일어난 학살이 단순한 폭력적 진압이 아닌, 민족말살의 한 수단임을 밝혀내며 그 주체가 일본제국주의 중추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본군에 의해 행해진 무수한 학살의 악몽은 이 시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우금치 전투(牛禁峙戰鬪) 등에서 보인 왜(倭), 일본군의 만행은 이후 역사 속에서 (변용된 주체에 의해) 제주 4.3사건, 보도연맹사건,  5.18민주항쟁 등의 모습으로 다르게 재현되어왔다.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의 국내진출이 얼마나 트라우마가 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대통령 후보자간 토론에서 나온 일본군이 국내 진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어느 후보자의 언행은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의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3.1운동 102주년과 함께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둔 오늘. 그날의 함성과 이를 잔혹하게 짓밟은 일본군의 만행이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재현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과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 또한 함께 하게 된다...


 3.1운동 당시 자행되었던 학살은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살인(homicide)사건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벌였던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3.1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식민주의의 본질이 학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5/322


 유엔의 제노사이드조약을 3.1운동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3.1운동에 대한 탄압은 엄중한 처치 명령, 군대 출병 등 위로부터의 정책적 결정을 통해 조직적/의도적으로 야기된 전시 제노사이드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3.1운동의 탄압을 전쟁 상황으로 기획했던 주체들에게는 제노사이드의 "직접적인 또한 공연한 교사"가 성립한다. 셋째, 학살을 실행한 각각의 주체에게도 살해에 의한 제노사이드로서, 제노사이드의 범죄가 성립한다. 이뿐만 아니라 개인이 아닌 조직, 단체로서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제노사이드의 핵심에 있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9/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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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훈은 더욱 스스로 교만하여 매일 유연(遊宴)을 하니 주중(周重)이 간하였다. "옛날부터 교만하고 사치하며 일락하면 얻었다가 다시 잃게 되고 이루었다가 다시 패배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물며 아직 얻지도 못하고 성공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방훈은 마침내 무리들을 모아놓고 겉으로 선언하였다.
"나 방훈은 처음에 나라의 은혜를 입기 바라면서 신하로서의 절개를 모두 온전하게 하였는데, 오늘의 일은 앞에서 가졌던 뜻을 이미 어그러뜨렸다. 이로부터 나 방훈은 여러분 가운데 진정으로 반란할 사람과 더불어 마땅히 경내(境內)의 군사들을 쓸어버리고,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하여 패배한 것을 돌려서 공로를 이룰 뿐이다." 무리들은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최언증이 마침내 도우후(都虞候) 원밀(元密)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방훈을 토벌하게 하고 방훈의 죄를 헤아리며 사졸들에게 명령하고 또 말하였다. "보통사람들을 도탄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역시 장사(將士)들을 오염시켰다. 만약에 국가가 군사를 발동하여 주살하고 토벌하면 옥석(玉石)이 함께 타버릴 것이다." 또 말하였다.
"무릇 저들의 친속은 걱정하고 의심할 것이 없으니 죄는 한 몸에 그치고 반드시 연좌시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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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일어섰다. 달리 할 말도 없거니와 감회도 없었다. 할말이나 감회가 없었다기보다 죽음과 이별의 냉혹함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해야 옳은지 모른다. 절대적 침묵이 냉혹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절대적 사실에는 누구든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홍이도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리움이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준 요람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_ 박경리, <토지 16> , p26/592


 토지문화 독서챌린지 31주차. 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있다. 김두수의 협박담긴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홍이는 자신의 마음과 다른 행동으로 심한 마음고생을 한다. 분열되는 자아. 그것이 홍이의 지금 모습이 아닐까. 홍이는 자신의 영원한 어머니 월선 앞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말이 없음을 말할 수 밖에 없는 홍이. 홍이는 소외되고 외로웠다. 하지만, 소외된 홍이의 침묵은 무(無)가 아닌 새로운 가능태(可能態)임을 우리는 읽을 수 있고 소망하게 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 있는 존재였던 저 태고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_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 p17


 요컨대 우리는 발화되기 이전의 파롤과, 그것을 끊임없이 에워싸고 있는 침묵의 배경을 고찰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이 없으면 파롤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파롤과 뒤얽혀 있는 침묵의 끈들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p51)... 표현하는 예술이 지니는 새로움은, 침묵하는 문화를 죽음과도 같은 순환에서 빠져 나오게 한다. 예술가는 숭배나 반항에 의해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재개하려고 한다. _ 메를리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p139/262


 침묵과 침묵의 배경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말해질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한 발화행위 자체보다 행위가 속해있는 배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월선의 무덤가에서 말이 없는 홍이. 홍이의 모습은 단순한 감회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나온 또다른 발화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이는 홍이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처한 공통된 상황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민족은 일본의 볼모다. 일본이 망하리라는 희망적 정세 앞에서 우리가 앞날을 어둡게 절망적으로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소모될 것인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해서 희망과 절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에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한 게야. _ 박경리, <토지 16> , p48/592


 조선인들은 모두 순간순간 그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과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땅에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戰果)만 대서특필, 전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 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병 제도, 민족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準軍服)인 카키 빛 국민복으로 갈아입은 지도 오래이며 중학교는 물론 여학교까지 교련이라는 명칭하에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친일파는 친일파대로 우국지사는 우국지사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지식인 학생들, 장사하는 사람, 막노동꾼, 농민, 고기잡는 사람, 하급관리, 월급쟁이들 할 것 없이, 각기 위치와 관점은 다르지만 보다 가혹한 수난이 이 민족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예감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엄마에게도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는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_ 박경리, <토지 16> , p184/496


 1930년대 후반, 태평양 전쟁 직전의 상황에 더할 수 없는 어둠이 내려오던 시기에 모든 이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침묵의 세계는 결코 순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변혁이며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소외된 의식이 느끼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은 이제 새로운 도약의 동력이 된다. 이것이 <토지>에서 길상의 관음탱화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침묵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산산조각이 난 한 세계의 잔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잔해는 그것이 잔해인 까닭에 사람들을 무섭게 만든다. 때로 어떤 도시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거리의 소음 한 가운데에서 쓰러져 죽는다. 그럴 때는 마치 가로수 꼭대기에 아직 여기저기 앉아 있는 침묵의 조각들이 갑자기 죽은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는 것 같다. 그 침묵의 잔해들이 죽은 자의 침묵에게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 같다. 한순간 그 도시는 정지하게 된다. 침묵의 잔해들은 이제 그 죽은 사람의 곁에 있으며 죽음의 틈을 통해서 그와 함께 죽음 속으로 사라지려고 한다. 죽은 자가 침묵의 마지막 잔해들을 동반한다. _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 p212


 길상이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사실 서희의 경우는 외관상 분리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간도에서 돌아온 후 이십여 년 동안, 김환과 길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활동과 투쟁을 교묘히 엄폐해가면서 꾸준히 최씨 일문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앞뒤가 다른 가면을 쓰고서도 늘 앞면만 보여왔다 할 수 있고, 그러니까 친일적 경향을 띠면서 회유의 손길을 뻗쳐놓을 필요가 있었고 요소요소, 상당히 광범위하게 호의(好意)의 통로를 만들어놨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6> , p478/494


 개인 스스로가 끝내 도달하는 보편적인 모습이 '죽음'이라는 순수한 존재(das reine Sein, der Tod)이다. 이는 절로 그렇게 되어가는 자연의 결과로서, 의식의 행위는 아니다... 인간이 공동의 세계에서 누리는 죽음의 안식은 참다운 의미에서 자연에 속하는 것은 아니므로 자연이 죽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듯이 내세우는 교만함을 불식하고 죽음의 진실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 죽음을 당한 가족이 치러야 할 의식(儀式)의 참뜻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8


 길상도 홍이처럼 소외된 세계 속의 인물이다. 자신의 내면은 독립을 외치고 있지만, 감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부인 서희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의 주변은 친일(親日)의 세계다. 그 역시 내면의 목소리를 감추고 분열되고 소외된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다시 근원의 모습으로 돌아가 관음탱화(觀音幀畵)에 매진하는 것은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자아의 침묵이라는 언어행위는 아닐런지... 이번 독서챌린지에서는 전쟁에 끌려가는 민족의 불행이라는 보편적 상황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개별자들의 소외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승화로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글 속에서는 의미 작용이 조각상 속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다른 방식으로 집결되며, 어떤 것도 그 파롤의 유연성에 비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언어는 말하는 것이고, 회화의 목소리는 침묵의 목소리인 것이다. _ 메를리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p144/262


  정신의 첫번째 현실성은 종교의 개념, 다시 말하면 직접적이고 따라서 자연적인 종교이다. 여기서는 정신이 자기를 자연 그대로의 직접적인 형태를 띤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두번째 현실성은 자연적인 요소를 탈피한 자기의 형태 속에서 자기를 인지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곧 예술종교이다. 형태가 자기의 모습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의식이 대상을 창출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되었을 때 의식은 대상 속에서 자신의 행위와 자기를 직관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 현실성은 앞의 두 경우에 안겨져 있던 일면성을 제거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자기가 하나의 직접적 존재인 것 못지않게 직접성이 그대로 자기가 되어 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47


 절대예술의 단계에 오면 정신은 예술을 넘어선 곳에서 더욱 고차적인 표현을 이루어내게 된다. 즉 자기로부터 태어난 인륜의 실체가 표현될 뿐만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이 자기가 표현의 대상이 되고, 개념으로부터 자기를 낳을 뿐만 아니라 개념 그 자체를 형상화하여 개념과 제작된 예술작품이 서로 동일한 것임을 확인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륜적 실체가 단지 현존하는 세계를 이루는 데 그치지 않고 순수한 자기의식 속으로 되돌려지게 될 때 이 자기의식은 개념을 등에 업고 활동하는 주체가 되며 여기에 힘입어서 대상으로서의 정신이 산출되기에 이른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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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2 한길그레이트북스 64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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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실재라는 이성의 확신이 진리로 고양되고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세계로, 그리고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기에 이르렀을 때, 이성은 곧 정신이다. 바로 앞에서 본 정신의 생성을 나타내는 운동에서는 의식의 대상인 순수한 범주가 이성의 개념이 고양되었다. (p17)... 인륜적 세계, 치안으로 분열된 세계 그리고 도덕적 세계관이라는 세 단계의 정신이 그때마다 의식의 전개상을 나타내면서 단일한 독자존재인 정신이 자체 내로 복귀하여 바로 그의 목표이며 결과이기도 한 절대신을 의식하는 현실의 자기의식이 출현하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2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 2>의 시작을 이성을 정신으로 치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치환된 정신 앞에 먼저 나타나는 것은 인륜(人倫)이다. 추상적 법의 외면성과 도덕적 법의 내면성이 종합된 인륜. 인륜의 세계에서 정신은 갈등에 봉착한다. <안티고네 Antigone>에 드러난 ‘인간의 법칙‘을 나타내는 클레온과 죽은 오빠를 매장하라는 ‘신의 법칙‘ 사이의 갈등은 안티고네 개인의 갈등과 비극이 아니다. 이를 폴리스 국가의 깊은 모순과 붕괴의 필연성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헤겔은 이와 함께 소외된 정신에 의한 인륜의 회복도 발견한다. 그 결과 ‘가족‘에서 무너진 인륜은 ‘시민사회‘에서, 시민사회에서 붕괴된 인륜은 국가에서 회복되어 나간다. 결과적으로, 헤겔은 인륜의 역사를 통해 근대시민사회의 역사적 과정과 법칙성을 설명한다.

생동하는 인륜적 세계야말로 정신의 참다운 모습이다. 정신은 일단은 자기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알게 되는데, 이때 인륜성이 파괴되면서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법이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자기분열을 일으킨 정신은 가혹한 현실을 드러내는 대상 세계 속에서 ‘교양의 세계‘를 구축하고 또 이와 대립되는 사상(思想)의 영역에는 ‘신앙의 세계‘ 또는 ‘신의 왕국‘을 일구어낸다.(p21)... 인륜의 세계는 보편적인 의식으로서의 실체와 개별적인 의식으로서의 실체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보편적인 현실체로는 민족과 가족이 있고 자연발생적인 자기이며 활동하는 개인으로는 남과 여가 있다. 일찍이 관찰하는 이성의 입장에서는 한낱 대상으로밖에는 파악하지 않았던 것이 이성적인 자기의식이 되었고, 다시 이 자기의식으로서는 자기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던 것이 참다운 현실로 존재해 있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7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 남성과 여성으로 분열된 그리스적인 인륜세계와 지와 무의식으로 분열된 그의 인류적 의식이 그러한 대립을 부정하는 힘의 주체인 운명으로 복귀해가듯이 이제 소외된 정신에서 비롯된 앞이 두 세계도 정신의 주체인 자기에게로 복귀해간다. 다만 그리스적 정신이 다다르는 곳이 첫번째의 직접적을 인정된 정신의 자기, 즉 개별적인 인격이었는 데 반하여 외화를 거쳐서 자체 내로 복귀하는 두번째의 자기는 보편적인 자기, 즉 개념을 포착한 의식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온갖 요소가 고정된 현실성을 띤 채 정신을 결한 채로 존립하게 된 두 개의 세계는 ‘순수한 통찰‘의 힘 앞에서 와해되기에 이른다.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통찰이야말로 교양의 완성된 형태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66

인륜적 세계의 실현이 근대 국가에서 이루어지지만, 여기에서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뒤를 이어 나타나는 ‘국가권력‘과 ‘부‘ 그리고 이들과 관계하며 통합된 ‘고귀한 의식‘은 정신현상학의 논의에서 ‘신앙‘의 문제가 뒤이어질 것임을 예고한다. ‘교양‘을 통해 이뤄진 역사적 운동의 근거가 ‘신앙‘에 있다는 헤겔의 주장을 통해 이제 논의는 정치철학에서 신학(神學)으로 자리가 옮겨간다.

‘가(可)‘와 ‘불가(不可)‘라는 단순한 사고는 곧바로 자기소외에 직면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사고란 현실적인 것으로서 현실의식 속에서 대상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 세계로 등장하는 것이 ‘국가권력‘(die Staatsmacht)이고 두번째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 ‘부‘(富, der Reichtum)이다.(p74)... 국가권력과 부를 자기와 동등시하며 이와 관계하는 의식은 ‘고귀한‘ 의식이다... 이와 반대로 두 개의 대상 세계와 부등한 관계를 고정시켜놓은 의식은 ‘비천한‘ 의식(das niedertrachtige)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80

자기가 인정된다는 것 자체가 허망한 것이다. 즉 부와 권력을 수중에 넣는다고 할 때 이렇게 수중에 들어온 부와 권력은 자기본질(Selbstwesen)을 지닐 수 없는 허망한 것이고, 오히려 부와 권력을 수중에 넣은 자기야말로 참다운 위력을 지닌 것으로 밝혀진다. 이처럼 부와 권력을 소유하게 되는 바로 그때 자기는 부와 권력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는 것이 재치 있는 언어로 표현되는데, 바로 이 언어야말로 그의 최고 관심사인 세계 전체의 진리이기도 하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03

사유하는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신앙에 신은 직접 존재하는 것이지만 순수한 의식은 이에 못지않게 확신과 진리를 매개하는 그러한 관계이기도 한데, 바로 여기에 신앙의 근거가 마련된다. 이 근거란 계몽사상에게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관한 우연한 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참으로 지의 근거란 지의 보편적인 힘에 의거하여 절대정신의 진리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서, 그의 절대정신이 신앙이라는 추상적인 순수의식 또는 사유 그 자체 내에서는 절대신으로 나타나고 자기의식 속에서는 자기에 관한 지(das Wissen von sich)로 나타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27

이러한 신의 운동의 구도는 전형적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모습이다. 최초 주체로서 ‘성부(聖父)‘와 타자로서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성령(聖靈)으로 통합되며 완성에 이른다. 헤겔에 따르면 이들간의 관계는 완벽하고 완전한 운동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이성=정신‘이 자유롭게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 될 것이다.

신의 운동을 그 외형만 놓고 간단히 살펴볼 경우 교양의 세계에서는 국가권력이나 정의가 으뜸가는 사안(事案)이었다고 한다면 신앙의 세계에서는 단일한 영원의 실체, 즉 조물주이며 절대신이라는 완전무결한 정신이 으뜸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단일하고 영원한 실체는 정신적 존재라는 자기본질을 실제로 명시해야만 하므로 결국 ‘타자에 대한 존재‘로 변신하여 자기동일적인 천상의 세계를 벗어나 현세에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자기를 희생하는 절대자, 즉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p109)... 셋째로 이 소외된 자기이며 모멸당한 신은 최초의 단일한 존재로 복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때 비로소 신은 성령이며 정신으로 표상되기에 이른다. 이 세 개의 존재는 현실세계를 전전하고 난 다음 사유의 힘으로 제자리로 되돌려져서 안정된 영원의 정신성을 갖추게 된다. 이로써 이 세 존재는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09

진리가 지 그 자체가 되고 이 둘 사이의 대립이 전적으로 소멸되는 가운데 더욱이 이를 방관자인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 그 자체가 이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자기의식은 의식의 대립을 극복하기에 이르렀다(p169)... 자기의식의 지는 자기의식에서 실체 그 자체이다... 절대신은 신앙에서와 같이 사유의 틀 안에서의 단일한 본질적 존재로 규정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일체의 현실을 떠안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현실이 바로 지로서의 현실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70

결국 보편적 자유에 대립되는 최고의 현실, 아니 오히려 보편적 자유에 부과되어야 하나 유일한 대상은 현실적인 자기의식에 필수적인 개별적 자유라고 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유기적 조직으로서 구체적인 형태를 띠지 않은 채 불가분한 연속성 속에서 자기를 지켜나가려는 보편적 자유는 끝내 의식이 뿜어내는 자유의 운동을 야기하게 됨으로써 내부 분열을 조성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p162)... 절대적 자유가 현실의 사회조직을 말끔히 해체하여 자유가 확고하게 정립될 때, 이 자유야말로 절대적 자유의 유일한 대상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63

이제 이성의 방향성이 결정되었다. 이제부터 영원한 실체인 신의 삼위일체 구도는 근대국가를 이룬 이성이 자유롭게 선택해서 나갈 길이 될 것이다. 헤겔은 개별적인 자아가 타자로서의 보편성을 만나 생겨난 갈등과 갈등으로 소외된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주체로 통일되는 과정을 통해 도덕의 완성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이성과 감각이 알력을 빚는 마당에 이성이 취해야 할 태도는 대립을 해소하여 그 결과로서 양자의 통일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통일은 양자가 동일한 하나의 개체 속에 있는 본원적인 통일이 아니라 양자의 대립을 인식하는 가운데 이를 넘어서는 데서 생겨나는 통일이다. 이러한 통일이야말로 마땅히 현실적인 도덕(die wirkliche Moralitat)이라고 하겠으니, 거기에는 현실의식으로서의 자기와 자기임에는 틀림없는 보편자로서의 자기와의 대립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보는 바와 같이 도덕의 본질에 깃들어 있는 매개작용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75

현실의 의식은 그토록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순수한 의지와 지에서는 의무만이 본질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현실과 대립하는 개념이나 사유에서는 의식이 완전한 것이 된다. 절대신이란 어디까지나 사고의 결실로서, 현실의 피안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고에서는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지와 의지가 완전한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신만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한에서 신에게 바쳐져야 할 봉사를 한 만큼의 보수로서 응분의 값진 행복이 안겨질 수도 있다. 여기서 도덕적 세계관은 완성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80

도덕의 완성이란 바로 앞에서 도덕적으로 가치 없는 것으로 규정됐던 것이 바로 그 도덕성 속에, 도덕성과 함께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다. 도덕은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추상적인 비현실적 관념체로서만 가치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도덕의 진리는 현실에 대립하여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가운데 티끌만큼도 현실에 오염되지 않는 데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196

결국, 이성의 운동은 신의 운동의 모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변증법(辯證法, dialectics)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보편정신과 보편정신이 표상화된 개체의 갈등과 이들의 통일은 종교사에서는 자연종교, 예술종교, 절대종교의 발전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러한 발전과정은 민족정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성의 발전을 통해 역사 속에서 근대국가의 모습으로 드러난 정신은 이제 민족을 넘어 세계로까지 확장되며, 마침내 세계정신에까지 도달한다.

결국 개별과 보편, 이 양자에 의해 순수한 지가 성립되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에 의해 순수한 지가 성립되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간의 대립을 통하여 의식이라는 모습을 띠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식은 아직 자기의식은 아니다. 의식이 자기의식이 되려면 바로 양자 사이의 대립의 운동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때의 대립은 오히려 자아=자아라는 단절 없는 연속성이며 동일성(die indiskrete Kontinuitat und Gleichheit des Ich = Ich)이다. 여기서 자아는 저마다 자립해 있으면서 스스로를 순수한 보편적존재로 아는 그런 모순을 지닌 채 타자와의 동일성에 반발하여 그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니, 결국은 자기로 인하여 스스로를 지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의 외화를 통하여 두 개의 존재로 분열된 지는 마침내 자아, 자기로서의 통일성을 되찾아온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자아의 모습으로서, 이 자아는 자기와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보편적인 모습을 인식하고 또한 이 자아는 자기 내면에 잠겨 있는 지(知) 속에서, 그의 내면의 지가 순수히 고립해 있음으로 하여 오히려 완전한 보편성을 획득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35

민족정신의 집합체는 자연의 전체와 인륜세계의 전체까지도 포괄하는 일군(一群)의 신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민족정신은 또한 하나의 신에 의해 통치되어 있다기보다는 그의 명령 아래 있다. 각각의 민족정신은 인간 존재란 본래 어떤 것이고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지시해주는 보편적인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 존재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며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신들은 그를 에워싼 쟁탈전을 벌이는데, 다만 애초에는 우연하게나마 인간의 편이 민족에 부과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의식의 내용이 자연과 인륜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성을 띠는 데 맞추어 내용이 생겨나는 의식의 형식도 당연히 보편성을 띠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은 더 이상 축제에서의 현실적인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비록 개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표상에 잠겨서 자기의식적인 존재와 외적인 세계를 합성(合成)하고 결합하는 행위로 고양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표상이 구현되는 것이 언어인데...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81

필연성을 인식하는 사유의 본체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직접적 존재 자체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또 개념의 단일한 통일체라는 그 자체가 직접적 존재인 이상 이 구별은 개념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는 개념이 자기를 외화하여 직관된 필연의 존재가 되는 가운데 필연성 속에서 자기를 고수하며 자기를 알고 자기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의식, 즉 인간의 형태를 띤 정신의 직접적인 존재는 현실의 세계정신(der wirkliche Weltgeist)이 이렇듯 자기를 아는 데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07

변증법적 운동의 끝단에서 우리는 신의 운동과 만나게 된다. 순수한 사유의 운동으로서 그 통일체에는 정신으로서의 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서 선과 악은 하나이면서 또한 다른 것이라는 두 주장이 대립하면서, 운동의 근원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주체)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술어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헤겔의 논증은 결국 모든 것은 운동이며, 이로부터 자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선과 악이라는 구도의 기본이 운동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사유가 절대개념을 향한 끊임없는 정진에 있음을 헤겔은 변증법의 구도 속에서 밝혀내는 것이다.

감각적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 순수한 추상(eben diesereine Abstraktion)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추상적 사유에 대치해 있는 존재가 바로 직접 있는 그대로의 존재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최저의 것(Das Niedrigste)이 동시에 최고의 것(das Hochste)이고 표면에 완전히 드러나 있는 계시가 최고의 깊이를 지닌 것이 된다... 의식이 직접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은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수사유의 대상인 절대신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개념적으로 ˝존재가 본질이다˝라고 의식하는 사태가 종교적 의식의 의식하는 바가 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와 본질의 이러한 통일(Diese Einheit des Seins und Denkens), 즉 사유가 곧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으 종교의식이 일구어낸 사고의 결실이고 그에 의해서 매개된 지이면서 동시에 감각을 통한 직접적인 지이기도 하다. 존재와 사유의 이러한 통일(Diese Einheit des Seins und Denkens)이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가운데 사유에 기초한 통일이 동시에 존재로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서 신이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바, 이때 신은 그의 본래 모습인 정신으로서의 존재를 계시하며 거기에 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11

결국 선과 악이 그의 개념에 비추어서 선도 악도 아니고 오히려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면 이에 못지않게 선과 악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상이한 것이라고도 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단일한 독자존재라는 것과 단일한 지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순수한 부정성을 지닌 절대적 차이를 자아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p329)... ˝선과 악은 동일한 것이다˝라는 명제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라는 두 개의 명제가 함께할 때 여기에 비로소 전체가 완성되는데, 이 경우 첫번째 명제의 주장과 단언에는 두번째 명제가 단호히 자기 주장을 맞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27

개념은 외화된 자기와 일체화된 스스로의 참다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서 지가 순수한 지를 아는 것이 되어 있다. 즉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추상적인 신의 지가 아니라 바로 ‘이것‘의 지이고 ‘이‘ 자기의식을 신으로 아는 지인 것이다. 여기서 대상은 대상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자기에 다름아니다(p346)... 이렇게 순수한 지의 등장은 곧 대립을 걸머지는 것으로서 신의 순수한 지는 어쩔 수 없이 지의 단일성을 지양하고 개념이 지니는 분열이나 부정성을 발동시킨다. 이 분열이 자각적으로 자기에게 맞서는 한은 (sofern dies Entzweien das fur sich Werden ist) 여기에 악이 생겨나고 그것이 잠재적인 본래의 상태로 있는 한은 (sofern es das Ansichist) 선이 유지된다. 애초에는 잠재적으로 새겨나던 것이 명확히 의식되면서 동시에 이중의 상(像)이 떠오르는데, 즉 의식은 존재와 행위를 자각하는 것이면서 또한 스스로가 존재하며 행위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47

결국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우리의 인식이 지각으로 지각에서 지성을 거쳐 이성으로, 정신으로서 이성이 인륜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제도인 가정, 시민사회, 국가의 모습과 함께 이들의 원형으로서 신의 운동을 표현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운동인 신의 운동에 따라 정신의 운동 역시 변증법적 구조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이러한 영원한 운동의 방향성은 외부로 향하지만 결국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내부로의 움직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절대개념을 향한 이러한 움직임의 방법은 오직 학문(學文)밖에 없음을 헤겔은 밝힌다.

이러한 구도의 <정신현상학>에는 여러 내용이 담겨있다. 헤겔의 미학과 역사철학, 법철학 등이 모두 종합된 이 저작에는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헤겔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생각할 점이 적지 않지만, 이러한 논의를 하나의 리뷰에 모두 담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른 페이퍼로 미루도록 하자. 이번 리뷰에는 <정신현상학>의 대략적인 뼈대를 서술하였기에 빠진 부분이 적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개인적으로 <정신현상학>을 읽고 나면 헤겔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참 친절한 사람이라는 인식변화를 할 수 있었던 점은 작은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자아=자아는 자기 자신에게 복귀하는 운동이다. 즉 이러한 동등성은 동시에 절대부정으로서 절대적 차이를 낳게 되므로 자아의 자기동일성은 이 순수한 차이와 대립하게 되고 순수한 차이는 자기를 아는 지와 대립되는 순수한 대상으로서, 이것은 곧 시간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앞에서는 존재의 본질이 사유와 연장의 통일이라고 불렸다면 이제는 그것이 사유와 시간의 통일(Einheit des Denkens und der Zeit)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차이에서 차이로 이어지며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도리어 자기 내면의 붕괴에 붕착하여 안정된 대상 세계를 꾸며내는 연장으로 전화하는데, 이 연장은 자기와의 순수한 자기동일을 유지하는 다름아닌 자아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55

새로운 형태를 갖춘 정신은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스스럼없는 전진을 개시하여 마치 이전의 모든 것은 상실되어 정신은 이제까지 축적해온 그의 온갖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는 듯이 심기일전하여 처음부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러나 모든 지나간 것은 기억 속에 보존되고 내면화되어 실제로는 더욱 고차적인 실체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 정신이 오직 자기 내면만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의 교양을 처음부터 쌓아나가려고 할 때 출발점 그 자체가 이미 높은 단계에 정립되어 있다... 여기서 목표가 되는 것은 정신의 심오함을 계시(die Offenbarung der Tiefe)하는 데 있으니, 바로 이것을 계시하는 것이 절대개념이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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