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1920년) 10월, 혼춘의 비적사건을 구실로, '비적소탕'이란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 혼춘을 강점하고 우리 겨레의 학살을 감행했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록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조손(祖孫)이 동시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혼백 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 _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하)> , p214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1920년대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에서 행해진 양민학살의 참상을 전하지만, 이같은 참상이 간도 지역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3.1운동 직후 국내에서도 수많은 학살이 있었고, 간도지역에서는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의 패전 직후 보복성 학살을 일제는 감행한다.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의 시공간은 독립운동의 거대한 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의 장이었다. 3.1운동의 온 과정에서 무수한 폭력행위가 자행되었다. 시위 참가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부상을 입은 시위 참가자에 대한 방치,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에게 가해진 폭행, 조사 과정에서의 고문, 마을 방화와 재파괴 등 그 형태도 다양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행위들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어왔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19/322


 지난 2019년 발행된 <3.1운동 100년> 중 한 연구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학살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무고한 양민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관점은 언뜻 문제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학살자 중심의 관점이라는 지적이다. '무고(無辜)'에 초점을 맞출 경우, 일제의 만행이 지나쳤다는 정도로 희석될 수 있기에, 본질적으로 학살의 성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살은 학살자의 의도와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피학살자의 조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존 연구에서 3.1운동 당시의 학살이 '평화적'이며 '비폭력적'인 상황에서 자행되었다고 서술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을 자행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서술에 따르면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된 사망자에게는 '피학살자'라는 표현이 가능하지만, 폭력적 시위가 발생한 지역에서 사망한 사망자들은 '피학살자'로 보기 어렵다. 이는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들을 '폭민'으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탄압을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설명하고자 한 일제 측의 논리와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0/322


 저자 김강산은 연구를 통해 3.1운동이후 일어난 학살이 단순한 폭력적 진압이 아닌, 민족말살의 한 수단임을 밝혀내며 그 주체가 일본제국주의 중추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본군에 의해 행해진 무수한 학살의 악몽은 이 시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우금치 전투(牛禁峙戰鬪) 등에서 보인 왜(倭), 일본군의 만행은 이후 역사 속에서 (변용된 주체에 의해) 제주 4.3사건, 보도연맹사건,  5.18민주항쟁 등의 모습으로 다르게 재현되어왔다.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의 국내진출이 얼마나 트라우마가 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대통령 후보자간 토론에서 나온 일본군이 국내 진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어느 후보자의 언행은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의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3.1운동 102주년과 함께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둔 오늘. 그날의 함성과 이를 잔혹하게 짓밟은 일본군의 만행이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재현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과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 또한 함께 하게 된다...


 3.1운동 당시 자행되었던 학살은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살인(homicide)사건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벌였던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3.1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식민주의의 본질이 학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5/322


 유엔의 제노사이드조약을 3.1운동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3.1운동에 대한 탄압은 엄중한 처치 명령, 군대 출병 등 위로부터의 정책적 결정을 통해 조직적/의도적으로 야기된 전시 제노사이드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3.1운동의 탄압을 전쟁 상황으로 기획했던 주체들에게는 제노사이드의 "직접적인 또한 공연한 교사"가 성립한다. 셋째, 학살을 실행한 각각의 주체에게도 살해에 의한 제노사이드로서, 제노사이드의 범죄가 성립한다. 이뿐만 아니라 개인이 아닌 조직, 단체로서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제노사이드의 핵심에 있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9/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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