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빈 현대의 고전 5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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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인 자유주의 문화는 합리적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 합리적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배와 자기 자신에 대한 도덕적 통제를 통해 훌륭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20세기에 접어들자 합리적 인간은 그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지녔지만 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존재인 심리적 인간에게 밀려났다. 이 신新 인간은 그저 합리적이기만 한 동물이 아니라 감정과 본능을 지닌 생물이다.... 19세기 빈 자유주의 문화는 서로 전혀 화합하지 못하는 도덕적 요소와 심미적 요소로 기묘하게 나뉘어 세기말 지식인들에게 그들 시대의 위기에 직면할 지적 도구를 제공했다.(p49) <세기말 빈> 中


 칼 쇼르스케(Carl E. Schorske, 1915 ~ )는 <세기말 빈 Fin-De-Siecle Vienna>에서  19세기 말 직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을 배경으로 자유주의 사상의 등장과 퇴조라는 사상의 변화를 쫓는다. 정치, 건축, 정신분석학, 미술, 음악의 여러 분야를 독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라는 사상의 흐름을 통해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정치와 문화가 결코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배경 또한 우리에게 알려준다.


 저자는 오스트리아의 부르주아(bourgeois) 계급에서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다른 특징을 발견한다. 대혁명을 통해 귀족 계급을 몰아낸 프랑스나 산업자본을 통해 귀족의 권위를 대체한 영국 부르주아와는 달리 오스트리아에서는 부르주아들 스스로 귀족 계급에 동참하려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으며, 문화/예술에 있어서는 귀족계급의 지원을 받은 예술가과 그들의 작품들은 체제의 순종을 강요하면서 어용(御用)예술로 변질되어 갔다는 점에서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오스트리아의 부르주아가 프랑스나 영국의 부르주아와 구별되는 기본적인 사회적 사실 두 가지가 있다. 그들은 귀족정치를 없애버리지 못했고 귀족들에게 완전히 녹아들어가지도 못했다. 또 그러한 취약성 때문에 황제를 경원하면서도 아버지 - 보호자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에게 의존했으며 깊은 충성심을 보였다. 독점적인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탓에 부르주아는 항상 어딘가 국외자 같은 존재였고, 귀족계급과 통합하려고 애썼다. 수도 많고 부유한 빈 거주 유대인 세력은 동화되려는 성향이 강했으므로 이 같은 추세를 더 강화시킬 뿐이었다.(p53) <세기말 빈> 中


 귀족계급 문화에 들어가는 둘째 길은 전통적으로 번영해온 공영예술의 후원을 통해서였다. 1890년대가 되면 중산계급 상류층이 떠받드는 영웅은 이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배우, 화가, 평론가였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빈의 중산계급 사회에서 예술이 발휘하던 기능이 변했고, 이 변화에서는 정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p54)...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에 예술에 몰두하는 이들이 한 사회 계급에서 고립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빈에서만은 그런 예술이 사실상 한 계급 전체의 충성을 요구했다.(p55) <세기말 빈> 中


 이러한 오스트리아 사회의 특수성은 서유럽이 혁명의 분위기에 휩싸이던 시기에도 제국을 보호하는 힘이 되었다. 심지어, 1860년대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에 이루어진 경제성장의 결과마저도 귀족문화의 확산으로 바꿀 정도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 ~ 1951)가 거부했던 오스트리아 전통의 힘 때문이었다.


 사회학적으로, 문화의 민주화란 중산계급의 귀족화를 의미한다. 예술이 그토록 중심적인 사회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예술 자체의 발전에 극히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의 경제가 성장한 결과, 더 많은 가정에 귀족적 생활 스타일을 추구할 기반이 마련되었다.(p437) <세기말 빈> 中


 쇤베르크는 예술이 진리를 부패시키는 데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그 고발 속에서 오스트리아 전통을 성장시킨 주요한 힘들에 대한 전적이고도 포괄적인 거부의 음성이 울려나온다. 그 힘이란 말씀이 육화되고 육체로 가시화된 가톨릭의 은총의 문화, 부르주아들의 법 우선적 문화를 보충하고 승화시키기 위해 세속적으로 적용된 품위의 문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세기말의 자유주의의 위기에서 예술 그 자체를 가치의 근원으로, 종교의 대체물로 보려한 태도 등이다.(p522) <세기말 빈> 中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보수주의의 중심이었던 '비인 체제'와 이를 이끈 외상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Furst von Met´ternich, 1773-1859)후작의 나라답게 오스트리아 제국은 혁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이는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게르만주의'와 '슬라브주의'의 충돌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자유주의 정부의 붕괴는 제국 내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로 만들었고, 반(反)자유주의 운동은 반(反)유대인 운동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사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출처 : https://www.history.com/news/did-franz-ferdinands-assassination-cause-world-war-i)


 오스트리아 사회는 질서와 진보라는 자유주의적 좌표를 따라가지 못했다.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자유주의자들이 상류계급에 대항하여 고안해낸 프로그램이 낳은 결과는 하층계급의 폭발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했겠지만, 그 저항 에너지는 그들의 숙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향해 폭발했다. 귀족계급의 국제주의에 맞서기 위해 게르만 민족주의를 고안했지만, 그들에게는 슬라브 애국주의자들의 자치권 요구라는 응답이 돌아왔다.(p190)<세기말 빈> 中


  귀족계급 압제의 시녀라는 죄목으로 학교와 법정에서 발본색원되었던 가톨릭교는 농민과 장인들의 이데올로기라는 모습으로 복귀했는데, 이들이 볼 때 자유주의는 곧 자본주의였고 자본주의란 유대인을 의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위쪽에 있는 옛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대중을 다시 불러 모으기는커녕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전반적인 해체의 힘을 불러낸 것이다.(p191) <세기말 빈> 中


 <세기말 빈>에서는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자유주의 정부에서 이루어진 공공사업(건축)이 어떻게 빈을 변화시켰는지와 자유주의 정부의 붕괴가 시오니즘(Zionism )을 발생시켰는지, 유대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는 반유대주의라는 정치운동을 어떻게 정신분석을 통해 극복하려 했는지,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는 분리주의를 이끌면서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했으며, 쇤베르크가 불협화음을 통해 기존 질서를 부정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진 서로 다른 변화가 정치와 긴밀하게 관계맺고 있음을 독자들을 깨닫게 된다. 


 빈을 지배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룬 가장 성공적인 업적 가운데 일부는 극적인 효과와는 전혀 거리가 먼 기술적인 작업으로 얻어졌고, 그 작업은 이 도시가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를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러 세기 동안 도시를 괴롭혀온 범람을 막기 위해 다뉴브 강에 운하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1860년대에는 도시 전문가들이 우수한 상수도 공급 시설을 개발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던 시 당국은 1873년에 최초의 시립 병원을 개원하면서 공공 보건 시스템이 정비되자 심각한 전염병들이 사라졌다.(p79) <세기말 빈> 中


 프로이트의 정치 이론의 중심 원리란 모든 정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차적 갈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이롭게도 '혁명적 꿈'의 시나리오에 바로 이 결론이 담겨 있다. 정치적 만남에서 학계로의 도피를 거쳐 툰 백작을 대체 한 아버지에 대한 정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부친 살해가 권력 살해를 대체하고 정신분석이 역사를 극복한다. 정치는 반 反정치적 심리학에 의해 중립화된다.(p295)... 프로이트는 과학적 해방자가 되어 빚을 갚게 될 것이다. 그는 한니발의 서약을 자신의 반정치적 발견에 의해 해소했다. 즉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데서 유년기 경험이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의 발견이 그것이다.(p296) <세기말 빈> 中


[그림] Klimt, Pallas Athene(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48184614925603529/)


 클림트와 분리파는 두 방향으로 오토 바그너의 이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현대에 대한 몰입을 강화시켰고 링슈트라세의 역사적 스타일을 대체할 새로운 시각 언어를 그에게 제공했다... 현대 인간에 대한 클림트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비교 秘敎적이고 내면적인, 1890년대 초반의 문학에 이미 나타나 있던 '심리적 인간 homo psychologicus'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바그너의 거울에 비친 현대성의 얼굴은 이와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활동적이고 효율적이며 합리적이고 멋쟁이인 부르주아, 시간은 별로 없는 반면 돈은 많으며 기념비적인 것을 좋아하는 도시인의 얼굴이다.(p153) <세기말 빈> 中


 이 세기가 시작되기까지 서구의 전통적인 심미적 문화는 구조를 표면에 배치해 그 아래에 억눌려 있는 감정의 본성과 생명을 통제하도록 했다. 심리적 표현주의자인 쇤베르크는 표면이 깨지고 통제 불가능한 우주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취약한 인간적 감정의 전 생명력으로 충만한 예술을 청중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 그 혼란을 통합하게 될 잠재의식적이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합리적 질서의 세계를 그 아래쪽에 배치해두었다. 여기서 해방된 불협화음은 새로운 화음이 되고 심리적 혼란은 미적 감각을 뛰어넘는 질서가 된다.(p524) <세기말 빈> 中


 <세기말 빈>에서는 이와 같이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오랜 중부 유럽의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자유주의-반(反)자유주의'의 투쟁이 드러난다. 비록 19세기 후반 자유주의는 세력을 잃게 되지만, 그들이 집권과정에서 보여준 성과는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유주의가 주도권을 잡았던 짧은 시기에 교양과 부의 통합은 놀랄 만큼 구체적인 사회 현실이 되었다. 행동과 성찰, 정치와 경제, 과학과 예술, 이 모든 것이 현재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며 자기들이 지지하는 인류의 미래를 확신하는 사회적 계층의 가치 체계 속에서 통합되었다. 새로운 도시계획에서, 살롱의 생활에서, 가족의 에토스에서, 모든 곳에서 희망에 찬 합리주의적 자유주의의 통합적 신조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p438) <세기말 빈> 中


 개인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실패는 가진 민중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민중을 구원하는 수단으로서 제시한 '예술'과 경제의 번영은 중산층의 귀족계급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을 뿐으로 이들을 자유주의 지지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반면, 시오니즘의 창시자 헤르츨(Theodor Herzl, 1860 ~ 1904)의 대중에 대한 관점은 사뭇 다르다. 수동적인 민중과 능동적인 대중. 다중에 대한 지도층의 이러한 의견 차이가 오스트리아-헝가지 제국의 해체와 이스라엘의 건국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지테의 민중 개념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의 개념을 정확하게 뒤따르고 있다. 즉 '민중 Volk'은 보수적이고 속물주의에 빠지기 쉽지만 또한 천재의 호소에 부응할 수 있고 가장 심오한 가치를 깨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와 지테에게서 민중은 프랑스 혁명 이론가들이나 마르크스에게서처럼 정치에서의 능동적 요소가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보수적이며, 현대적이고 파괴적인 하향식 전복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구원자인 예술가는 파우스트처럼 보수적(산업 시대 이전의)민중을 무자비하게 파괴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진보를 이뤄낼 것이다.(p135) <세기말 빈> 中


 헤르츨의 시오니즘의 원래 전략에서 대중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엑소더스의 기동타격대가 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부유한 유럽 유대인들을 강요하여 시오니스트 해결책을 지원하도록 만들 몽둥이가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새로운 국가의 운반자인 게토의 유대인, 무기로서의 게토 유대인이다.(p257) <세기말 빈> 中


 <세기말 빈>은 이처럼 우리에게 생소한 중부 유럽 제국의 황혼(黃昏)을 배경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프로이트, 클림트, 쇤베르크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실로 꿰는 이들의 사상과 작품 속에서 진(眞)과 미(美)가 어떻게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지를 확인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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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27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부터 인스타 이웃님의 리뷰를 보고
쟁여둔 요제프 로트의 <라데츠키 행진곡>
을 읽기 시작했는데, 겨호님이 읽으신
<세기말 빈>과 시대상이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이라는 정치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세기말 빈>은 좀 더 문화적
측면이 강조된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슬라브 삼중제국
까지 고려했다는 점은 미처 몰랐습니다.
티토의 유고 이전에 이미 합스부르크 제
국의 민족 통합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도
한 수 배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4-27 18:01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을 듣고 <라데츠키 행진곡>을 찾아보니 말씀하신대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작품이네요. 저 역시 좋은 작품을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문학작품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뼈대 위에 입힌 살갗과 같기에,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작품을 깊이 감상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정치적, 경제적 이해 없이 단순히 이념만으로 민족과 나라를 통합하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레삭매냐님 글을 통해 생각해봅니다.^^:)
 
세기말 빈 현대의 고전 5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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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에서는 대부분의 분야에 자유주의 이후 post-liberal 시대의 특징인 문화의 ‘현대성 modernism‘이 나타난 것이 1890년대인데, 그 후 20년 만에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새로운 고급문화가 마치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자라났으며 그 온실의 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 - 머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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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서설 대우고전총서 32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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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상학은 본래 선험적 종합명제들만을 다루는 것이며, 이러한 명제들만이 형이상학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형이상학은 물론 그 개념들의 많은 분해들을, 그러니까 분석판단들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수행절차는 사람들이 자기의 개념들을 분해함으로써 한갓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여느 다른 인식방식에서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직관과 개념들에 의한 선험적 인식의 산출이, 결국은 또한 선험적 종합명제들의 산출이, 그것도 철학적 인식에서의, 그러한 산출이 형이상학의 본질적 내용을 이룬다.... 우리에게 오직 하나 남은 것은 '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하는 비판적 물음이거니와, 이 물음에 대한 답변 여하에 따라서 우리는 장차 우리의 거동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p143)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의 계획서라 밝힌 <형이상학 서설 Prolegomena>은 '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가?'라는 하나의 물음에 대한 칸트의 답이다. 결론부터 보자면, 칸트의 형이상학은 '인식과 그 서술이 지향해야만 하는 완성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초월적 이념(이성)에 의해 형이상학이 성립됨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번 리뷰에서는 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월적 이념들의 총괄은 자연적인 순수 이성의 본래적 과제가 되는데, 이 과제는 이성으로 하여금 순전한 자연고찰을 떠나 모든 가능한 경험을 넘어가게 하고, 이런 노력 중에서 형이상학이라고 일컫는 것을 성립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p307)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인식들은 경험적이지 않으며, 선험적 판단만을 담고 있어야 하며, 선험적 판단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구분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인식의 원천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이 경험적일 수 없음은 이미 그 인식의 개념 속에 들어 있다... 형이상학적 인식은 선험적 인식, 바꿔 말해 순수 지성과 순수 이성으로부터의 인식이다.(p126)...  형이상학적 인식은 순정하게 선험적 판단들만을 함유해야 한다... 판단들은 내용에 따라 한낱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덧붙이는 바가 아무것도 없거나, 확장적이어서 주어진 인식을 확대하거나 한다. 전자는 분석판단이라고, 후자는 종합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p127)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는 이 중에서 분석판단들은 모순율에 의거하기에 선험적 판단들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종합판단들은 후험적인 판단들도 있지만, 모순율 이외의 다른 법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분석적 판단과 다르다. 칸트는 형이상학적 판단은 모두 종합적 판단이라 보았기 때문에, 이후 칸트의 관심은 종합판단으로 향한다.


 분석판단들은 술어에서 주어의 개념에, 비록 그다지 명료하지 않고, 명료한 의식으로써 생각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미 실제로 생각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모든 분석판단들은 전적으로 모순율에 의거하며, 그 본성상 선험적 인식들이다. 긍정적 분석판단의 술어는 이미 앞서 주어개념 안에서 생각되는 것이므로, 이 술어가 모순 없이는 주어 개념에 대해 부정될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석적 명제들은 선험적 판단들이다.(p129)...  그 근원이 경험적인 후험적 종합판단들이 있다. 그러나 또한 선험적으로 확실하고, 순수 지성과 이성에서 생겨나는 그러한 종합판단들도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이것들이 결코 분석의 원칙, 곧 모순율에 따라서만 생겨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p129) <형이상학 서설> 中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은 모두가 종합적이다. 사람들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판단들과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 중에는 그 대다수가 분석적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이 학문의 목적이 전적으로 지향되어 있으며, 언제나 종합적인, 형이상학적 판단들을 위한 수단을 이룰 뿐이다.(p141) <형이상학 서설> 中


 이후 논의에서 비록 우리가 형이상학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순수 수학과 순수 과학의 존재를 통해 형이상학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이들은 경험을 통해 인식하지 않기에, 경험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일까?


 비록 우리가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선험적인 순수한 종합적 인식, 곧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이 실제로 있고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다행스런 일이다. 왜냐하면 저 두 학문은 한편으로는 순전한 이성에 의해, 또 한편으로는 경험에서 오는 보편적 일치에 의해 명증적으로 확실하되, 그럼에도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널리 인정되는 명제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어떻게 선험적 종합 인식이 가능한가만을 물으면 된다.(p145)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정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을 '감성'이라고 부르고, 감성을 통한 직접적 인식을 '직관'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직관과 실체의 개념이 선험적이라는 사실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이들은 경험과 무관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이다.  


  우리가 선험적으로 사물들을 직관할 수 있는 것은 감성적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일 뿐이며,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또한 객관들을 그것들 자체인 바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현상할 수 있는 바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간과 시간은 순수 수학이 그것의 명증적인 동시에 필연적인 것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식과 판단들의 기초에 두고 있는 그러한 직관들이다....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 순수 직관들이라는 사실을 통해, 공간과 시간은 모든 경험적 직관, 다시말해 현실적 대상들의 지각에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리고 이것들에 맞춰서 대상들이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러나 물론 단지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바대로만 인식될 수 있는, 우리 감성의 순전한 형식들임을 증명한다.(p161) <형이상학 서설> 中


 직관이 곧 영감을 통해 내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모든 현실적인 인상들에 선행하는 나의 주관 안의 감성 형식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함유하고 있지 않을 때에만, 나의 직관이 대상의 현실성에 선행하여 선험적 인식으로 생기는 일이 오직 유일하게 가능하다.(p159) <형이상학 서설> 中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이며, 우리는 이들 안에 있는 대상들을 감관을 통해 직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감관을 통해 직관적으로 얻은 지식은 경험적이고 주관적이다. 이러한 지식이 개인의 경험으로 머무르지 않고,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직관이외의 다른 요소인 지성이 필요하다.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지성이 모두 필요하다. 직관을 통해 들어온 '표상'과 지성을 통한 '판단'이 통일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들이 주관성과 객관성이 모두 획득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대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직관은 오직 감관들을 매개로 해서만 일어난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하지 않으며, 단지 반성할 뿐이다.(p169) <형이상학 서설> 中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한에서 경험적 판단들은 경험판단들이다. 그러나 단지 주관적으로만 타당한 경험적 판단들을 나는 순전한 지각판단들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아무런 순수 지성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사고하는 주관에서 지각들의 논리적 연결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자는 항상 감성적 직관의 표상들 위에 지성에서 근원적으로 산출되는 특수한 개념들 또한 필요로 하며, 이 개념들이 바로 경험판단을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만드는 것이다.(p189) <형이상학 서설> 中


 감관들의 일은 직관하는 것이고, 지성의 일은 사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고함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통일하는 것이다. 이 통일은 한낱 주관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여 우연적이며 주관적이거나, 절대적으로 생겨나 필연적이거나 객관적이다. 한 의식에서 표상들을 통일함이 판단이다. 그러므로 사고함은 판단함 또는 표상들을 판단들 일반과 관계 맺게 함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판단들은 표상들이 한 주관에서의 의식과만 관계 맺어지고, 그 안에서 통일이 되면 한낱 주관적이고, 혹은 표상들이 의식 일반에서, 다시 말해 거기서 필연적으로 통일이 되면 객관적이다. 모든 판단들의 논리적 계기들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통일하는 그만큼의 가능한 방식들이다. 이 같은 계기들이 개념들로 쓰인다면, 그것들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필연적으로 통일하는 개념들이고,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들의 원리들이다. 한 의식에서의 이 통일은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다.(p201) <형이상학 서설> 中


 위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는 감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표상)하고, 지성을 통해 사고함(판단)을 알게 된다. 이러한 표상과 판단을 일치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우리가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자연'이 아니라 '내가 인식하고 사고한 결과물로서의 자연'이라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른 것들도 사실은 우리의 법칙을 자연에 적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지성은 자연의 보편적 질서의 근원이다. 지성은 모든 현상들을 자기 자신의 법칙들 안에 파악하고, 그로써 비로소 경험을 선험적으로 성립시키며, 그에 의해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되어야 할 모든 것이 지성의 법칙들에 필연적으로 종속된다. 무릇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는 우리의 감성 및 지성의 조건들에 독립적인 사물들 그 자체의 자연[본성]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p233) <형이상학 서설> 中


 '보편적 자연법칙들은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라는 명제는 이미 저절로 다음의 명제, 즉 '자연의 최상의 법칙수립은 우리 자신 안에, 다시 말해 우리 지성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에, 그리고 '우리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을 경험에 의거해 자연으로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자연을 그 보편적 합법칙성의 면에서 순전히 우리의 감성과 지성 안에 놓여 있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에 이른다.(p227)... 내가 이와 관련하여 "지성은 그의 (선험적인)법칙들을 자연에서 길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을 자연에게 지정한다"라고 말하면, 처음에는 기이하게 들릴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확실하다.(p229)  <형이상학 서설> 中


 결국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지식인 '앎'에 이를 수 없다. 표상과 판단의 통일이 경험적 판단의 한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험을 넘어선 초월적인 무엇인가(우리의 인식너머에 있기에 규정할 수 없는)가 필요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그 단초(端初)를 갖고 있다. 바로 '이성'이다. 


  경험을 통해서는 앎에 이를 수 없다. 이 물음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성은 결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성이 순수 지성을 그에 국한시키고 있는 경험적 사용은 이성 자신의 전체 사명을 충족시키지는 않는다. 각각의 개별 경험은 경험 구역의 전체 권역의 단지 한 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가능한 경험의 절대적 전체는 그 자신 경험이 아니되, 그럼에도 그것은 이성에게는 하나의 필연적 과제이다. 이 전체에 대한 순전한 표상을 위해 이성은 그 사용이 단지 내재적인, 다시 말해 주어질 수 있는 한의 경험에만 상관하는 저 순수 지성개념들과는 전혀 다른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성개념들은 완벽성에, 다시 말해 전체적인 가능한 경험의 집합적 통일에 상관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주어진 경험을 넘어서고, 초험적이 된다.(p243) <형이상학 서설> 中


 감성세계는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연결된 현상들의 연쇄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자립적인 것이 아니고, 본래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현상들의 근거를 함유하고 있는 것과, 즉 한낱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들 그 자체로서 인식될 수 있는 존재자들과 관계한다. 사물들 그 자체의 인식에서만 이성은 조건 지어진 것으로부터 조건들로의 진행에서 완벽성에 대한 요구가 언젠가는 충족되는 것을 볼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p291) <형이상학 서설> 中


 우리는 이것에 대해을 말할 수 없지만, 두 가지는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성'을 통해서 초월적인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우리는 이성을 통해 완벽한 절대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식의 한계로 인해 형이상학적 세계의 최고존재자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안의 이성을 통한 이끌림을 통해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형이상학은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가 <형이상학 서설>에서 내린 결론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바, 그것은 한낱 우리 행위[활동]들의 자연원인들인 주관적으로 규정하는 근거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런 한에서 그 자신 현상들에 속하는 존재자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낱 이념일 따름인 근거들이 이 능력을 규정할 수 있는 한에서, 객관적인 이 근거들과도 관계 맺고 있다. 이 연결은 당위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 능력을 이성이라고 일컫는다.(p274) <형이상학 서설> 中  


 순수 이성은 자기의 이념들 중에 경험의 분야를 넘어가 있는 특수한 대상들을 의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과 연관한 지서사용의 완벽성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완벽성은 원리들의 완벽성일 뿐, 직관과 대상들의 완벽성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완벽성이 명확하게 표상되게 하기 위하여, 이성은 그 완벽성을 그 인식이 저 [지성의] 규칙들에 관하여 완벽하게 규정된 객관의 인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객관은 단지 하나의 이념일 뿐으로, 지성인식을 저 이념이 가리키는 완벽성에 가능한 한 근접시키기 위한 것이다.(p251) <형이상학 서설> 中


 우리는 하나의 비물질적 존재자, 하나의 오성세계, 그리고 모든 존재자 중의 최고존재자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오직 사물들 그 자체인 이것들에서만 현상들을 그와 동종의 근거들에서 도출함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완성과 충족을 만나기 때문이며, 또한 이 현상들은 항상 어떤 사상(事象) 그 자체를 전제하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인식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그 어떤 사상(事象) 그 자체를 암시하고 있기에, 현상들과는 구별되는 어떤 것과 실제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p292) <형이상학 서설> 中


 이성은 우리에게 어떤 것에 대해 그 자체를 가르쳐주지 않고, 가능한 경험의 분야에서 오직 자기 자신의 완벽한 그리고 최고 목적을 향해 있는 사용과의 관계에서만 가르쳐준다.(p305) <형이상학 서설> 中


 <형이상학 서설>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칸트의 주장과 함께 <순수이성비판>의 전체적인 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시간, 공간 등 선험적 지식 등을 비롯한 이야기는 빠져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순수이성비판>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고 일단 미루도록 하자. 다만, 리뷰를 마무리하기 전 괴델(Kurt Godel, 1906 ~ 1978)의 불완전성정리(Godel's incompleteness theorems)에 대해 간단하게 확인해보자.


 수학의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수학의 체계에서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제1불완전성 정리). 나아가 수학의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수학의 체계에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체계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제2불완전성 정리)


 위와 같이 요약되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형이상학 서설>을 다시 보자. 제1불완정성 정리에 의하면, 순수 수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식 세계 내에서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형이상학 서설>의 주장과 일치한다. 반면, 제2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식 범위 내에서는 우리의 인식이 올바르다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닐런지. 이처럼,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포함한 모든 것이 부정된다면, 인식 너머의 존재도 부정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제1불완전성 정리와 제2 불완전성 정리를 종합한다면, 형이상학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일전에 정리한 <신의 존재에 대한 괴델의 수학적 증명>을 다시 읽고 보다 상세히 정리하기로 하고 리뷰를 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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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꽃양배추하고 양배추하고 콩요리하고 바나나하고 오렌지도 안 먹어. 그리고 난 사과하고 밥하고 치즈하고 생선튀김은 싫어. 그리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토마토 절대 안 먹어."(내 동생은 토마토를 아주 싫어해요.)


"아하, 이건 으깬 감자가 아냐. 보통 다들 그렇게 착각하는데, 사실은 아니라고. 이건 바로 백두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걸려 있던 구름보푸라기야."


 그 다음에 롤라가 말했어요. "오빠, 저거 좀 몇 개 줄래?" 그래서 내가 말했죠. "뭐, 저거 말이야?"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어요. 왜냐고요? 롤라가 가르킨 건 바로 토마토였거든요.  그러자 롤라가 말했어요. "그럼 물론이지 '달치이개쏴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 I Will Never Not Ever Eat a Tomato> 中


 딸아이 책 중애서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를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심하게 편식하는 동생 롤라를 위해 오빠 찰리가 꾀를 내어 골고루 먹게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귀여운 여동생과 오빠가 나누는 대화가 참 정겨운 동화입니다. 예전 딸아이에게 읽어줄 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1857 ~ 1913)의 <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내용이 떠오릅니다.


 언어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영상이다. 이 청각영상이란 순전히 물리적 사물인 실체적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의 정신적 흔적, 즉 감각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는 소리의 재현이다.(p92)... 우리는 개념과 청각영상의 결합을 기호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상 용법에서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청각영상 만을 지칭한다.(p93)... 우리는 전체를 지칭하는 데 기호(signe)라는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개념과 청각영상에는 각각 기의(signifie)와 기표(signifiant)를 대체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다. 또 좀 더 간략히 언어기호는 자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바, 그 이유는 우리가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전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p94) <일반언어학 강의> 中


 기표(記表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e)의 결합관계는 자의적이고, 언어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연합에서 비롯된 전체라는 소쉬르의 말에 따르면,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의 오빠 찰리는 어리지만, 매우 통찰력있는 소년입니다.  동생 롤라가 먹지 않는다고 말한 '토마토'의 의미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 동생은 '토마토'라는 기표를 싫어하지, '빨간 야채인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봤으니까요. 결국, 오빠 찰리는 동생을 위해 '기표 - 기의'의 조합을 동생이 원하는 관계로 다시 설정하여 긍정적인 행동 변화를 끌어냅니다. 이로써 비록, 이들이 말한 언어가 보편언어는 될 수는 없겠지만, 그들 남매간에는 누구보다 잘 통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작가 로렌 차일드 (Lauren Child)는 이런 점을 고려해서 작품을 썼겠지만, 다소 엉뚱함을 즐기는 아이들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아이들 세계에서는 충분히 있음직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문화 현상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는 요한 하위징아 (Johan Huizinga, 1872 ~ 1945)의 <호모 루덴스 : Homo Ludens :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의 말은 생각해 볼 만 합니다.

 

우리가 놀이에 부여했던 정의는 시의 정의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언어의 리드미컬하고 대칭적인 배열, 각운과 유사운(類似韻)으로 의미의 핵심을 찌르는 것, 의미의 고의적인 가장, 어구의 인공적이고 예술적인 구성 등 이 모든 것이 놀이 정신의 다양한 표현이다.(p255) <호모 루덴스> 中


 언어의 한 갈래인 시(詩), 그리고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의 많은 요소와 이론이 놀이를 통해 설명된다는 사실은 어린이가 어른의 스승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랫만에 읽은 동화책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운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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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5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5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8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8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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