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합본 2) -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합본) 2
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스테판 외에 각색 및 그림, 정재곤 옮김 / 열화당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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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 시구가 낭송되기 전에 이미 모든 주의력을 기울여 대기하면서, 단어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고, 마치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최대한 깊숙이 파고들듯이 임하려 애썼다. 하지만 간격이 어찌나 짧던지! 음절 하나가 내 귀에 닿자마자 이내 다른 음절로 바뀌었다. 여배우는 이미 장소를 옮겼고, 내가 탐구하고 싶었던 장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생생한 현실과 마주하기를 기대한다면, 인공적인 도구를 통해 보는 방법은 실제로 그러한 현실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본 것은 라 베르마가 아니라, 그저 확대경을 통해서 본 그녀의 이미지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작아진 가운데 맨눈으로 포착하는 이미지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라 베르마의 두 이미지 중 어느 쪽이 진짜일까?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15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화자는 연극 <페드르>에서 라 베르마의 연기를 지켜보며, 라 베르마의 진정한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연극의 재현 시간은 매우 짧기에 화자는 여배우의 이미지를 뒤쫓을 수밖에 없고, 여기에 무대와 객석과의 공간적 거리는 화자를 더 어렵게 한다.


 화자는 오페라글라스로 라 베르마를 바라보지만, 이내 의문에 빠지고 만다. 과연 확대경을 통한 인공적 이미지가 진정한 이미지가 될 수 있을까? 이러한 화자의 고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공간적 배경과 분리된 여배우의 이미지가 진실이 아니라면, 카메라로 연속된 시간의 흐름을 절단하여 포착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또한 진실된 이미지라 할 수 있을까? 시간과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찰나의 부분적 이미지가 과연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 화자는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연극이 끝난 후 관객들의 반응에서 발견한다.


 흥미로운 건 관객들이 열정적으로 반응했던 순간이 라 베르마가 최상의 연기를 보여주는 바로 그 순간이란 점을 내가 깨달았다는 점이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16


 배우의 연기가 관객들이 <페드르>에 대해 품고 있던 이해와 기대에 부합할 때, 관객들은 열광한다. 그것은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리던 이상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재현된 것에 대한 찬사다. 대다수 관객이 감동하는 공연이 곧 성공적인 공연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결국 관객이 무대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새로운 실재'가 아니라 자신들이 이미 '원하고 있던 이미지', 즉 일종의 '기억(혹은 선입견)'의 확인일 것이다. 이는 뱅퇴유 소나타의 인상이 반복을 통해 기억으로 강화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음악을 듣는 동안 복잡한 인상들에 직면한 우리의 기억은 미미할 뿐더러,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절반쯤 젖어 있어 방금 들은 말도 일 분 후에 잊어버리는 사람의 기억처럼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다양한 인상을 대번에 제공하질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작품을 두세 차례 듣게 되면 그것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조금씩 형성된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48


 화자가 라 베르마의 공연을 통해 그토록 잡고 싶어했던 진정한 이미지는 짧은 재현 시간으로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화자는 뱅퇴유 소나타를 계속해 들으며 반복된 재생을 통해 이미지와 기억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시간적 순서에 따른 재생이라는 음악적 한계로 인해 그것을 소유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화자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뵝퇴유 소나타의 가장 깊숙이 감춰진 부분을 간파해냈건만, 앞서 분간해낸 것은 내게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소나타가 나에게 가져다준 모든 것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랑할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뵝퇴유의 소나타 전체를 소유할 순 없었다. 그것은 우리네 삶을 닮았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49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를 통해 작품의 뮤즈는 질베르트에서 알베르틴으로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옮겨간다. 지금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무덤덤해질' 질베르트가 '오늘은 무덤덤하지만 내일은 사랑하게 될' 알베르틴으로 대체되는 순간이다. 먼 훗날 이 시기를 회상하는 화자에게, 알베르틴 역시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미 완성된 결론이다. 하지만 질베르트가 떠난 빈자리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리치던 '그 순간의 화자'에게, 알베르틴은 고통을 잊게 해 줄 유일한 '상상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에서 시간은 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때로는 관객들이 박수와 환호를 지르는 순간과 라 베르마의 연기 순간이 일치하지 않고, 뵝퇴유 소나타의 이미지가 한 번에 형성되지 않듯이, 반복되는 예술처럼 시간은 반복 재생된다. 재생되는 시간 속에서 인식은 기억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이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믿었던 사랑이 실은 스쳐 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고, '희망'과 '절망'이 서로 상반된 가지를 뻗어가며 뒤덮이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는 결코 바라볼 수 없다. 긴 시간이 흐른 뒤 멀리서 조망했을 때, 즉 순간에 매몰되었던 자아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자아가 서로 동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로소 사랑과 예술의 진정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


 동일한 사건은 서로 상반되는 방향으로 뻗은 가지를 가지고 있어서, 불행의 가지가 행복의 가지를 덮어 버리는 경우가 생겨난다. 나에게 자주 발생하곤 하는 일과 상반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즉, 기쁨을 욕망했는데, 욕망을 충족할 물리적 방도가 존재하질 않는 경우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에게, 물질적 방도는 마련돼 있지만, 동시에 기쁨은 잃어버렸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88


 우리네 삶의 다양한 시기는 서로 얽히고 설켜 있다. 우리는 지금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무덤덤해질 사람 때문에, 오늘은 무덤덤하지만 내일은 사랑하게 될 사람을 거만하게 내친다. 행여 그 사람을 만나기로 했더라면 더 빨리 사랑에 빠졌을지 모르고, 하여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대체함으로써 지금의 고통을 실로 단축했을지도 모를텐데 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지속되는 우리의 기다림은 앞서 보았듯이, 우리가 겪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결정된다. _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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