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대한민국 주식투자 산업.업종 종합분석 대한민국 주식투자 성공시리즈 3
류종현.최순현.조기영 지음 / 한국주식가치평가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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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산업의 현황과 업종별 주요 이슈와 업종별 히스토리 등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주식시장에서 산업 섹터별 ETF에 투자하는 경우는 물론, 개별기업에 투자하는 투자자의 경우 데이트레이더가 아니라면 산업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New 대한민국 주식투자 산업, 업종 종합분석>은 이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이라 여겨진다.

다만, 넓은 분야의 산업을 다루다보니 산업에 할당된 정보는 제한될 수밖에 없고 투자에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아 아쉽게 느껴진다. FSS의 전자공시시스템에서 제공되는 개별기업의 산업 소개가 더 유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본다.

단순한 업종현황과 히스토리, 업계순위 등의 정보는 앞서 말한 개별 기업의 전자공시시스템과 협회 등에서 어렵지 않게 최신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만큼 다른 부분에서 접근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예를 들면, 전방산업과 후방산업간의 관계(철강산업-자동차산업 등) 또는 소비재 산업과 자본재 산업 투자 시 유의할 부분 등 투자에 있어 유의할 부분을 정리했다면 보다 유익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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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최고봉은 자료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알려진 모르는 것과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것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래를 아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AI의 최대 성과다.

이렇게 공식적인 ‘선제적 조치’의 도입이 군사전략과 외교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와 시민사회의 활동으로 빠르게 흘러 들어가 공공의 안녕과 사회정책에 영향을 미칠 거버넌스의 근본적인 변화까지 의미했다.

선제는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확장된 잠금 상태로 유지하고 특정 인구가 자기 나름의 의제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아 궁극적으로 권한 강탈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표준화한 제품 라인의 대량생산에 의존하는 회사는 비용 절감을 위해 최대 역량으로 운영하는 경향이 있다. 기계에 막대한 돈이 들기 때문에 상각을 최적화하기 위해 기계의 가동이 중지되는 것을 막으려고 항상 노력한다. 지속적인 운영 체제를 확보하려는 경영진은 투입량이 부족해지거나 생산 흐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추가 인력과 재고의 형태로 ‘대비책’을 갖춘다.

전통적인 테일러주의와 게임화의 연결 고리는 둘 다 노동력을 훈련하는 데 합리화한 과정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다만 전통적인 테일러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경계하고 저항하거나 적어도 최소한의 노력만 기울이면서 그럭저럭 빠져나갈 수 있지만, 게임화는 합리화한 조작을 은폐하기 때문에 참여자가 게임을 그리고 나중에는 작업 과정을 완전히 익히기 위해 자신의 주체성을 동원했다고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비난의 대상을 지목하자면 서양 신학일 것이다. 적어도 ‘인류’가 지구에 행한 지배와 착취의 선봉에 서서 그것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허락된, 전지하신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주장한 것이 사실 아닌가?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복잡한 일부이며 문명의 작용은 모든 종이 기대어 살아가는 지구 및 그 위에 존재하는 무수한 주체와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 동양의 종교와 철학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며 강한 포용의 정신을 유지한다. 하지만 실상은 위대한 아시아 문명도 길을 잃은 적이 많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타 주체에 대한 영향력이 역사의 후기까지 비교적 가볍긴 했지만, 지구 권역에 대한 찬탈과 착취는 아시아의 두 번째 부상과 함께 지난 반세기 동안 급증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우리 몸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자율적 주체라기보다는 개방적인 소산 시스템이다. 인체는 생물권 전반에서 오는 (산소, 수소, 질소, 탄소, 칼슘, 인,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등) 화학원소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반투막으로 싸여 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지구 원소를 수용하는 수많은 매개체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은 분명히 눈에 띄지만 오랫동안 무시된 사실은, 모든 인간과 동료 생물체들의 내부가 이 행성에 생명이 가득할 수 있게 하는 생물군계·생태계·지구 권역의 연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각 생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세포는 지구 시스템의 요소들이 통과하고 생명의 패턴을 지속할 수 있게 반투막으로 둘러싸인 개방적 시스템이다.

화이트헤드는 전자기장 이론이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어디에나 항상 존재한다"고 제시하는 측면에서 "순전한 위치가 사물이 시공과 연관되는 기본 방식이라는 개념을 모조리 포기한다는 뜻"이 담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1926년에 펴낸 『과학과 현대 세계(Science and the Modern World)』에 쓰인 글이다. 1934년 무렵 맥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의 존재론적 중요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이 완전히 계발된 철학으로 무르익었고, 이 철학이 오늘날 우리가 생명을 시간적 패턴으로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다.

160년에 걸친 다윈주의 세계관의 군림이 모든 면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확장된 서사로 수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지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윈의 모든 통찰력과 그의 이론을 수정하고 부가하고 증폭시키며 등장한 다양한 주장들이 다 폐기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부는 거짓으로 판명되고, 일부는 계속 통용되고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훨씬 더 복잡한 이해가 새로운 발견과 함께 표면화되며 생체전기 암호의 해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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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건대, 이 시대의 자본주의는 부드러운 권력 장치(agencement)이다. 수직적 착취나 수탈을 노골화하지 않고, 인권과 노동권을 배려하는 인간의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더 많은 존재의 필요와 욕망을 연루시키며 자가발전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를 계속 질문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세계 존재들의 삶과 상상력 자체를 제약하고 포획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일의 현장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와 포스트-포드주의의 테크놀로지가 결합한 공간을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을까. 이곳에서 노동자/자본가(사업자)/소비자 식의 구획된 정체성은 이전보다 쉽게 무화된다.

플랫폼 배달노동자가 법적으로는 자기사업자(사장님)이지만 실제로는 고된 작업현장의 노동자라는 이중구속적 상황은 사람들끼리의 연결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당사자 자신마저 분열시킨다.

오늘날 통치술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오지 않은 시간을 현재의 비관에 접합해 ‘현재의 것’으로 선취하고 전유하고자 한다. 자주 사용되는 ‘선제(先制, pre-emption)’와 같은 말도 그와 관련된다. 통치술의 의도는 분명하다. 아득한 목적지로서의 희망을 맹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미래를 암흑으로 선취하려는 힘의 속임수는 정확히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체계다. 압도적인 것, 바깥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일수록 맹목적 믿음에 의해 지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믿음 혹은 오인의 구조를 질문하지 않는 상상력이 오히려 질문되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행한 것을 묻는 대신에, 거꾸로 우리가 자본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왔고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질문해보면 어떨까

생태 담론은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세계와 환경이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와 안전을 보장해주어야"
풍부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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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시대 전체를 이끈 시간적 지향의 근본은 ‘효율성’이다. 즉 천연자원의 착취와 소비와 폐기를 최적화하고, 그렇게 해서 자연 자체가 고갈돼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점점 더 빨리 증진한다는 임무다. 우리 개인의 시간적 지향과 우리 사회의 시간적 박동이 효율성이라는 원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연계의 파멸로 이끌었다.

거버넌스의 본질과 우리가 스스로를 사회적 유기체로 보는 방식에 대해 신선한 사고가 부상하고 있다. 회복력 시대에 거버넌스는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에서 지역 생태계에 대한 책임으로 전환된다. 생태 지역 거버넌스는 대륙권과 수권과 대기권을 포함하는 19킬로미터의 지구 생물권, 즉 생명이 펼쳐지는 지구의 권역에 적응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지는 지역 공동체와 함께 훨씬 더 확산될 것이다.

효율성이 일시적 가치라면 회복력은 특정한 조건이다. 효율성을 높이면 종종 회복력이 약화되는 것이 사실인데, 이를 해소할 수단이 되는 시간적 가치는 효율성이 아니라 적응성이다.

효율성의 핵심은 마찰, 즉 경제활동의 속도와 최적화를 늦출 수 있는 중복과 반복을 제거하는 데 있다. 하지만 회복력의 핵심은 적어도 본질적으로는 중복성과 다양성이다.

효율성이 그렇게 현대성의 시간적 동력이 되었다. 효율성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의 이용을 재정립했다. 그 이용에는 효율성이 시간을 절약하고, 축적하고, 구매하고, 연장하며 이렇게 연장된 시간을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에까지 임대한다는 전제가 함축적으로 담겼다.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면서 인류는 지구의 거대한 권역은 물론이고 화학과 물리학, 생물학을 구성하는 지구의 여타 작용까지 인클로저의 대상으로 삼고 부분적으로 사유화하고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종은 그렇게 지구에 존재한 그 짧은 기간에 유례없는 효율성이 주도하는 쾌락주의적 열정으로 모든 것을 사로잡고 약탈하고 소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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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생명과 안전을 돌보는 일을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지점에 와 있다. 거시적인 시야로 참사 이후 떠오른 과제 및 질문을 차분히 추리고 벼려보는 동시에 이웃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에 공명하여 서로의 마음을 돌보는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실상 연속적인 현상이라 말할 근거도 여기서 재차 확인된다. 둘 다 ‘전체’의 쇠락을 불가피하다고 보되 다만 그것을 향수 어린 비애감으로 돌아보느냐 아니면 긴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경축하느냐 사이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총체성 개념이 결국은 자본주의를 빈틈없이 완결된 전체로 물신화하지 않느냐는 우려에 관해서는, "맑스에게 자본주의의 ‘총체성’은 위기를 불가결한 계기로서 포함하고 (…) 여기에 깔린 전제는 전체란 결코 진짜 전체가 아니라는 것, 전체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라 강조한 지젝의 설명이 적실하다.

이행은 예시와 다르게 지금-여기에서 출발하여 심연 같은 간극을 한걸음씩 채워야 하고, 이 과정이 참된 이행이기 위해서는 또한 ‘전체’를 시야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다가갈 ‘도래하기 어려운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만큼이나 다양하게 제출되어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소설에 이르러 돌봄활동 속 젠더 역학이 뚜렷이 폭로되었다. 동시에 돌봄이 여성이나 주변인의 일로 간주된 채 급격히 시장화하고 공공 시스템이 부재하는 오늘날의 상황도 조밀하게 드러났다.인물, 계층, 세대 간 갈등이나 시장 안의 수요자와 제공자 사이의 갈등이 전경화하는 가운데, 돌봄을 둘러싼 ‘가부장×자본’의 문제가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음도 환기시켰다. 그런데 이런 폭로는 돌봄이 시장의 교환체계 속에 고착해 있다는 착시를 만들거나 고된 노동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돌봄활동의 특수성과 정동을 망각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돌봄 혹은 소외된 노동은 시민권을 얻는 동시에 여전히 폄훼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갇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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