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문화사(외)
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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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청의 난(妙淸-亂, 1135년 1월 19일(음력 1월 4일) ~ 1136년)은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 등이 금국정벌론과 서경천도론이 개경 귀족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서경(西京)[1]에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 대위국(大爲國)을 선언하고 일으킨 반란이다. 대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이념 차원의 반란은 김부식이 지휘하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고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년간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 ~ 1936) 는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했다. 묘청의 난을 가리키는 요즘 이름으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있다. (출처 : 위키백과)


[사진] 묘청의 난 : 서경(西京)과 개경(開京)의 대립 (출처 : KBS) 


 민족의 성쇠(盛衰)는 항상 그 사상(思想)의 추향(趨向 : 추세)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으며, 사상의 추향이 혹 좌(左) 혹 우(右)로 되는 것은 언제나 어떤(某種) 사건(事件)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 근세(近世)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노예가 된 것은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가?(p444)... 나는 한 마디로 대답하기를, 고려 인종(仁宗) 13년 서경(西京) 전쟁, 즉 묘청(妙淸)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p445)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에서 저자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을 묘청의 난으로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묘청의 난을 화랑파의 사상을 이어받은 불교(佛敎)와 유교(儒敎)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며, 묘청의 난 이후 유교가 우리 사회의 주류(主流)가 되면서 사대주의의 병폐가 심해졌음을 본문 전반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기타 고려조 역대 외교에서 매번 강력하게 자존(自尊)의 의견을 발표한 자들은 거의 화랑파나 혹은 간접으로 화랑파의 사상을 받은 자들이었고, 비사(卑辭)와 후폐(厚弊)의 사대론(事大論)을 고집한 자들은 대개 유교도들이었다. 불교는 그 자체의 성질상 정치문제에 관하여 화랑파와 같이 격렬하게 계통적(系統的)인 주장을 갖지는 않았으나, 대개는 화랑파와 가까웠다.(p452)


 불교는 원래 세상을 벗어난 교(敎)일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 수입되더라도 항상 그 나라의 풍속 습관과 잘 타협하고 다른 교(敎)를 심하게 배척하지 않지만, 유교는 그 의관(衣冠), 예악(禮樂), 윤리(倫理), 명분(名分) 등을 그 교(敎)의 중심으로 삼기 때문에 전도(傳道)되는 곳에는 반드시 표면까지의 동화(同化)를 요구하면서 타교(他敎)를 매우 심하게 배척한다. 그 때문에 이때의 유교 장려에 대하여 화랑파와 불교파 사람들이 불평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인민들도 그것을 못마땅해 하였다.(p449)


 <조선사연구초>를 통해 저자는 묘청의 난에서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유가 사상의 승리로 우리 사회에 사대주의가 팽배해졌음을 통탄하고 있지만, 정작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의 최대 사건 묘청의 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묘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서술한 바를 간략히 총괄(總括)하여 말하면, 조선의 역사는 원래 화랑파(郎家)의 독립사상(獨立思想)과 유가(儒家)의 사대주의(事大主義)로 나뉘어 왔는데, 갑자기 묘청이 불교도로서 화랑가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다가 그 거동이 너무나 미치광이처럼 제멋대로여서 결국 패망함으로써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었다.(p475) 


 묘청의 거동이 미치광이처럼 제멋대로였다는 말의 근거는 무엇일까. 단재의 비판은 당시 묘청을 중심으로 한 화랑파가 주도적인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묘청의 행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예종본기(睿宗本記) 나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당시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으로 기운 자가 거의 전 국민의 반이 넘었으며, 정치세력의 중심인 군주 인종(仁宗)도 십중팔구 묘청을 신임하였다. 비록 김부식, 문공유(文公裕) 등등 몇몇 사람의 반대자가 외적의 형세를 과장하면서 그 전통적 사대주의의 보루를 고수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공격여 깨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제 이같이 성숙한 시기를 잘 이용하지 못하고, 김부식의 상소문 하나로 인종(仁宗)이 평양천도 계획을 중지한 것에 문득 화를 내고는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 하늘이 파견한 충의 군대)'라 자칭하고, 국호(國號)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고, 평양을 상경(上京)으로 정하고는 인종에게 상경의 새 궁궐로 옮겨와서 그 국호, 그 연호를 받기를 요구하니 그 시대의 신하의 예(禮)로 볼 때 그 얼마나 제멋대로 날뛰고 설친 행동이었던가.(p462)


 '묘청의 난' 이후의 상황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즉, 고려 중엽 이후 유교와 사대주의가 세력을 키우다가, 결국 조선(朝鮮)의 건국을 계기로 사대주의는 우리 사회의 주요 정치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이 말살되었다는 것이다.


 화랑가의 윤언이(尹彦頤) 등은 유가(儒家)의 압박 아래서 겨우 그 잔명(殘命)을 구차하게 보존하게 되고, 그 뒤에 몽고의 난(亂)을 지나면서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조(李朝)는 창업(創業) 자체가 곧 이 사대주의로 성취되었으므로 화랑파는 완전히 멸망하여 버렸다. 정치가 이렇게 되니 종교나 학술이나 기타 모든 방면에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노예가 되었다.(p475)


 '묘청의 난'(1135)으로부터 약 90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 저자가 사대주의의 온상으로 지적했던 유교는 이제는 불교와 더불어 우리전통사상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되었고, 고려 당시 유교의 위치를 이제는 기독교(基督敎)가 대신하고 있다. 사대(事大)의 대상 역시 중국(宋)에서 미국(America)로 바뀌었으며, 우리나라는 분단(分斷)되었고, 주변의 상황은 고려 당대보다 더 복잡해졌다. 이러한 외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묘청의 난 당시와 같이 '자주(自主)'와 '사대'간의 내부 대립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주'로 대표되는 화랑파의 세력이 사대로 대표되는 유가파보다 더 힘을 얻었던 상황 역시 현재와 비교하게 된다.


[그림] 2018년 2월 기준 정당 지지도 (출처 : 오마이뉴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또한 촛불 혁명을 통해 시민의식이 깨어나 전례없이 자주적인 사상이 힘을 얻고 있는 지금 섣부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치환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역사학자인 단재가 <조선사 연구초 :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을 통해 답(答)을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리뷰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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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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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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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4: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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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4: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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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6: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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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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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9 14: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하의 몹쓸 인간인 사대주의자 김부식 일파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의 공고함에 다시 한 번
전율하게 됩니다.

유교는 원래 민주공화주의와는 공존할 수 없는
그런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18-03-29 14:56   좋아요 0 | URL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조선상고사>전반을 통해서 유교의 사대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중화사상, 사대주의가 유교의 폐단이라고 해석하신 부분에 대해서 공감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유교의 긍정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 또한 듭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같은 분들은 우리 나라에 여러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기본 전제가 유교 문화권이라는 해석을 하시는 것을 보면, 긍정적인 요소 또한 유교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큰 나라 중심의 사대주의는 경계해야겠지요... 레삭메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삼국사기>는 고대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사료임에도 논란이 많은 자료인 듯 합니다. 아무래도 저자의 모화사상이 반영된 저서라 그렇겠지요. 그런 면에서 얼마전 국정교과서 문제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역사를 통해 일종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작업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