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의 황금시대 - 인간 정신의 위대한 경지를 보여준 禪의 역사와 그 정신
존 C. H. 우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13년 4월
평점 :
자신이 믿는 종교(宗敎)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구도자(求道者)들이 자신의 삶을 바쳐 진리나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이보다 한층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교리(敎理) 또는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노력 외에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信仰) 문제가 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가톨릭)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불교(佛敎) 특히, 선불교(禪佛敎)가 위와 같은 이유로 많이 어렵게 느껴진다. 불교와 기독교의 다른 세계관(世界觀)과 개인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함이 불교 이해 어려움의 원인으로 다가온다. 그런 면에서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공사를 역임하기도 한 존 C.H우(John C.H.Wu)가 저술한 <선 禪의 황금시대>는 나와 같이 선(禪)에 대해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을 선의 세계로 편안하게 안내해주는 친절한 책이라 여겨진다.
육조 六祖 혜능 慧能(638 ~ 713)부터 법안 法眼 문익 文益(885 ~ 958)까지 선(禪)의 불꽃을 이은 이들과 이들에 얽힌 짧은 예화를 저자 자신과 불교 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 그리고 기독교 영성가인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 ~ 1968)의 해설과 함께 소개된다. 무엇보다 <선의 황금시대>의 큰 장점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도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 여겨지는데, 이는 토머스 머튼이 책을 소개하며 쓴 <기독교인이 바라보는 선> 속에 잘 드러난다.
이 간단하고 보잘 것 없는 글이 기독교의 경험과 선의 경험을 '비교하려고'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분명히 언젠가는 둘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종교적 희망을 피력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글을 읽고 기독교인이나 서구인들이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펼칠 수 있다면, 잠시라도 판단을 내리려는 생각을 멈추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선이란 난해하고 괴상한 것이라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p393)
나 역시 기독교의 경험을 통해 선의 경험을 미루어 짐작해 보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구절 속에서 성경의 구절을 느끼게 되었는데, 여기에 몇몇 구절을 옮겨본다.
1. 대승의 그릇과 악마의 유혹
대승의 그릇
황벽 黃檗 희운 希運( ? ~ 850)은 어린 나이에 중이 되었다. 한번은 천태산 天台山을 여행하다가 기이한 중과 마주쳤다. 그 중은 마치 황벽의 오랜 친구라도 되는 양 말을 트고 농담을 건넸다.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다가 불어난 개천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은 황벽에게 함께 건너가자고 했다. 황벽은 건너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노형! 건너가고 싶다면 혼자서 가 보시오." 중은 딱딱한 땅 위를 걷는 것처럼 물 위를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리고 황벽에게 말했다. "따라오라니까, 따라와!" 황벽이 말했다. "빌어먹을, 이 혼자서 다 해먹는 놈아! 미리 알았더라면 그 놈의 정강이를 분질러 버렸을 텐데." 그 중은 이런 반응에 감동을 받은 듯 이렇게 말했다. "자네야말로 진정한 대승의 그릇이네! 나는 자네 상대가 아니야."(p134)
악마의 유혹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 : 9 ~ 13)
2. 손님의 대접
손님의 대접
시중을 드는 중이 스승(조주)에게 물었다. "세자가 왔을 때는 방석에서 내려오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장군에 불과한데도 당장에 내려와 그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예법이 어디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너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겠지. 제일 가는 손님이 오면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맞이한다. 둘째 가는 손님이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제일 하찮은 손님이 오면 문 앞까지 나가서 맞이할 게야."(p156)
첫째가 꼴찌가 되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 30)
저자는 서문에서 머튼 신부의 소개글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으며, 머튼 신부는 소개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 외에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음도 밝히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모두 동등하게 충분히 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말로 이루어진 교의와 언어적 편견에서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이고 순수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p376)... 주관적인 신비(혹은 형이상학적) 체험과 객관적 교리는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기독교와 선에서는 이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기독교에서는 객관적인 교리가 시대적으로 보거나 높은 위치로 보거나 늘 우선했다. 선에서는 체험이 항상 우월했는데, 이는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중요성에서도 그렇다.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계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에, 어떤 계시에 대한 관념이든 모두 폐기하고 성스러운 전통에 대해서는 대단히 독립적인 견해를 취하는 선은, 존재에 대한 자연적인 존재론적 입장을 관철하는 길을 찾기 때문이다.(p377)
기독교 교리가 top-down 방식이라면, 불교는 bottom-up 방식으로 수행을 한다고 느껴지는데,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예화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가르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러 종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봄꽃 (출처 : 한국관광공사)
봄이다. 얼어던 땅이 풀리면서 싹이 올라오고 있고, 머지않아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서로 다른 색깔의 많은 꽃들이 있지만, 봄이 아름다운 것은 어느 하나의 꽃때문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생명력 때문이리라. <선 禪의 황금시대>를 통해 선불교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알지 못했던 다른 아름다운 깨달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