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튀프론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20
플라톤 지음, 강성훈 옮김 / 이제이북스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에우튀프론 Euthyphron >은 플라톤(Platon , BC 424 ~ BC 348)의 초기 대화편 중 하나로 경건(敬虔)을 주제로 한다. 작품 속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와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를 고소한 에우튀프론 사이의 대화를 통해 '경건'의 정의를 완성시켜 나가지만, 완성된 형태에 이르지 못하고  아포리아(aporia) 대화로 마무리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경건에 대한 에우튀프론의 다섯 정의와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대화의 시작


 에우튀프론은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를 고소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을 불경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에우튀프론은 자신이 경건한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경건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그분들 주장으로는 아버지가 그를 죽인 것도 아니고, 설사 죽인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죽은 사람이 살인자인 마당에 그런 사람을 위해서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소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고요. 소크라테스님, 그건 이분들이 경건한 것과 불경한 것에 대한 신적인 입장이 어떠한지를 잘 몰라서 그래요.(4 : e)'


2. 경건에 대한 정의


가.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첫 번째 정의와 소크라테스의 논박


 에우튀프론은 자신의 행동이 바로 경건한 행동이라고 말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개별 행동이 아닌 경건의 이데아(idea, eidos)가 무엇인지를 재차 요구한다.


 '저는 경건한 것이 바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살인이나 신성한 것들을 훔치는 일이나 다른 어떤 그런 잘못을 벌함으로써 부정의한 행동을 하는 자를, 그가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고소하는 것이라고요. 고소하지 않는 것은 불경한 일이고요.(5 : e)'


 '그럼 내가 많은 경건한 것들 중 한두 개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경건한 것들이 그것에 의해서 경건한 것이 되는 그 형상(eidos, idea) 자체를 요구했다는 것을 기억합니까?... 그러니 이 형상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 주시죠.(6 : d ~e)'


나.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두 번째 정의와 소크라테스의 논박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에우튀프론은 신들에게 사랑스러운 것이 경건한 것이라고 재정의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여러 신들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올바른 정의가 아니라고 논박한다.


[그림] 파리스의 심판 : 세 여신들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美)가? (출처 : http://blog.daum.net/spdjcj/1357)


 '그럼, 신들에게 사랑스러운 것은 경건한 것이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불경한 것입니다.(6 : e)'


 '그럼 고귀한 에우튀프론, 당신 말에 따르면, 신들 중에서도 이 신은 이것을 저 신은 저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또 서로 다른 것들은 아름답고 추하고 좋고 나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동일한 것들을 어떤 신들은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신들은 부정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당신 주장입니다.... 당신이 제우스 신에게는 사랑스럽지만 크로노스 신과 우라노스 신에게는 미움을 사고 또 헤파이스토스 신에게는 사랑스럽지만 헤라 여신에게는 미움을 사는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8 : a ~ b)'


다.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세 번째 정의와 소크라테스의 논박


 이에 대해 에우튀프론은 모든 신들이 공통으로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지만, 이 역시 논박을 당하게 된다. 즉,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한 것인가, 아니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론으로 이 정의 역시 무력하게 된다.(에우튀프론 딜레마 Euthyphron dilemma)


 '아, 그럼 저는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경건한 것이고, 반대로 모든 신이 미워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라고 주장하겠습니다.( 9 : e)'


'어떤 것이 변하거나 뭔가를 겪는다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하는 게 아니라,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또, "겪는 것"이기 때문에 겪는 게 아니라, 겪기 때문에 "겪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이것도 앞의 것들과 마찬가지겠지요? "사랑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지요?( 10 : c)'


 결국 에우튀프론은 정의를 내리는 것에 실패하고, 이제는 소크라테스의 도움을 받아 경건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시작한다. 정의를 내리기 전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것이 정의로운 것의 부분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정의로운 것이 있는 곳에 경건한 것도 있습니까? 아니면 경건한 것이 정의로운 것의 부분이어서, 경건한 것이 있는 곳에는 정의로운 것도 있지만 정의로운 것이 있는 곳 모두에 경건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경건한 것이 정의로운 것의 부분이라면, 우리는 경건한 것이 정의로운 것의 어떠한 부분인지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12 : d)'


라.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네 번째 정의와 소크라테스의 논박


 '경건'을 '정의'의 부분집합으로 놓았을 때, 에우튀프론은 신들에 대한 '보살핌'과 관련한 부분이 경건이라고 정의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보살핌'이라는 언어적 정의를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보살핌'은 '섬기기 기술'로 서로 합의한다. 


 '정의로운 것 중에서 신들에 대한 보살핌과 관련된 부분이 신을 공경하는 것이자 경건한 것이고, 인간들에 대한 보살핌과 관련된 부분은 정의로운 것의 나머지 부분입니다.(13 : a)'


 '당신이 "보살핌"이라는 말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신들에 대한 보살핌"을 이야기할 때 다른 것들에 대한 보살핌과 똑같은 의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경건함은 신들에 대한 어떤 보살핌입니까? 노예들이 주인들을 보살피는 바로 그런 보살핌입니다, 소크라테스님. 알겠습니다. 그건 신들에 대한 일종의 섬기기 기술일 것 같군요.(12 : d ~ 13 : d)'


마.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다섯 번째 정의와 소크라테스의 논박


 결국, 다섯번 째 정의에서 에우튀프론과 소크라테스는 경건함이란 '신들에게 흡족한 것들을 올바르게 요청하는 일종의 상거래 기술'임을 도출하지만, 이후 논의를 진행하기 전 에우튀프론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면서 더이상 논의는 진행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기도하고 제사 지내면서 신들에게 흡족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행할 줄 안다면 그가 그러는 것들은 경건한 것들이고, 그러한 것들이 사적으로 가정들과 공적으로 나라의 일들을 구원합니다. 신들에게 흡족한 것들에 반대되는 것들은 신에 대해 불손한 것들로, 이것들은 모든 것을 뒤엎고 파괴하지요.(14 :b)'


 '올바로 요청하기란 그들에게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올바로 주기란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서 필요한 것들을 이번에는 우리가 그들에게 선물로 갚아 주는 것이겠군요?... 에우튀프론, 그럼 경건함은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서의 일종의 상거래 기술이겠군요.(14 : e)'


  <에우튀프론>은 이처럼 '경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마무리된다. 그렇지만, 이 대화편을 통해 그리스 다신(多神)에 대한 플라톤의 부정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절대적인 이데아 세계를 설명하는데, 여러 다른 신의 존재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다. 이러한 결과를 통해 그리스 전통신관과 다른 데미우르고스(demiurge)로 표현되는 플라톤의 신관(神觀)이 나오게 된 배경도 다소 나마 짐작하게 된다. 또, 논의를 통해 집합 명제와 관련된 내용과 언어정의의 중요성도 느낄 수 있기에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정의(定意)를 하기 위한 기본수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에우튀프론>은 짧은 초기 대화편이지만, 그 안에서 플라톤 철학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이와는 별도로 에우튀프론이 살인죄로 아버지를 고소하는 장면에서  논어(論語) 子路篇(자로편) 18장을 연상하게 된다. 섭공과 공자(孔子, BC 551 ~ BC479) 사이에 '직(直)' 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다음의 대화를 보면서 동서양(東西洋) 모두에서 부모를 고발하는 행동은 비록 그 부모가 잘못이 있더라도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葉公語孔子曰  吾黨 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섭공어공자왈  오당  유직궁자  기부양양   이자증지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공자왈  오당지직자 이어시  부위자은  자위부은  직재기중의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고을에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고을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아들을)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를) 숨겨줍니다. 그 가운데 정직함이 있습니다. (출처: http://ingee.tistory.com/361 [있는 그대로])


 또한, 이처럼 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 덕목(德目)이라면, 이를 정의해서 형상(이데아)를 규명하고자 하는 플라톤(또는 소크라테스)의 시도는 무모한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보면서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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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0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0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0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20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초에 서양은 절대개념(신)이 없음 뭔 말도 성립이 안 돼요ㅎ;;; 그러믄서 뭔 잘난 척은 그리도 많이 하는지;
공자의 저 말은 상대성 속의 유동성을 말하고 있죠. 상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겨울호랑이 2018-01-20 20:16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서양철학은 신(神)의 존재와 함께 흘러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양에서는 ‘절대진리=idea=神‘을 찾으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것에 반해, 동양에서는 ‘상황‘에 보다 집중하고 있는 것 같네요. <에우튀프론>에서 다신론에서 단신론으로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고, 이것이 다음에 올 ‘절대진리‘를 예고하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