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대로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이 발생한 1948년 벌교 지역을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뛰어난 몰입감을 주는 소설 속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몇몇 부분을 옮겨본다.
1. 선(善)과 악(惡)
'전혀 다른 두 모습의 문서방. 그 어느 쪽이 진짜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표변할 수 있는가. 그 어느 쪽이 진실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이중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 인간은 복합적 사고와 다양한 감정의 줄기를 소유한 동물이다. 문서방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은 그런 인간의 속성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습은 다 문 서방의 참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면서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문 서방은 아버지에게는 선한 인간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한 인간으로 반응한 것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지주였다면 문 서방은 여지없이 악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 서방의 악은 악이 아니라 선인 것이었다.'(p68)
<태백산맥>에서 묘사된 인간 본성(本性)의 문제는 여러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이러한 오래된 철학적 질문에 대해 주인공 범우는 인간 내부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답하고 있다. 이러한 김범우의 생각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주(註)를 단 왕필(王弼, 226 ~ 249)의 의견과 많은 공통점을 보이는 것 같다.
'왕필이 선(善)과 불선(不善)을 '시(是)'와 '비(非)'에 상응시킨 것은 바로 잘 되는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고,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핵심적인 것은 즐거움과 성남이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옳음과 그름이 한곳에서 나온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불이(不二)"의 사고입니다. 일반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양자가 심층적으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통념적으로 대립시키는 것들을 같은 뿌리로 소급시키는 것은 곧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선(善)과 악(惡)의 구별의 피안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para-doxa"의 사유이기도 합니다.'<개념-뿌리들>(p558)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 상황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범우의 말속에서 전통적인 동양사상을 확인하게 된다. 동양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유입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수용하면서 생긴 사상대립. 한국전쟁과 이념 대립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상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사상이 극단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2. 남로당과 칼 마르크스
<태백산맥>1에서는 남로당(南勞黨)과 군정(軍政)간의 대립이 잘 묘사되고 있다. 남로당은 어려운 경제 현실로부터 탈피하고자하는 민중의 열망을 정치투쟁으로 확산시키려했던 반면 군정은 이를 좌절시키려 한 것이다.
'남로당은 어쩌면 남쪽 전역에 걸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열렬한 지지였지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미군정의 경제정책에 대한 생존보호와 불만표현이 먼저였다. 그러니까 남로당은 군정과 정치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고, 민중들은 군정과 경제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로당은 민중들의 경제투쟁을 조직화하여 정치투쟁으로 확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교활할 만큼 영리한 군정이 그것을 좌시할 리 없었다. 미리 준비해 둔 무력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박살을 내고는 한 것이다.'(p238)
이러한 남로당의 투쟁 노선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기반한 것임을 우리는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1872 ~ 1970의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 ~1883)의 변증법은 법칙의 불가피성을 제외하면 앞서 말한 헤겔 변증법의 특성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추진력이다. 그러나 물질은 인간적 요소가 완전히 말살된 원자론자들의 물질이 아니라 우리가 고찰해온 독특한 의미를 갖는 물질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에게 추진력은 실제로 인간이 물질과 맺는 관계이며, 그러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생산 양식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실질상 경제학이 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 역사의 어느 시기이든 정치, 종교, 철학, 예술은 속한 시대의 생산 방법과 비중은 조금 낮지만 분배 방법의 산물이다.' <러셀 서양철학사> (p990)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하부구조가 보다 형이상학적인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던 일제(日帝) 하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등 경제적 평등을 약속한 남로당의 약속은 가난했던 많은 민중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로당의 투쟁이 현실의 삶과 다소 거리가 있는 정치 투쟁으로 이어졌을 때도 먹고사는데만 관심있는 민중들의 지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혁명이론으로 현실적 적용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 문화와 제국주의
<태백산맥>속에서는 제국주의(帝國主義)에 대한 비판이 한때 사회주의에 심취했었던 손승호라는 인물을 통해 가해진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1616)가 과연 인도(印度)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가? 라는 물음에 대한 손승호의 비판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지는 몰라도 그런 비유법을 쓴 영국인들은 한심한 종자들이야. 그 과장의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할 게 없지만,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 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가 있느냔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4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연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명들의 존엄성보다 셰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p240)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사상(思想)이라고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중요성은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제국주의 종주국들에게는. 이에 대한 내용을 에드워드 W. 사이드(Edward W. Said, 1935 ~ 2003)의 작품 <문화와 제국주의 Culture and Imperialism>을 통해 살펴보자.
'만일 중요한 종주국 문화의 몇 가지 -가령 영국, 프랑스, 미국의 문화-를 제국을 추구하는(그리고 제국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지리적 배경 속에서 연구한다면, 명확한 문화 지형도가 선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가령 영국 문화에서 스펜서, 셰익스피어, 디포, 오스틴이 집요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먼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권력의 거점을 종주국인 영국 또는 유럽에 설정하고, 이어 작품의 구상, 동기, 전개에 의해 그러한 권력 거점을 원격의 "주변"세계,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세계(아일랜드, 베네치아, 아프리카, 자메이카)에 접속하는 것이다.'<문화와 제국주의>(p132)
셰익스피어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다면, 셰익스피어가 존재하는 한 지금 당장 인도를 잃는다하더라도 회복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4.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그외에도 <태백산맥> 속에는 민족주의의 입장과 공산주의의 입장이 각각 김범우와 염상진의 말과 생각을 통해 나타나 우리는 당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체감할 수 있다.
'어떤 주의를 따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p85)
'힘은 조직화될수록 강해지고, 그 힘은 공격을 감행할 때 더 강해지고,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 힘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건 힘의 법칙이고, 힘의 미학이었다. 북조선의 일사불란하게 조직화된 힘은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면 남조선의 오합지졸인 비조직화된 힘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한반도 전역에 공산혁명의 깃발을 나부끼게 할 것임을 굳게 믿어왔다. 그런데, 하늘처럼 믿었던 북조선의 조직화된 힘은 뻗쳐오지 않았고, 오합지졸인 줄만 알았던 남조선의 힘에 쫓기게 된 것이다. 왜 북조선은 힘을 쓰지 않은 것인가. 남조선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었는가. 그럼 북조선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일까.'(p125)
한국 현대사의 이념대립을 다룬 <태백산맥>은 이처럼 인물과 사건을 통해 선과 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민족주의, 제국주의 등 대립적 요소가 잘 제시된다. <태백산맥>이 현대사를 다룬 뛰어난 문학작품인 이유는 작품이 주는 몰입감과 더불어 당대의 이념들간의 대립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