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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8월
평점 :
이 모든 사상의 기반은 다음과 같다. 즉, 귀족은 기사도의 이상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을 지탱하고 정화할 의무가 있다. 귀족의 진실한 생활과 귀족의 진실한 미덕은 사악한 시대에 대한 치유책이다. 교회와 왕국의 안녕과 평온, 정의의 힘은 귀족에게 달려 있다... 하느님의 의지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것이 주어졌다. 그것은 신성한 법과 인간의 법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세상은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 두 기둥은 기사단과 학자들이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139
선(善)과 악(惡), 성(聖)과 속(俗), 교회와 왕정, 성직자와 귀족, 천상의 법과 지상의 법에 의해 유지되는 중세(中世)라는 이분법(二分法)의 시대. 그 중에서도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은 14~15세기 부르고뉴 공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중세 문명의 시기를 조망한다.
몰아 감각은 커다른 위험을 가져온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비가들뿐만 아니라 인도의 신비주의자들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 위험의 구체적 내용은 이러하다. 완벽하게 신을 명상하고 관조하고 사랑하는 온전한 영혼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신에 몰입하면, 자신의 의지는 더 이상 없고, 남은 것은 오로지 신의 의지뿐이다. 그리하여 몰아 상태에서 육욕에 사로잡히더라도 그 육욕은 죄가 되지 않는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375
저자는 <중세의 가을>에서 예술 작품을 통해 그들의 내면 세계를 들춰낸다.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던 것처럼, 감성은 이성에 의해 제한되었다. 지나친 정념과 표현은 죄악으로 간주되는 시기였기에 인간의 감성(感性)은 신앙의 엑스터시를 표현하는 경우에 한해 허용되었고 이러한 제한과 억눌림은 하위징아가 중세를 모순과 갈등의 시기로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가 된다.
삶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태도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있다면, 중세와 르네상스의 간극보다는 르네상스와 근대의 간극이 더 깊고 크다고 보아야 한다. 대체로 보아 예술과 인생이 서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하나의 방향 전환이 발생한다. 그 지점에서, 예술은 더 이상 인생의 즐거움을 이루는 고상한 것으로서 인생의 한 가운데 있지 않고, 인생 바깥에 초연히 위치하여 멀리서 감상하는 어떤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술을 교육과 휴식의 순간에만 바라보며 높이 숭앙하는 어떤 것으로 취급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과 세상을 구분하는 저 오래된 2원론이, 예술과 인생의 구분이라는 또 다른 형식으로 등장했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95
그렇지만, 하위징아에게 중세는 모순과 갈등의 시기로 그치지 않는다. 억눌림과 제약이 심할수록 마치 페스트를 피해 교외로 나가 젊은 남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두운 현실을 피하듯, 중세의 어두움에는 빛의 씨앗도 함께 있음을 <중세의 가을>은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중세의 가을>의 전체 구조는 이분법이다. 그렇지만, 그 이분법마저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하나의 기둥이 되는데, 이렇게 본다면 동시에 탈(脫)이분법이기도 하다. 중세 뿐 아니라 책의 구조마저 모순적으로 보여지는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안전, 한적, 독립은 인생을 즐겁게 하는 좋은 것들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궁정 생활을 피하여 자연 속에서 노동과 절제의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려고 했다. 이것은 단순한 생활이라는 이상의 부정적 측면이다. 긍정적 측면은 단순함과 노동의 향유라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안락함이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220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중세의 가을>에서 하위징아는 백년전쟁 전후로 부흥했던 부르고뉴 공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시대를 규정한다. 지리적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강성했지만 불과 백여년 존속했던 부르고뉴공국.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사이에 있는 가을처럼, 부르고뉴의 지리와 역사 자체가 가을이 아닐까. 네덜란드어 판 서문은 이 시기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한다.
이 책은 14세기와 15세기라는 중세 후기를 조망하고 있지만 그 시대를 르네상스의 안내자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마지막 시기, 세 사상의 마지막 단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나무로 친다면 이 시대는 열매가 농익어서 완전히 만개하고, 또 땅에 막 떨어지려는 그런 시대이다. 과거의 주도적 형식들이 화려하게 개발되어 사상의 핵심을 제압하고, 또 예전의 타당했던 사상들을 경직시켜 고사시키던 그런 시대이다. 중세 후기를 하나의 독립된 시대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24, 네덜란드어 판 서문
이전 시대인 중세 전/중기와 이후 시대인 르네상스 시대와 구분되는 별도의 시기 중세 후기. 독자들은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의 변화의 싹을 중세 후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통해 발견한다. 그리고 부르고뉴라는 공간적 제약 안에서 또 다른 변화의 씨앗이 자리함을 짐작하게 된다. 만약 하위징아가 자신의 고국인 네덜란드를 무대로 중세의 역사를 썼다면, <중세의 가을>은 11월의 가을이 아닌 음력 8월의 한가위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았을까.
<중세의 가을>은 독립된 시대로서 중세 후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 후기를 특징짓는 것은 이전/이후 시대와 구분되는 이분법의 모순이지만, 동시에 <중세의 가을>이 주제로 한 시간적, 공간적 한계는 오히려 이분법 구조를 넘어서 탈(脫)이분법적으로 시대를 전망케 하는 매력을 가진 작품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사악한 세계였다. 증오와 폭력의 불길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악은 강력하다. 악은 그 검은 날개로 이미 어두워진 대지를 덮는다. 곧 세계의 종말이 오리라고 기대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교회는 계속 허덕거렸으며, 설교자들과 시인들은 말세를 경고하고 탄식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