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세계사 - 네안데르탈인에서 신자유주의까지
닐 포크너 지음, 이윤정 옮김 / 엑스오북스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하나의 역사적 국면은 역사의 '순환'과 역사의 '화살'이라는 양면성을 다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국면과 다른 국면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역사의 '순환'이 지배적일 때 변화는 양 量적이고 제한적이다. 반면 역사의 '화살'이 지배적일 때 변화는 질 質적이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역사는 세 가지 엔진에 의해 앞으로 나간다. 첫째는 지식, 기술, 생산성의 축적이다. 둘째는 잉여의 통제를 놓고 벌이는 지배계급 간의 경쟁과 투쟁이다. 셋째는 잉여의 크기와 배분을 놓고 벌이는 계급 간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192

닐 포크너(Neil Faulkner, 1958 ~ 2022)의 <좌파 세계사 A Marxist History of the World: From Neanderthals to Neoliberals>는 인류 탄생부터 최근까지 인류 역사를 생산성 향상과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사다. 신석기 시대 농경 사회의 시작과 함께 생겨난 불평등 구조는 불안정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불안정이 가져온 변화는 잉여가치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인류 역사는 이를 차지 하기 위한 쟁탈전이었다는 것이 저자가 바라보는 주된 관점이다.

'즉자적 卽自的 계급 class in itself'이란 사회관계와 경제적인 관점에서 계급이 처하게 되는 현실을 가리킨다. 반면 '대자적 對自的 계급 class for itself'은 계급의식을 갖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적극적인 저항을 해내가는 것을 가리킨다. 노동자는 현실에 무심하고, 파편화되고, 수동적인 채로 역사의 피해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반면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동료들과 단합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투쟁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역사의 주체가 된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67

저자 닐 포크너는 특히 중세에 뿌리를 두고 상업자본주의(1450 ~1800), 산업자본주의(1800 ~ 1875) , 제국자본주의(1875 ~ 1935), 국가자본주의(1935 ~ 1975), 신자유주의자본주의(1975 ~ ) 등 다른 이름으로 꾸준히 이어온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지면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변용(變容)에 대한 대응이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 혁명(革命)이라는 저자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도전(挑戰)과 혁명이라는 응전(應戰)'이라는 도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인류는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 탐욕으로 끝없는 학살의 수렁으로 빠질 뻔했다. 이를 막은 것이 바로 혁명이었다. 처음엔 러시아, 그 다음엔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로 혁명이 이어졌다. 패전한 동맹국에서만 혁명이 전염된 게 아니었다. 곧 영국, 프랑스, 이탈리에까지 퍼졌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496

저자는 본문에서 역사의 고비마다 실패한 혁명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68운동 이후 신자유주의가 큰 흐름으로 자리잡은 요즘 저자는 '즉자적 계급'이 아닌 '대자적 계급'에 의한 궁극적 변화를 소망한다.

1차 대전 후 인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실업, 파시즘 그리고 전쟁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 조직과 리더십은 실패로 끝났다. 그 실패의 대가는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고 나서까지 치러야 헸다. 두 번의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럽지역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붕괴되어 1917년 같은 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전쟁이 치러졌고 이후 나치가 최악의 폭력을 이끌었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598

<좌파 세계사>에서 저자 닐 포크너는 역사의 분기점마다 좌절된 혁명을 인간의 희망의 꺾여진 것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가 갖는 내재적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혁명을 번번히 좌절시켜왔다는 저자의 인식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의 역사관을 잘 보여준다. 분명 1990년대 냉전 종식 후 세계의 주된 흐름은 신고전학파주의 경제학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임이 분명하기에 자본주의가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다면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거나 해결되었을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항상 고도로 모순적이었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역동성은 우리의 능력을 놀랍도록 향상시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공급해준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때문에 세계의 부가 소수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인류 대중을 지속적인 박탈에 시달리게 한다. 18세기에 제국과 식민지의 모습이 정반대였다는 사실은 이런 모순을 확실히 입증해준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282

저자의 설명대로 자본주의의 모순성이 동일 대상을 '노동자-소비자'라는 다른 측면에서 양립할 수 없는 면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마르크스가 설명한 계급투쟁이 결국 투입된 노동의 산출 가치에 대한 배분 문제라면,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얻으려는 자본가의 탐욕이 '최소 노동으로 최대 임금'을 받으려는 노동자의 탐욕으로 대치된다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은 임금과 이윤을 합친 가치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임금은 생산과정에서 투입된 노동의 가치를 전부 반영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이 임금을 지급하고 사들이는 것은 일정 시간 동안, 특정한 수준의 기술로 얼마만큼 일할 수 있는가에 대한 능력이다. 자본가는 임금에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생산과정에서 얻기를 바란다. 이 가치의 차이가 바로 '잉여 가치' 즉 이윤이 된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60

문제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좌파의 세계사>를 읽으며 현대사회 문제에 대한 진정한 처방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제적 헤게모니 이관 문제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부정한 시대정신(Zeitgeist)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관념론을 비판하고, 유물론을 주장하지만 그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주창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Proletarier aller Lander, vereinigt euch!"는 구호에서 보여지는 단결된 노동자의 행동은 결국 또 하나의 '시대정신'의 발현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런지.

'관념적인 시대정신'대신 '유물론적인 시대정신'을 도입하기 전에, 궁극적으로 변화된 개인, 계급의 물리적 결합 이전 개인 윤리의 화학적 변화를 먼저 강조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정신사적인 혁명을 부정한다면, 결국 다수의 눈에 사회주의 혁명은 'Post Capitalism'을 표방한 '제2의 자본주의'에 불과해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관념적이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사고 변화에 맞춰져 있었다. 특히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전개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절대정신은, 절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하는 현실과 절대정신 사이의 모순에 의해 세계를 변화시키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같은 관념론적인 변증법을 유물론적인 변증법으로 바꿨다. 주요한 모순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실재하는 사회적 세력 간의 충돌(모순)이다. 사고의 역할은 이런 세력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실천적 개입이 더 나은 방향을 향하고, 더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_ 닐 포크너, <좌파 세계사>, p34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3-06-06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ㅋ
전 누구보다도 마르크스 이론 대부분에 공감하지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구축한다는 말엔 아주 조금만 동의합니다. 오히려 상부구조(시대정신, 관념론)가 하부구조(유물론)을 구축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3-06-06 21: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대의명분이 실은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하고, 그 이면에 있는 실리가 실제적인 동인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통찰은 분명 뛰어난 것이지만,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상부구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여겨집니다. 마르크스 사상 자체가 이미 상부구조의 구성물임을 생각해본다면 공산주의 사상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비판하는 다른 형태의 종교‘로 다른 의미에서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님, 평안한 밤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