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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철학이 아닌 역사로 밝힌 18세기 계몽사상 ㅣ 현대의 고전 11
프랑코 벤투리 지음, 김민철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평점 :
파리 철학자 집단의 사상과 나머지 유럽의 사상 사이에 존재하던 틈을 메운 것은 <백과전서>였다. 그것이 과학과 예술에 관한 사전이었다는 사실이 새로운 관념의 유포를 가능케 했다. 기술적 문화는 노동과 기계, 철학과 일상의 관계, 그리고 사상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디드로가 구상하던 개념들에 연결되어 있었다... 정치와 법은 디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반복적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한 관범위한 철학적/도덕적 문제의 일부로서 계속해서 논의되었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172
프랑코 벤투리(Franco Venturi, 1914 ~ 1994)는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Utopia and Reform in the Enlightenment>에서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계몽사상을 바라본다. 역사적으로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정체였던 공화정이 16세기 절대왕정 국가들의 도전으로 쇠퇴하면서 공화정은 유럽의 중심 정체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가기 시작한다. 절대왕정에 의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 근세 유럽 정치질서를 장악하던 시기. 저자 벤투리는 이 지점에서 주변부의 공화정 정신을 계몽사상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공화국은 절대주의 국가와 구조적으로 동일하지만 그 외부에 위치한 독립적인 정치체다. 공화국의 존재는 절대주의 국가 내부에 있는 정치 형태처럼 때때로 미심쩍으며 형식에 치중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외부 구조물을 살아남아 유럽 대륙에서 공화주의 전통을 유지했다. 군주정의 대안 모형을 보존한 것도, 군주정의 최종적 승리를 정치적/군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이념적인 차원에서 부정한 것도 바로 이 외부 구조물이었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43
고대 그리스가 군사적으로는 로마에게 굴복하여 제국의 변방으로 편입되었지만, 사상적/예술적으로는 로마의 근원이 되었듯, 사도 바오로(Paul, CE 5 ? ~ 64 ?)의 기독교가 그들을 박해하던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중세시대가 열렸듯, 벤투리는 절대주의 국가들에 의해 헤게모니를 상실한 도시국가들의 공화정신이 정신사적으로 절대왕정국가들에게 퍼져나가면서 계몽시대가 열렸다고 분석한다.
국가조직 형태로서의 공화정이 낡아 보이고 썩어가는 폐허 속에 누워 있을지라도 공화주의적 도덕은 분명 존속했다. 세상은 변했지만 공화주의적 우정, 공화주의적 의무감, 공화주의적 긍지는 살아남았다. 이들은 심지어 군주국의 심장부에서, 절대주의 세계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존재했을 것이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105
다만, 저자가 본문에서 소개되듯 계몽사상가들의 사상이 모두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디드로(Denis Diderot, 1713 ~ 1784), 볼테르(Voltaire, 1694 ~ 1778),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 등 서로 다른 계몽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있었고 그 목표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적 결집은 백과전서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계몽사상은 특수성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고대 도시들의 참사회, 원로원, 인민 사이의 균형은 몇 세기 동안 깨져 있는 상태였다. 고전적 민주정체는 사라졌다. 네덜란드와 베네치아 같은 근대 공화정/귀족적은 역사적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덕성은 여전히 최고의 정치적 이상이었다. 그러나 근대 공화국에 의해 제기된 역사적 문제는 오직 군주국 내에서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는 오직 귀족, 시민, 사법부, 주권자의 구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까다롭지만 유익한 타협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구성된 권력기구들은 중계자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그들이 삼권분립과 균형의 기초였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71
프랑코 벤투리의 <계몽사사의 유토피아와 개혁>은 역사 속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민혁명이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에 대한 내부적 반발 뿐 아니라 절대주의의 팽창과 쇠퇴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공화정에 있음을 밝힌다. 저자가 보여주는 18세기를 전후한 역사적 사건의 연속성과 필연성 속에서 독자들은 계몽사상의 기원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백과전서파는 식자들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소규모 엘리트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진보를 이끈 요소로서의 경제생활과 연결됐고, 그들이 개선하고 더욱 합리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행정/정부 기구와도 긴밀히 연결됐다(p30)... 그들은 전통적인 사회 지도층을 대신하고자 열망할만큼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에 충분히 가까우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력함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국민이 직면한 실질적 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갖지 못할 정도로 노동 인민과 괴뢰되어 있지도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이 문제들에 대한 기술적 해법을 구상하고, 일반적 혁명을 예측하지 못한 채 그것을 때때로 적용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31
자유라 함은 곧 교역의 자유였다. 평등은 재산과 세금에 관한 문제였다. 정의는 더 나은 자본/노동 투입을 의미앴다. 당연하게도 비교의 결과는 잉글랜드의 완전한 승리였다. _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 p175
프랑스인들에게도 몽테스키외부터 루소에 이르는 공화주의 사상의 뿌리들은 가까운 유럽적 경험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결코 신화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철학자, 지롱드파, 자코뱅파에 직접적으로 속하지지는 않았다. 그 사례들은 덜 지역적이고 덜 "개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신고전주의 모형만이 신화의 웅장함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 - P39
공화주의 전통의 관점에서 우리는 베네치아 과두정의 경직성보다는 잉글랜드 공화주의자, 이신론자, 자유사상가들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넓게 퍼져서 벌였던 혹독한 투쟁을 보아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해졌듯이, 공화주의의 유산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은 귀족적 요소가 아니라 자유지상주의적인 요소였다. - P101
루소가 비록 <사회계약론>에서 권력의 분립 및 균형을 일체 거부했지만, <산에서 쓴 편지>에서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최상의 정부는 그 안에서 모든 분파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정부"라는 것이었다. 루소의 권위는 고대 공화국들의 바로 그 부동성의 기제를 떠받치는 기능을 했다. 부동성의 기제는 그들로 하여금 가분, 집단, 특권, 계급 등의 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방해하고, 더 근대적인 정치투쟁에 돌입하는 것도 방해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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