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 6 - 혁명 : 술피키우스의 혁명부터 술라의 통치까지 몸젠의 로마사 6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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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동맹들의 상태는 감당할 만한 종속관계에서 매우 고통스러운 노예 상태로 전락했으며, 동시에 이들에게는 좀 더 나은 권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사라졌다. 이탈리아의 복속과 함께 로마시민권은 폐쇄되었으며 공동체 전체를 상대로 한 시민권의 참여는 완전히 폐지되었고, 개인들에게만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5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6>는 희랍제국 복속 후 사실상 지중해의 패자(覇者) 로마의 내부 분열을 다룬다. 삼니움 전쟁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시들은 동맹에 충실했고,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안정을 바탕으로 포에니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을 연달아 승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1)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연전연승할 때도 대다수 동맹시들은 등 돌리지 않았고(카푸아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덕분에 로마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자연히 이탈리아 동맹시들도 자신들이 승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 공동체의 상당수를 로마 시민체에 수용하였지만, 그들이 수용한 것은 명예 훼손의 딱지를 붙이는 방식이었는바, 자유민 옆에 해방 노예를 세우듯이 구시민 옆에 신시민을 세웠다. 파두스강과 알프스 사이의 공동체들에 부여된 라티움 시민권에 주민들은 만족하기보다 격앙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최악의 세력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이탈리아인들에게, 다시 제압된 반란세력의 공동체들 전체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이미 반란으로 무효가 된 과거의 조약들을 법적 문서로 재확인하지 않고, 다만 자비와 임의 취소의 방식으로 갱신하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47


 자신의 필요에 따라 거의 동등한 조건에서 동맹을 갱신했던 로마의 태도는 더 이상 문명 세계에서 상대할 적수가 없어지자 돌변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2등 시민으로의 강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점차 고조되는 로마 주변 지역의 긴장. 로마 내부에서는 술키피우스(Publius Sulpicius Rufus, BCE 121 ~ 88)가 새로 시민권을 얻는 이들의 권리 강화를 위한 혁명을 일으키고, 여기에 더해 소아시아에서는  미트리다테스 6세(Mithridates VI, BCE 135 ~ 63)의 반란까지 일어나며 로마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시기에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E 138 ~ 78)다.


  집정관 술라는 술키피우스 혁명 시도에 의해 야기된, 보수당파의 창과 방패로 등장한 사내였다... 어떤 민주주의자도 이 보수적 개혁가처럼 이렇게 독재적인 형식으로 사법을 행사한 적도 없고, 국헌의 토대를 이렇게 무분별하고 무모한 방식으로 흔들고 바꾼 적오 없었다. 하지만 형식이 아니라 실질을 보면 매우 상이한 결과들에 이른다. 혁명은 한 번도 최소한 로마에서는 상당수의 희생자를 요구하지 않고 끝난 적이 없었고, 희생자들은 어떻게든 사법의 형식으로 갚아야 할 빚을 마치 범죄인 양 갚아야 했다. 승리한 당파가 그락쿠스의 몰락이나 사투르니누스의 몰락 이후 집행한 것과 같은 재판 결과를 기억하는 사람은 에스퀼리누스 광장의 승리자가 오히려 공명정대하고 비교적 절제된 조치를 했다고 칭송하고픈 생각이 들 것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66 


 미트리다테스가 취한 혁명적인 조치들, 그러니까 노예 해방, 부채 탕감 등의 취소는 당연한 일이었다. 복고 조치를 단행하는 데 물론 여러 곳에서 무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의는 승자가 생각한 것보다 진전된 방식으로 행사되었다. 미트라타데스의 추종자들 가운데 이름 높은 이들과, 이탈리아인들의 학살을 이끈 주동자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납세 의무자들은 지난 5년의 십일조와 관세 총액을 평가하여 즉시 완납해야 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135


 '민주당-동맹시-마리우스-혁명'이 과두정 로마에서 하나의 흐름이었다면, 여기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귀족당파-로마-술라-반혁명'이었다. 마리우스(Gaius Marius, BCE 157 ~ 86)와 술라. 전장에서 뛰어난 지휘관들이었던 이들이 차례로 정권을 잡으면서 처형과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술라는 마리우스의 죽음 이후 임시적으로나마 원로원 중심의 체제로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그를 '반혁명의 기수'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귀족당파의 공포정치는 혁명당파의 공포정치와는 다른 성격을 나타냈다. 마리우스가 개인적 복수심을 적들의 피로 채운 것이라면, 술라는 폭력을 말하자면 냉정하게, 새로운 독재정치의 도입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고, 무심하게 살육을 행하거나 방치하였다. 하지만 공포정치는 그것을 보수파가 전혀 감정 없이 행했을 때 더 무서워 보였고, 양 진영의 광기와 만용이 균형을 이루면서 공동체의 구제는 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201


 그렇지만, 술라가 추구했던 원로원 중심의 체제는 이미 술라 자신이 일으켰던 쿠데타로 인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술라 자신은 귀족들의 편에 서서 복고정을 꿈꿨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귀족들 자신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있었고, 마리우스-킨나 편의 인재들이 술라의 편에 서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보자면,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뉴라이트 운동에 가담한 것에 비길 수 있을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E 106 ~ 48)다. 


 술라 체제는 예를 들어 그락쿠스 정치체제나 카이사르 정치체제처럼 정치적 천재성이 돋보이는 성과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정치체제에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사상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흔히 복고정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조치가 그러했다... 이 시대의 로마 과두정을 판단해보자면 오직 무자비하고 냉혹한 엄단이 전부였다. 로마 과두정이 관련된 다른 모든 것처럼 술라 체제는 그저 이런 엄단 조치의 완수였을 뿐이다. 악한의 천재성에 매료되어 그를 칭송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경건함을 침해하는 일이다. 술라 복고정치의 책임은 술라가 아니라, 지난 수백 년 당파적으로 정부를 지배한, 매년 점점 더 늙어가며 고약해진 쇠약과 고집 때문에 무너져간 로마 귀족당파 전체에게 물어야 한다. 모든 흉악한 것, 모든 극악무도한 것은 궁극적으로 로마 귀족당파에게 그 책임이 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246


 귀족당파 대부분은 귀족 망명자 신분으로 달려왔지만, 요구는 많고 전투의 의지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자신을 구하고자 하면서 단 한 번도 그들의 노예들을 무장시키는 일조차 하지 않던 귀족 주인들이라는 혹독한 소리를 술라에게서 들어야 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파의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들이 넘어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고귀한 루키우스 필립푸스가 넘어왓는데, 그는 무능하기로 이름난 사람들과 어울린 유일한 집정관 역임자로 혁명정부에 관여하였고 혁명정부 아래서 관직을 역임하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165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이탈리아 상륙을 도우며 화려하게 로마 정계에 등장한다. 사상적으로는 마리우스와 공감을 하지만,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진영을 바꾼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의 부귀를 위해 지휘관에게 투자하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다가올 로마제국과 군인황제시대의 전조를 느낀다면 너무 결과적인 이야기일까. 이미 로마는 각각 시민의 권리와 공화정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에 의해 제국으로 가는 길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 길은 로마 군제(軍制) 개혁을 통해 마리우스가 설계하고, 술라의 쿠데타로 인해 포장된 길이었다. 이제 누가 그 길로 로마를 운전해 갈 것인가. 현재까지는 폼페이우스가 유력해보인다. 그가 등장하기전까지는...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애초부터 과두정 지지자가 아니었고, 혁명정부를 인정하였고 심지어 킨나의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선친이 혁명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사방의 적들에게 위협을 느꼈는데, 특히 그의 선친이 아스클룸 점령 직후 착복한 전리품을 반납하라는 고발 때문에 그의 가산이 크게 손실을 볼 지경이었다... 술라의 상륙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피케눔으로 갔다. 폼페이우스는 그곳에 막대한 재산이 있었고, 그는 아욱시뭄(오늘날의 오시모)에 귀족당파의 깃발을 꽂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166


 자발적으로 술라의 병사들은 로마의 전통에 따라 서로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였고, 자발적으로 그들은 모두 사령관에게 전쟁 비용에 보태라며 저축한 돈을 가져다 바쳤다(p163)... 술라의 병사들은 사령관으로부터 넉넉히 돈을 받았기에 전쟁에 전혀 관심이 없는 병사들에게 술을 사면서, 너무나 쉽게 적이 아니라 동료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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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16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마를 위해서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술라는 굉장히 반동적인 인물인데 그럼에도 굉장히 개인적인 매력이 있었던거 같아요. 로마사를 제가 소설로 봐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3-02-16 01:59   좋아요 1 | URL
몸젠은 <로마사>에서 술라의 죽음에 ˝일 년 내내 로마의 여인들은 눈물로 그를 애도했다.˝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지만, 제가 읽은 다른 역사책에서는 그가 생전에 저지른 과업으로 인해 온 몸에 벌레가 끓는 질병으로 죽었다고 설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이처럼 술라가 사람의 관점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그만큼 공도 과도 큰 인물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 술라는 매력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이긴 하지만,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묘사되었기에단순히 허구라고 볼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