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신 인안나 - INANNA, THE FIRST GODDESS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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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획득한 하늘과 땅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선택한 모험이었다. 어느 누구도 다시 목숨 붙여 돌아오지 못하는 사지를 향한 지나친 욕망이었다. 인안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는 하늘과 땅에서는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이지 전쟁의 여신으로 맹위를 떨쳤지만, 저승에 내려가자마자 송장이 되었다. 마지막 들숨과 날숨도 떨어졌다. 죽은 것이다... 죽은 자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산 채로 저승 원정 길에 오른 일도 최초의 사건이었고, 그곳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최초의 사건이었다. 아니, 최초의 기적이었다. _ 김산해, <최초의 여신 인안나> , p81/179

김산해의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수메르 신화의 진정한 주인공 여신(女神) 인안나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으로의 여행 끝에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승리자가 되었다는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우리는 이미 고대 신화에서 발견하며 놀라게 된다. 이와 함께 인안나에 녹아있는 올림푸스 신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책을 읽는 다른 재미가 된다.

인안나의 저승 여행은 끝이 났고, 그의 사랑도 끝났다. 그리고 진정한 승리자는 인안나였다. 그는 하늘의 여왕이었고, '큰 땅' 저승에서 살아 돌아온 여신이었다. 그것은 수메르 만신전에서 전례 없던 위업이었다.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한 인안나는 가장 위대한 신이 되었다. 아울러 그녀는 이승과 저승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룩한 신이 되었다. 그래서 두무지는 비록 저승으로 붙잡혀 가지만, 인안나가 정해준 그의 운명으로 반년 동안 죽었다고 다시 부활하여 이승에서 나머지 반 년을 보내는 삶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_ 김산해, <최초의 여신 인안나> , p122/179

바람을 피는 남편을 벌하는 장면에서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 '메'를 엔키로부터 훔쳐가는 장면에서는 헤르메스, '메'를 통해 지혜를 통치하는 면에서는 '아테나', 사랑을 관장하며 인간 길가메시에게도 마음을 빼앗긴다는 점에서는 '아프로디테', 실질적인 이승의 지배자라는 점에서는 '제우스', 지혜의 신 엔키를 술에 취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디오니소스', 저승으로부터의 귀환 이후에는 죽음마저도 관장하는 '하데스'가 결합된 인물이 인안나임을 생각해본다면 여신 인안나가 얼마나 강력한 신이며, 신들의 원형임을 알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인안나가 수메르 신화의 주인공이고, 빛나는 '아폴론'와 같은 존재가 분명하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아폴론'과 같은 인안나가 아닌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같은 '엔키'다.

하늘의 땅의 여왕, 전쟁, 풍요, 다산, 완전하고 다양한 여성성, 여성적인 삶의 원리, 여성들의 수호천사, 품위 있고 당당한 부인, 수많은 도시와 왕들의 수호신, 금성(金星) 등으로 상징화된 여신들의 본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던 진정한 여신이 있었다. 인안나였다. _ 김산해, <최초의 여신 인안나> , p5/179

엔키는 지혜의 신으로 '메'의 원래 주인이다. 그러다가, 인안나에게 속아 '메'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인안나를 축복하는 넓은 아량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인안나가 저승에서 죽음을 당했을 때, 유일하게 인안나를 돕기로 결심하고 그가 부활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그가 최고신이 될 수 있게 만든 것도 바로 엔키다. 그런 면에서 수메르 신화에서 빛나는 양(陽)은 여신 인안나지만, 이러한 양을 만들어 낸 음(陰)은 남신 엔키라 할 수 있겠다. 마치 음(陰)에서 양(陽)이 나온다는 <도덕경 道德經>의 내용처럼. 고대 수메르인들도 이러한 생각을 했었을까.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 '태음력(太陰歷)'을 사용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달'을 관장하는 엔키는 마치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처럼 왕은 아니지만, 고대 수메르 문명의 중심에 서 있는 신(神)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았을까. 인안나가 지배하는 코스코스(Cosmos)를 잉태한 카오스(Khaos)를 상징하는 것이 엔키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를 생각해본다. 실제로, 고대 수메르 신화에서 엔릴이 대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했을 때, 몰래 이를 막아선 것도 엔키였음을 생각해본다면, 그에게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면모도 찾을 수 있다.

"내 권능을 걸고 말하노라. 내 신성한 성전을 걸고 말하노라. 네가 가지고 간 '메'는 네 도시의 거룩한 성소에 남아 있을 것이다. 사제장이 그 거룩한 성소에서 찬송하며 일생을 보내도록 하겠다. 네 도시 사람들은 번영을 누릴 것이다. 우루크 아이들은 기쁨이 넘치리라. 우루크 사람들은 에리두 사람들과 동지로다. 우루크는 위대한 곳으로 부활하리라!"(p44)... '메'의 전 주인 엔키는 역시 큰 신이었다. 그는 비록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여신에게 빼앗겼지만 새로운 지배자를 축복해 주었다. 하여 그는 패자이면서도 여신의 영원한 웃어른으로 남게 되었다. _ 김산해, <최초의 여신 인안나> , p51/179

이와 함께 <최초의 여신 인안나>와 <길가메쉬 서사시>를 함께 생각해보게 된다. 두 서사시 모두 '여행과 '죽음''을 주제로 하지만,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이라는 존재의 차이가 있기에 여행의 결말을 달라지게 된다. 여행 끝에 죽음을 정복한 신(神) 인안나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길가메쉬. 그가 느꼈을 '허무'가 고대 지혜문학의 주요 주제와 연관된다는 점도 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현재 우리에게 거의 잊혀진 여신(女神)에 대한 이야기다. '양(陽)'을 상징하는 여신의 이야기도 분명 흥미롭지만, '음(陰)'을 의미하는 남신의 이야기도 이에 못지 않다. 마치, <주역 周易>에서 하늘의 기운이 땅으로 내려오고, 땅의 기운이 상승하면서 교감하며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며, 최고의 괘로 꼽는 '지천태(地天泰)' 괘(卦)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고대 수메르 신화에는 존재한다.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이러한 조화를 되살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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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9-16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통 아시아권에서 양은 남성이고 음은 여성인데.. 같은 아시아초기 문명인데도 중국 문명과는 또 다르네요. 하긴 지금의 중동쪽이니 같은 아시아라고 하기도 그러네요….

겨울호랑이 2022-09-16 09:23   좋아요 1 | URL
기억의집 말씀처럼 신화 안에서 고대 수메르 문명과 고대 중국 문명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차이가 생긴 원인을 여러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류 문명의 모계사회 전통이 인안나 신화에 표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듯하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에서 ‘음양‘ 사상이 선진시대 이후 ‘오행‘과 ‘태극‘과 결합하며 절대성을 부가하기 이전에는 보다 상대적인 개념이었던 것과 같은 흐름 속에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 기억의집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