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UM(숙명)에 관한 논쟁도 우리의 여러 다른 논쟁거리 가운데 섞여 든다. 그리고 미래의 일들과 우리의 의지까지 결정적이고 불가피한 필연성에 결부시키려고 우리는 여전히 해묵은 논리에 의지한다.

신중하고 분별 있게 벌을 내려야 벌을 받는 사람이 더 잘 수용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반면 벌주는 사람이 노여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면 벌받는 자는 정당하게 처벌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동과 말이 함께 간다면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조화이고, 말이란 행동이 따를 때 가장 권위 있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나는 부인하고 싶지 않다

분노란 저 혼자 장구 치고 북 치며 부풀어 오르는 정념이다. 그릇된 이유로 흥분한 나머지, 누가 우리에게 정당하게 반박하거나 변명을 제시해도, 진실 자체에 대해, 그리고 엉뚱한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

정념은 밖으로 표출됨으로써 약화된다. 감정의 화살촉이 안을 향해 꺾이게 하기보다 밖으로 작용하게 하는 편이 낫다. "밖으로 드러나는 결함은 가장 가벼운 것들이다. 그것들이 건전한 척하는 외양 뒤에 숨어 있을 때 제일 위험하다."(세네카)

모든 여성과의 관계를 딱 끓고 사는 것이 아내와 함께 모든 면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보다 아마 더 쉬울 것이다. 꼭 알맞게 절제하며 풍요 속에 사는 것보다 가난하게 살 때 더 근심 없는 나날을 보낼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쓰는 일이 아주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고달프다. 절제는 고통을 겪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덕목이다.

많은 탁월한 인물들이 그랬듯이, 남을 위해 삶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마음이 위대하다는 증거요. 늙은 생명(그것의 가장 큰 이점은 얼마나 더 살 것인가에 대한 조바심이 없고, 목숨을 보다 하찮게 여겨 더욱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오.)을 보존한다는 것은, 그 봉사가 지극히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달갑고 기쁘고 유익하다고 생각된다면 특별한 선행이 되는 것이오.

우리를 이렇게 눈멀게 만드는 것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공포, 아픈 것을 참지 못하는 조급함, 낫고 싶은 광적이고 과도한 욕망,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물러터져서 조종당하기 쉬운 것은 순전히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대다수는 의학을 믿는다기보다 그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의학에 대해 불평하며 우리처럼 말하는 소리가 들리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어쩔 수 있나?" 하면서 결정을 내린다. 여하간 안달이라도 하는 것이 참는 것보다 좀 나은 치료법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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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07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꾸준히 열독하시는군요. 저도 에세1을 오늘 몇 장 읽었어요. 아침마다 읽고 하루를 시작해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사례가 풍부하여 읽는 재미를 더하는 것 같아요. 인용한 문장도 명언처럼 빛나 보이더군요. 인용의 대가라 할 만해요.
읽다 보면 인간의 민낯을 보게 되어 인간에 대한 공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해요.^^

겨울호랑이 2022-09-07 18:27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에세>는 마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 느낌을 주는 책이라 빠르게 읽기보다 행간 사이에 머물며 잠시 머무는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분량은 적지 않지만, 완독하는 재미보다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