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완성 - 입헌군주제 혁명을 완수하다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6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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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는 무슨 업적을 남겼는가? 1791년 9월 30일 마지막 회의를 끝마친 시점에서 보면 제헌의회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1789년 5월부터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을 만들거나 거기에 휩쓸리면서 2년 5개월 동안 헌법을 제정했고, 그 헌법을 기초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투표로써 입법의원들을 뽑아놓고 물러났던 것이다. 그들이 비록 구체제의 방식으로 뽑혀 전국신분회에 나갔고 개인별 투표를 전제로 모이지는 않았지만 '주권의 혁명'을 성취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373/380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6권 <헌법의 완성 - 입헌군주제 혁명을 완성하다 Liberte>는 바스티유 사건 이후 2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의 절대군주제 대신, 국왕을 '제1 공복'으로 규정한 입헌군주제의 프랑스를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2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혁명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결코 작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왕당파의 지지를 받으면서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절대군주로서의 권위를 잃었다. 국회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데 비해, 그는 더욱 위축되었다. 그는 점점 자유를 구속받는 현실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어떻게든 혁명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파리에서 도주했다. 그러나 그는 24시간 만에 국경과 가까운 바렌에서 붙잡혔다... 그는 전국신분회가 175년 전처럼 군주를 위해 세금을 걷는 일에 동의해주기 바랐지만, 거기에 모인 제3신분 대표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를 이끌어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국민의 진정한 대표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국신분회의 전통적인 방식인 신분별 회의를 거부하고 세 신분이 한데 모여 의논하자고 주장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9/380

미국 독립전쟁 참전 등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부담을 덜기 위해 소집한 삼부회(三部會)에서 본래 의도했던 증세(增稅) 대신 특권 폐지와 제3신분에 의해 주도되는 국회에게 입법권을 넘겨주는 과정과 이후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은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 모두에게 깊은 감정의 상처를 남겼다. 혁명 이후 절대군주제의 부활을 노렸던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원하는 제3신분 사이의 치열한 다툼 끝에 루이 16세가 결국 도주하면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듯 했다.

왕이 파리로 돌아간 뒤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6월 말까지 국민에게 왕의 재판을 맡기자, 법원에 왕의 재판을 맡기자, 루이 16세를 폐위하자, 왕의 자격을 정지하고 섭정을 두자, 이렇게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팔레 루아얄에서는 몇몇 작가나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 큰 호응이 없었다. 특히 코르들리에 클럽은 공화제를 주장했다. 그들은 자코뱅 클럽에 대표를 보내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의 무시당했고, 심지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9/380

그럼에도 이들은 혁명을 인정하고, 왕을 존중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어가며 결국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사실, 국회의원 전원이
루이 16세를 지속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한 국회에서 설계하는 새로운 질서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루이 16세의 도주 사건 이후 분위기가 바뀌어 공화정을 주장하는 급진세력이 출현학는 계기가 마련되면서 변화가 생겨났다.

국회에서는 왕의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왕의 신성성을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극우파와 우파는 절대군주제를 지지하고,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혁명이 급진화할수록 좌파에서 공화제를 주장하는 극좌파가 나타났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32/380

사람들은 국회의 합동위원회에 "왕에게 신성성이 있는데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물었지만, 르장드르는 그 질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왕에게 신성성이 있다면 국회는 무슨 권리로 왕의 자격을 정지시켰는가? 그것은 국회가 제정한 헌법의 원칙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 르장드르는 국회가 원칙을 벗어난 이상, 왕은 인민의 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47/380

루이 16세의 도주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급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는 입헌군주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빠른 시일 내에 구체화할 필요에 쫓기고 있었다. 이런 다급함을 잘 알고 있던 루이 16세를 비롯한 절대왕정세력은 수세에 몰린 처지에서도 당당하게 제헌의회의 헌법을 제정하는 한 축으로 기능하면서,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인정받았음을 우리는 <헌법의 완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과연 대중들을 속일 수 있었을까?

국회에서는 헌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7월 14일의 기념식에도 겨우 스물네 명의 대표만 참석시킨 채 현안문제를 다룬다고 바쁜 척했다. 그러나 민중은 그동안 희망을 안고 참았지만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분하게 여겼고, 급진적인 신문 발행인은 국회가 일부러 혁명의 다음 단계를 늦추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1/380

왕과 왕비는 비록 튈르리 궁에 갇혀 있는 형국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숨도 크게 쉬지 않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 주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항상 국내외 반혁명세력과 연계할 궁리를 하면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기회만 엿보았으니, 그들이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유쾌하고 오만한 태도로 궁 밖에 오가는 민중을 '개/돼지' 정도로 깔보고 가엾게 여겼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새로운 체제도 어차피 질서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6/380

그렇지만, 이들의 이런 정치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은 이러한 '좌/우 야합(野合)'의 실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혁명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인민의 삶과 생각보다 늦어지는 개혁의 움직임 등으로 제3신분 다수의 불만은 점차 커져가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후 혁명이 입헌군주제의 수립에서 멈추지 않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복선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은 국회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1789년의 혁명이 제3신분 중 어느 정도 성공한 부르주아(bourgeois)만의 공화정인가, 아니면 제3신분의 다수를 구성하는 데모스(demos)를 위한 혁명의 성격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앞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헌법은 제정되었으나, 이를 지켜내기 위한 프랑스의 혁명 전쟁은 다음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인민은 왕국의 방방곡고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해 도시를 둘러친 세관 울타리, 지방을 갈라놓은 그 울타리들을 무너뜨렸다. 소금세, 각종 소비세, 담배세, 입시세를 받던 세리들은 쫓겨났다. 사람들은 창고를 약탈했다. 식료품의 밀수가 도처에 성행했고 이성보다 폭력이 세상을 먼저 지배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270/380

1791년 초부터 수많은 단체와 우애관계를 맺은 코르들리에 클럽은 7월 8일의 회의에서 왕의 신성성에 대해 논의했다. 여러 사람이 연단에 올라가 왕의 신성성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왕도 죄를 지었으니 재판하고 벌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왕이 도주하는 순간 신성성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도주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한 헌법에 공식적으로 반대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회는 왕에게 신성성을 되찾아주고 그를 왕좌에 굳건히 앉히려고 노력혔다. 그리고 국회는 왕이 납치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인민이 떠들기 시작하면서 국회의 노력은 실패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38/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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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2 0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왕을 죽이는 것은 쉽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왕의 자리를 죽이는 것은 그 체제가 유지되어온 시간만큼 힘든거겠지요.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혁명 후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만큼요. 이런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는데 우리는 아직도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인간들이네요.

겨울호랑이 2022-08-22 08:42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과거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과 인물들이 기시감이 들 정도로 반복됨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인류가 진보해왔다면, 과거의 성과들이 잊혀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어왔기 때문이라 여겨지네요... 인간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인류와 문명은 그런 면에서 사회적 진화를 해 온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