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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 일제 식민농정의 동역학
정연태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식민농정이 기획, 시행, 수정되는 과정, 즉 식민농정의 동역학 動力學을 주체적, 중층적, 장기사적 시각에서 밝히고자 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농업의 역사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일제 권력, 일제 자본, 지주, 농민 등 사자 四者의 의도와 지향이 서로 연계, 충돌하고 절충되는 가운데 식민농정의 방향과 기조가 결정되는 동역학을 구명하는 것이다(p8).... 식민농정은 일제 권력의 의도뿐 아니라 일제 자본의 요구, 지주와 농민의 대응에 의해 구성된 사중주 四重奏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중주는 힘과 처지와 의도가 다른 네 주체 간 갈등의 산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사중주는 불협화음과 파열음의 연속이었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9
정연태 교수의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은 러일전쟁 직후부터 일제 패망시기까지 한국눙업사를 분석한 책으로, 이 시기 식민농정을 일제권력의 의도, 일제 자본의 요구, 지주의 대응, 농민의 대응의 역학관계로 파악한 책이다. 이 시기를 단순히 민족간 대립, 계급간 대립이 아닌 보다 세분화된 변수로 파악하는 구조 속에서 이분법(二分法)구도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측면들이 드러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증명제도안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다. 증명제도안 도입에 대해 찬성입장을 보인 통감부, 대한자강회, 대한제국 정부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최적안을 통과시키고자 노력했다. 식민이주를 목적으로 한 통감부는 '임의주의'를,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을 목적으로 한 대한자강회와 대한제국은 '강제주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제도의 도입을 일제의 토지침탈인 '토지조사사업'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제도의 도입으로 침탈을 막고자 한 저항을 읽을 수 있다.
일제 통감부, 대한자강화, 대한제국 관료들은 모두 문권위조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부동산증명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증명법의 제정 의도나 대강 大綱을 둘러싸고 삼자는 갈등했다(p134)... 자강회안과 법부안이 증명 강제주의 원칙을 취한 반면, 우메수정안과 법률6호는 증명 임의주의를 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여리서 주목할 점은 증명 강제주의 원칙을 취하면,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국가가 사실상 확인, 관리, 통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한자강회와 대한제국 관료들도 바로 이런 효과를 기대해 증명 강제주의 원칙을 취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자주적 증명제도안과 식민지적 증명제도안의 분기점이라 하겠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134
이와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한 식민지적 토지정책은 식민지주제의 강화로 생계를 위협받은 소작농민의 저항으로 인해 의도했던 바를 충족시킬 수 없었고, 사회안정화를 위한 조치를 강구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제 하 식민농정에서 주체적인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경술국치 무렵에 일본인 지주는 개별 지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집단적 존재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일본인 지주들이 하나의 계층적 범주를 구성해 식민지주제란 경제제도가 이식, 착근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시기 농업식민화 정책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로 전개됐던 이주식민 장려정책의 실적은 극히 부진했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137
지주경영이 강화되고 식민지주제가 발전함에 따라 소작농민은 생계의 안전성과 안전성을 위협받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소작농민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가自家노동을 최대한 연소하거나 소비와 지출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도 살아가기 여의치 않을 경우 지주의 부당한 수탈에 대항하는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소작농민이 농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이후부터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은 계급적/민족적으로 각성하고, 그 이후 확산된 '사회개조', '자유/평등 사상의 자극'에 의해 더욱 자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3.1운동을 통해 획득한 자유 공간이 농민운동 발전을 가능케 했다(p260)... 소작쟁의의 일상화, 조직화, 대규모화는 일제로 하여금 소작문제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관헌의 무력적 개입에 의한 소작쟁의 해결은 지주와 소작농민의 사적私的 계급적 갈등을 식민권력과 한국 농민 사이의 공적/민족적 대립으로 전화시킬 수 있었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263
1930년대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지주경영은 한층 수탈을 강화하고자 했지만, 이전 1920년대부터 일어난 소작쟁의 등의 저항은, 제도적으로 이러한 수탈을 막도록 강제했고, 지주들의 자리를 일제자본이 대신했다는 것 또한 식민농정이 일제 권력이라는 정치권력이나, 지주라는 경제권력의 일방적인 강제에 의해 일어난 사안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세계대공황과 농업공황의 여파로 지주들은 손실을 메꾸기 위해 지주경영을 강화했다. 농사 과정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고, 소작료를 인상했으며, 조세공과를 소작농민에게 전가했다. 심지어 농민을 사실상 농업노동자처럼 부리는 위탁경작제를 도입했다. 이와 같은 지주경영은 농촌사회의 관계망과는 동떨어진 일본인 식민 대지주들에게 두드려졌다. 그 결과 식민 대지주는 증가했고, 이들의 토지 소유도 늘어났다. 반면 농가 대부분은 빚더미의 구렁텅이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농가는 파멸적인 위기를 맞이했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405
대공황기 소작입법과 자작농지 설정사업과 같은 사회개량적 식민농정의 시행으로 지주경영이 확대될 여지는 현저하게 줄었으나, 농업생산성의 발전을 통해 지속 발전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그 결과 1930년대에 지주제는 종전처럼 성장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약화되지도 않았다(p412)... 지주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약화되고 지주제가 둔화된 틈을 차지한 것은 금융자본이었다. 금융자본은 부동산 담보 대부를 통해 농촌과 농업 지배력을 확대됐다. 그 결과 지주와 농민의 금융자본 의존도는 높아졌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413
이와 같은 일제 권력, 일제 자본, 지주, 농민의 서로 다른 불협화음은 1940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파국으로 마무리된다. 전시총동원령이라는 급박한 전시 경제 체제 아래에서 서로 다른 규모의 힘들이 맞춘 균형점은 파괴되었으며, 이러한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일제 식민통치의 수많은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점은 결국 제국의 중심부를 위한 주변부의 수탈을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일제가 전시 식량증산을 위해 주력했던 통제 위주 식민농정도 파탄을 맞게 됐다. 이는 일제 본국 요구의 수행과 식민지배의 안정화라는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책임졌던 일제 식민권력이 후자는 무시하고 오로지 전자만을 향해 치달은 결과였다. 달리 말하면, 일제가 식민지 한국의 농촌, 농업, 농민 사회의 실상과 대응을 무시, 억압하고 오로지 제국주의 본국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식민농정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게 되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역사적 산물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497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은 일제 시대 한국 농업의 주체를 보다 세분화하고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가혹한 조선총독부 시절 통치시기에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주장을 관철하려는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만주와 해외에서 보다 적극적인 저항으로 독립의지를 밝히려는 투쟁이 있었다면, 식민농정에서는 자기 것을 무기력하게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는 보다 작은 규모에서의 저항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역동성을 통해 기존의 역사관 - 식민지 수탈론, 식민지 근대화론, 탈근대 인식론 - 을 비판한다. 모두까기보다는 이들의 관점을 모두 수용해서 보다 종합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자는 저자의 결론을 통해 암울했던 시기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시대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토지>, <아리랑>을 다시 읽어본다면, 작품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식민농정의 동역학 動力學을 밝히려는 이 책의 문제의식에 비춰 볼 때, 세 가지 근대역사관에는 각각 합리적 문제제기가 있었다. 식민지 수탈론은 민족간 대립/갈등에 시선을 집중한 나머지 식민지 한국사회에서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다양한 이해관계, 수탈과 저항 사이뿐 아니라 성장과 몰락, 저항과 협력, 적응과 반발 사이를 유동하는 대중의 다양한 실체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p501)... 식민지 근대화론이 범한 결정적 한계는 두 가지다. 일제의 식민성을 드러내는 핵심 지표인 민족 억압, 수탈, 차별, 말살의 구조와 특성은 거의 무시한 채 일제를 한국 농업, 농촌을 발전시킨 식민지 개발자로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핵심 논리로 하는 신판 식민사관이란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됐다(p502)... 탈근대 인식틀에 따르면, 식민성을 근대성에 매몰시켜 버리고 민족해방운동 주체를 개별적이고 분산적이 하위주체로밖에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농정을 둘러싼 일제와 한국 사회/농민의 갈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요컨대, 탈근대 인식틀로는 하위 주체인 농민의 자율성이 민족/사회 운동의 지원 내지 협력을 받거나 이들 운동 역량과 결합했을 때 비로소 식민농정상 자신들에게 유리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간파할 수 없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