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갈릴레오 시대, 공중위생의 역사에 관한 연구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김정하 옮김 / 정한책방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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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흑사병에 대한 학술적 지식은 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인도와 만주에서 발생한 전염병들에서 기원하였다. 항생물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전 세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흑사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는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p98)... 흑사병이 극성을 부릴 당시 빈민계층은 가장 심각한 피해에 노출되었다. "사악한 병마로 인해 극빈계층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사실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흑사병은 처참한 위생상태에서 살아가는 극빈계층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99


 카를로 M. 치폴라(Carlo Maria Cipolla, 1922 ~ 2000)의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Crictofano e la peste>은 흑사병이 창궐하던 17세기 이탈리아 소도시 프라토를 배경으로 한다. 병에 대한 지식과 치료법이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가공할 전파력을 가진 치명적인 질병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치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보건위원으로 임명된 크리스토파노. 그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흑사병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전염병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크리스토파노의 대처방안인 감염환자의 격리와 전염이 의심되는 물품에 대한 사후 처리 - 살균과 소각 - 는 COVID-19를 겪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효과적인 대처법으로 보여진다.


 크리스토파노의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1) 감영된 것으로 의심되는 자를 모두 22일간 격리시설로 보낸다.

 2) 감염자들을 격리시설로 보낸다.

 3) 격리시설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요양병원으로 보낸다.

 4) 요양병원에서 22일간 격리한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67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것은 경제적인 요인들에 대한 고려로 귀결되었다. 산업화 이전 시대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에 보건과 위생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들에 따라 물품들을 대대적으로 소각하는 것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오염이 의심되는 물품이 새것이거나 가치가 높은 것이면 살균하였다. 하지만 낡고 가치가 적은 물품들을 불태워졌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81


 감염환자들에 대한 치료단계 대처뿐 아니라 예방단계에서 행해진 조치들은 과거 2년간의 '사회적 거리두기'의 오랜 역사성을 보여준다. 사료에 남겨진  전염병 대처법들은 오늘날 보건위생학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며, COVID-19초기 단계 우리 정부의 대응에 대해 외신들이 극찬한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1630년 1월 초반 피렌체 보건 당국은 공국의 모든 영토를 대상으로 '통상적인 격리기간'을 공고하였다. 이것은 흑사병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한 전형적인 조치였다. 즉,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주민들을 집에 머물게 하며 격리기간에 그 어떤 모임이나 집회도 금지하는 것이었다... '통상적인 격리기간'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전염자와 보균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신속하게 격리시키는 조치가 동반되었다면 모임을 금지하고 이동과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은 최선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90


 잘 알지 못하는 전염병에 대해 최선의 대응책을 고안한 크리스토파노였지만, 그의 적은 감염병만은 아니었다. 크리스토파노를 괴롭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심리와 그를 둘러싼 사회제도에 있었다. 긴급한 상황에 지급되는 '생계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사망신고를 하지 않는 이들과 이로 인해 더 퍼져가는 흑사병,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해지는 집단 간의 알력과 다툼, 부족한 자원 속에서 예방과 치료를 이어가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크리스토파노와 동료들의 노력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의학에 대한 무지와 대중의 협력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경제사학자의 관점에서는 보건소 관리들의 노력이 실패한 원인이며 적절한 경제적 자원의 결핍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크리스토파노 체피니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어리석은 투쟁에서 '희망의 빛'을 상실했다. 그와 동료들의 처절한 노력은 무지, 어리석음, 완고한 고집 그리고 사람들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파노는 많은 경우에 있어 (경제적) 자원의 부족으로 좌절해야만 했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122


 분쟁, 부정부패, 규정위반, 지루한 언쟁, 일련의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들. 병원의 관계자들에게는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환자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는 계속되었다. 병원 관계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들의 보고서에는 정신적 피곤과 불안감이 지속적으로 목격되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심각한 고독감과 의심으로 인한 좌절감은 보다 큰 결정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감으로 드러났다. 프라토 보건위원들이 역사에 남긴 심리상태에서 또 다른 동기는 고통스런 절망감이었다. 사람들은 무지함 때문에도 제약과 통제에 견디지 못하기 마련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p50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에서 놀라운 점은 17세기 흑사병을 겪은 사회의 모습과 21세기 코로나를 경험하는 사회의 모습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변이를 통해 진화(進化 evolution)하는 바이러스와 몇 세기가 지나도록 의학기술 외에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인류 공동체와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과연 인류 사회의 진보(進步 progress)를 낙관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를 통해 개인의 욕심에서 벗어난 성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들의 깨달음이 공동체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고 개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역사를 보며 앞으로 더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한결 성숙한 자세로 대처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크리스토파노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좌절했다면, 우리의 노력은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 정치적 한계로 무너졌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인지... 치폴라의 얇은 책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은 코로나 19 상황이 종결되는 시점에 있는 우리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크리스파노가 자신의 글에서 말한 ‘실수‘는 ‘부정부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격리기간이 지난 후에도 일상의 생계보조금을 기대하면서 집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건위원에게 주어진 임무들 중 다섯 번째와 관련해 보건소 관리들에 따르면 집안에서 사망한 자들은 곧바로 보고되지 않았으며 도시정부는 계속해서 이들에게 일상의 보조를 하였고, 이렇게 해서 부당하게 지급된 생계보조금은 관련 직원이나 죽은 자가 또는 양측이 함께 착복하였다. - P62

1631년 2월 25일, 피렌체의 보건 당국은 이 병원의 총독이 격리병원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p71)... 인간적인 충돌과 관료정치의 분쟁으로 인해 격리병원의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결국 1631년 6월, 병자와 요양병원의 환자들에게 필요한 많은 물품들이 공급되지 않음에 따라 세속구호단체인 베네란다 콘프라테르니타델 펠레그리노(Veneranda Confraternita del Pelegrino)는 프라토 보건소의 관리들에게, 격리병원과 요양병원의 환자들이 머물고 있는 주택들에 대한 관리와 물품 공급의 행정업무를 자신이 수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크리스토파노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고 환자들에 대한 대우가 크게 개선되었다. 한편 몇 달이 지나자 전염병의 기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 P73

보건소 관리들이 주목한 최대의 기준은 격리기간을 줄이는 것보다 예방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통제되지 않은 일련의 요인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보건소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다른 이유들과 전혀 다른 사고들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모든 규칙들에 대해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프라토에서는 격리병원의 환자들까지도 격리규정을 지키려들지 않았다. 게다가 공중 보건의 필요성에 상충되는 이해관계들이 존재하였다. 상인들은 전염병에 오염된 지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지키려들지 않았으며 보건소 직원들이 설정한 예방조치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예외의 특권을 획득하였다. 교회는 종교행사와 기도회를 금지시키는 행정조치들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저명인산들의 이기주의와 천박함은 보건소 관리들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보건소 관리들 역시 당대의 전형적인 사고에 의한 미필적 희생자들이었다. - P119

흑사병은 삶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재앙도 초래하였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지역시장의 위축과 특히 공중보건 상 격리 지역의 설정으로 외부상인들과의 접촉이나 거래가 차단되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피렌체 대공국의 경제정책은 공국 내의 소도시들에는 피해를 주었던 반면 피렌체의 수공업 분야에는 매우 유리하였다. - P103

보건소 관리들은 전염병에 대항하면서 막중한 책임을 수행했으며 몇 달 동안 걱정, 피로, 위험 속에서 살았지만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했다. 이들에 비해 별로 고생하지 않은 자들은 봉급과 ‘사례금‘을 받았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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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2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세에도 저런 식의 전염병관리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군요. 흑사병하면 거의 어쩔줄 모르는 상황에 신을 부르는 모습만 연산이 되는데 말이죠. 저는 오히려 실패했을지라도 크리스토파노와 같은 노력이 공동체의 기억속에 새겨진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가 그래도 안 망하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요. ^^

겨울호랑이 2022-06-22 23:14   좋아요 1 | URL
움베르트 에코가 <중세> 시리즈 서문에서 현대인들이 중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무식하고 단순한 기사와 기도 밖에 알지 못하는 수도자. 중세를 대표하는 두 계급의 모습으로 우리가 중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근대가 르네상스에서, 르네상스가 중세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로 보면, 지금과는 배경이 많이 다르지만 배경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마음은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