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역사 2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88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지음, 한정숙.허승철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6~17세기의 우크라이나의 민중 운동은 어떠한 해악적 외부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형제단은 우크라이나의 종교적 삶의 연원을 순구한 사도(使徒) 시대 기독교에서 찾았고, 코자크 제도의 기원은 자유, 평등, 형제애에 바탕을 둔 고대 슬라브인들의 민주주의의 토대와 결부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국처럼 차르를 사랑하지 않고, 폴란드처럼 지주를 사랑하지 않으며 대신 코자크 제도, 즉 형제단을 만들었다고 코스토마로프는 썼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28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다룬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i, 1866~1934)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2>는 리투아니아-폴란드, 모스크바(러시아), 스웨덴, 오스트리아,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서 끊임없이 독립하려는 코자크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의 의지와 열망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17세기)에 이르면 코자크 체제는 이미 충분히 정비되고 확정되었다. 이 제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지만, 단순함과 자유로운 성격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코자크 형제단의 영혼과 몸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코자크 조직에서 경이로운 조직 구성의 소질을, 다시 말해 단순한 수단과 원시적이고 채 다듬어지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이토록 탁월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소질을 보여주었다. 코자크 조직의 가장 중요한 중심은 여전히 드니프로 강 하류 유역(니즈)에 자리잡고 있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5


 흐루셰브스키에게 '코자크'는 단순한 군사조직이 아니다. 코자크와 지휘자 헤트만을 선출하는 방식은 아래로는 우크라이나 민중과 조직을 연결시켜주었고, 코자크의 군사력은 대외적으로 이들은 폴란드, 러시아 지배계급과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자치권을 가진 군사집단. 훗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에 의해 헤트만 통치권이 폐지되기 전까지 코자크 제도는 우크라니아 민족을 유지하는 중추였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코자크들의 최고 지도자는 보통 헤트만이라고 불린 선출된 장교가 맡았다. 이 직위를 맡은 지휘관들은 코자크에게 보낸 편지뿐 아니라 폴란드 정부와 심지어 국왕에게 서신을 보낸 때에도 스스로 헤트만이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한 반면, 폴란드 정부는 이들을 '최선임지휘관'이라 불렀다(p27)... 코자크들은 자기네 최고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권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권리는 코자크 자치의 기초였다. 코자크들은 단지 자신들이 선출한 헤트만을 인정할 권한만을 폴란드 정부에게 허용했다. 그러나 정부가 선출 결과를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의 헤트만 선출과 해임을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정부가 무엇은 원하는지 그 희망사항의 의향은 고려하지 않았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8


 코자크들은 폴란드와 용병계약을 체결하고 형식적인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실질적인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코자크들이 강성해지길 원치 않는 폴란드 지배계급은 실질적인 자치를 억누르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쳤기에, 이들은 또다른 외세인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코자크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은 이들 두 나라에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스웨덴과 투르크에게도 손을 내민 그들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우안과 좌안이 각각 폴란드와 모스크바(러시아)에 분할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외세에 의존한 개혁이나 독립의 추구가 가져오는 비극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보편법칙인 듯하다.


 페트로 사하이다치니는 폴란드가 전쟁 수행을 위해 또다시 코자크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올 터이니 그때까지 폴란드와 전쟁으로 치달아서는 안 되며 코자크들은 국왕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고 실제로 표면적으로는 복종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코자크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46


 흐멜니츠키는 타타르 칸에게 폴란드를 공격하도록 촉구했으며, 더 나아가 투르크의 술탄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칸으로 하여금 술탄의 명령에 따라 폴란드 전쟁에 나서게 강요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동시에 모스크바와도 접촉해 이 나라가 폴란드와 전쟁에 나서게 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모스크바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는 우크라이나를 차르의 지배권 아래 두겠다고 약속했다. 흐멜니츠키는 투르크의 종주권 아래 있는 이웃 국가들, 곧 몰다비아의 군주와 트란실바니아 공과도 교섭했다... 이러한 모든 교섭 중 우크라이나의 장래 정책과 관련해서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은 흐멜니츠키와 모스크바국의 협상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146


 스웨덴에서는 카를 10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는데, 그는 폴란드와의 옛 전쟁을 다시 시작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과 트란실바니아는 폴란드를 완전히 패배시킬 희망을 갖게 되었고, 두 나라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정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귀족들과 정부의 학정에 크게 시달리고 있는 신교도 권문세가의 지원을 기대했고, 오랜 기간 동안 트란실바니아와 스웨덴을 폴란드와의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교섭해 온 흐멜니츠키에게도 기대를 걸었다... 그는 폴란드와의 전쟁에 연합해서 참여하자는 스웨덴 왕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161


 그리고, 폴란드-러시아의 분할점령기간 동안 코자크의 장교층들은 각각 폴란드 지주와 러시아 귀족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우크라이나 민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크라이나 민중과 코자크의 긴밀한 연대는 이로써 깨어지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한 기둥의 힘을 사라졌다. 식민통치가 가져오는 가장 큰 폐해는 수탈이나 약탈이 아닌 계급분할, 새로운 기득권의 출현이며, 이들이 갖지 못한 정당성의 상실은 매우 오랜 기간 사회 문제로 남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흐루셰브스키 역시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 정신의 근간을 동방정교회와 정교회 중심의 교육제도, 문학에서 찾는다. 


 모스크바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기에 코자크 장교들에게 충성스러운 봉사의 대가로 관급소유지를 후하게 나누어 주었고, 헤트만의 청원도 들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모스크바 정부는 코자크 장교들에게 안단한 멍에를 덮어 씌웠다. 그러나 이 멍에는 달콤한 것이었으니, 코자크 장교단은 기꺼이 이를 받아쓰고 그 속에는 모스크바 정부가 지시하는 길을 가볍게 따라갔다. 그들은 모스크바 권력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행하면서 장교단의 이익에 봉사했다. 그들은 코자크 군단 토지를 사유화하고 주민들을 농노화하는 이 같은 과정에서 모스크바 권력에 협력했다(p246)... 헤트만 사모일로비치와 마제파의 시대는 40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은 1648~1649년의 위대한 봉기에 의해 형성된 자유로운 체제의 운명이 결정된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불완전하게 형성된 이 자유로운 체제가 무너진 폐허 위에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새로운 예속이 형성된 시기였고, 이 예속이 그후 자유로운 정치 체제의 유산과 새싹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것은 토지의 탈취와 주민의 농노화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47


 18세기 후반 드니프로 좌안 지역과 자포로쟈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의 제도가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 드니프로 우안 지역과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 우크라이나의 독자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이 조성되고 새로운 기초가 형성되었다. 폴란드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폴란드는 우안 우크라이나 최후의 민중 운동을 진압하고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 통합교회를 도입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생활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자마자 폴란드 자체의 국가생활이 예상치 못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471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민중어는 출판물과 학교 교육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문학에서는 결코 그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러시아 검열 기관이 우크라이나어와 고대슬라브어 혼합어인 우크라이나 문어의 사용을 금지하여 이 언어가 사멸지경과 빠져버리자, 순수 우크라이나어는 유일한 현지 언어로서 심지어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00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2>의 마지막은 우크라이나 문학에 기반한 민족의식이 폴란드-러시아에게 분할, 폴란드의 삼국분할, 오스트리아 지배, 볼셰비키 혁명, 독일 지배 등 숨가쁘게 바뀌는 상황 속에서도 이어져왔음을 기록한다. 민족 역사의 많은 시기 동안 독립된 국가가 아닌 예속된 상황을 겪어야 했던 이들의 비극과 비극 안에서 민족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언어인 우크라이나 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어를 둘러싼 우크라니아-러시아 갈등의 문제가 중요성을 이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고,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드네프르 강 좌안과 우안의 서로 다른 성향이 폴란드-러시아 지배에 있음을 독자들은 역사로부터 알게 된다.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상황의 모든 문제를 역사 속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인이 바라보는 역사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는 매우 유용한 책이라 여겨진다.


 우크라이나 문학은 민중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 사항을 이해하며 농노적 예속 상태에 놓인 몽매하고 불행한 우크라이나 인민대중의 사회적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사회적-정치적 방법을 깨닫는 길로 차츰 다가갔다. 상층이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토양과 만나야 했고, 우크라이나 생활의 모든 희망은 촌락 주민 대중과 그들의 해방 및 정신적 발달의 전망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크라이나 민중을 인간적인 관계가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문제가 우크라이나 소생의 중심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13

교육과 서책문화에 큰 관심을 가졌던 사하이다치니는 키예프의 교회인사들 및 학계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우크라이나 생활의 역사에서 그야말로 지극히 중요한 순간이었다. 수백 년간 세인의 인식에서 사라져 망각 속에 있었고, 스스로도 자신의 옛 문화적, 민족적 의미를 점점 더 잊어가고 있던 키예프가 16세기에 갑자기 새로운 생명을 찾게 되었다(p53)... 키예프 인맥은 코자크 집단이 우크라이나 사회의 상류 계층과 처음으로 접촉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이제까지 코자크들은 단지 우크라이나 농민들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을 뿐이다. 농민들은 코자크들을 통해 농노제의 멍에에서 해방될 기회를 찾고 있었다. - P60

흐멜니츠키와 코자크 장교단은 자신들의 계획이 모스크바국의 계획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원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해방과 새로운 자유로운 관계의 수립을 위해 폴란드와 싸우는 데 필요한 지원을 모스크바로부터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국은 우크라이나를 새로 얻은 자국 영토로 간주해 여타의 행정구역이나 영토처럼 지배하려 했다. 모스크바국이 폴란드와 전쟁에 돌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러한 행동에는 전에도 차지했던 적이 있는 벨라루스 영토를 획득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P159

테테랴와 브루호베츠키가 각각 헤트만에 선출되면서 헤트만령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드니프로 강 우안 지역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상급권 아래 여전히 남아 있었고, 좌안 지역은 모스크바국의 상급권 아래 들어 있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힘은 더욱더 약화되어 이 나라의 해방은 꿈꾸기조차 어려워졌다. 양 진영의 반목으로 인해 많은 힘이 낭비되었고 설장가상으로 혼란과 무관심, 정치적 의식의 취약성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구출해내는 것보다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과 명예욕을 달성하는데 더 관심이 많은 음모자들과 야심가들이 도처에서 준동하여 수중에 권력을 틀어쥐었다. - P202

코자크 장교단은 리투아니아 기본법을 현행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법규집의 일관된 특징을 이루고 있던 신분제 원칙과 귀족적 특권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 했다. 그들은 스스로 귀족신분이라 자칭했고 ‘소러시아 귀족단‘이라는 이 용어는 18세기 중반 이후 공식용어에서 점점 더 널리 사용되었다. 코자크 장교들은 리투아니아 기본법 가운데 귀족의 권리와 특권에 대한 규정들을 자신들에게 적용함으로써 폴란드 귀족층이 누렸던 똑같은 권리를 우크라니아의 체제와 생활에서도 차지하려 했다. - P363

우크라이나의 정파들과 정당들은 원칙적으로 연방 제도가 미래를 위해 가장 유용한 삶의 형태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우크라이나 정체성에 대해 비우호적이고 한마디로 적대적인 온갖 세력들이, 러시아 국가의 통일성과 분리불가성을 옹호했던 온갖 세력들이 연방제라는 보호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연방제를 지지하고 있엇는데, 그 목적은 오직 하나, 곧 러시아 제국의 유산과 러시아 제국의 통일성이라는 노선을 내세워 (우크라이나의) 국가건설과 경제건설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 P61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2-05-22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513쪽을 넘어서는 두툼한 역사서, 겨울호랑이님.발췌해주신 문장으로 살짝살짝.간만보고 갑니다^^;,항상 깊게 꾸준히.읽으시는.겨울호랑이님께 감탄사를.맘 속으로 연발하고 가게됩니다. 형제단은 말그대로 brothers뉘앙스인 걸까요?^^;

겨울호랑이 2022-05-22 13:5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얄라얄라님. 말씀하신 형제단은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으로 일종의 비밀결사 조직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는 18세기 폴란드-러시아 분할 점령 이후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주된 흐름으로 가톨릭-정교회의 통합교단에 대한 정교회 차원에서의 대응과 함께 교육, 출판 등을 통한 문화투쟁이 그려집니다. 한길 그레이트 문고에서 출판된 셰브첸코의 <유랑시인>이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소개되구요. 우크라이나 역사를 잘 알기 위해서는 더 깊게 공부해야겠지만, 대략 이 정도로 큰 줄기를 잡은 독서였습니다. ^^:)

2022-05-23 0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3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