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 1 -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제2판 근대세계체제 1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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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세계의 징표는 그 안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의 상상력과 억압받는 자들의 단호한 반대이다. 착취 그리고 착취를 불가피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대한 거부는 근대의 끊임없는 모순을 이루고 있는데, 이 둘은 20세기에도 그 절정에 도달하기는  까마득한 하나의 변증법 속에 서로 결합되어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545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1 The Modern World-system>은 경제사(經濟史)의 관점에서 근대세계사를 조망한 책이다. 중세 말부터 시작해서 20세기 초반까지 다루는 <근대세계체제>의 전체를 통해 우리는 군주, 영주, 부르주아지 등의 개별 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한 경제적 행위들이 도시국가, 왕국, 제국의 체제를 변경시켰는가, 그 결과로 핵심부와 주변부의 이동과 이들의 관계를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게 된다. <근대세계체제 1>은 그 시작이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유럽 세계경제(European world-economy)라 할 만한 것이 생겨났다. 그것은 제국은 아니었지만 대제국만큼이나 넓었으며 제국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세계에서는 실로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사회체제였으며, 바로 이 점이 근대 세계체제(modern world-system)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그것은 제국, 도시국가, 민족국가 등과 달리 경제적 실체이지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사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 범위 안에 제국들, 도시국가들 그리고 이제 막 등장하는 "민족국가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체제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경제"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국은 하나의 정치적 단위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33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 1>에서 우리는 제국(帝國 Empire)과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을 구분해야 한다. 단순히 여러 나라들의 연합체, 왕중의 왕(king of king)인 황제(皇帝)가 다스리는 나라인 제국과는 달리 근대체제를 형성하는 제국주의는 '핵심부-주변부'의 불평등한 자본주의적 분업(分業)을 의미하기에 이들은  차이가 있다. 


 로마 제국의 골격은 희미한 어떤 기억으로 잔존했으며, 그 기억은 주로 하나의 공통된 교회에 의하여 중세적 현실로 이어졌다. 이와는 달리 중국인들은 비록 약화된 것이기는 했지만 제국의 정치구조를 그럭저럭 유지해나갈 수가 있었다. 이것이 봉건체제와 녹봉제적 관료체제에 입각한 세계제국 사이의 차이였다. 그 결과 중국은 여러 면에서 유럽보다 더 발전된 경제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1,000여 년에 걸친 농민 착취가 그만큼 덜했으리라고 짐작되고도 남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에다가 또한 좀더 나중에 이 두 지역에서 추진된 농업경영의 차이, 즉 유럽은 가축 사육과 밀 경작 쪽으로, 중국은 쌀 경작 쪽으로 나아간 점을 덧붙여야만 하겠다. 쌀 경작에는 공간이 덜 필요했지만 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으므로 장기간에 걸친 위기는 두 체제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타격을 주었다. 유럽은 중국보다 지리적으로 팽창하는 것이 더욱 절실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105


 제국의 중심부와 변경에 적용되는 법(法)이 고대제국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면, 제국주의에서 핵심부와 주변부의 역할(role)은 차별적이었다. 녹봉제적 관료체제에 의해 유지된 고대제국과 자본주의적 관료체제에 의해 유지된 근대 유럽 제국. 이러한 제국주의는 어떻게 출현했는가? 이것이 근대세계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첫 출발점이 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중세말 유럽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과도한 영주의 농민계층 수탈과 착취, 그리고 이어지는 농민반란 여기에 더해 14세기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의 유행은 도시국가로 연결된 중세 유럽의 경제질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유럽사회가 택한 돌파구는 '팽창'이었다.


 만성적인 과도한 착취와 그 결과로 일어난 반란들 때문에 경제적 침체가 먼저 있었고, 그뒤에 식량 부족과 역병이라는 두 요인에 기후적 요인이 더해졌다고 보는 경우, 사회물리학적 콩종크튀르가 어떻게 "위기"의 정도를 심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널리 퍼져나간 전염병의 풍토병화가 거꾸로 위기를 심화시켰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땅덩어리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사람 수가 적어지면 그만큼 식량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했을 테지만, 이는 목장으로의 전환과 그에 따른 칼로리 산출량의 감소를 또한 의미했다. 이리하여 인구 감소 역시 풍토적 현상이 되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64


 우리는 14-15세기 영주계층의 수입 감소라는 핵심적 문제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M.M. 포스턴은 수입 감소의 결과 나타난 영국 귀족들의 행동을 "악당행위(ganfsterism)"라고 불렀는데, 말인즉 소득수준의 감소를 메꾸기 위하여 불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현상이 스웨덴, 덴마크,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폭력행위의 한 형태가 바로 팽창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80


 팽창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금 혜택을 통한 자본 축적과 재투자는 초과이윤을 발생시켰으며, 16세기 합스부르크 제국를 지탱하던 정치적 구조 - 관료제 - 에 의해 이윤을 핵심부로 효과적으로 이전시킬 수 있었고, 이전된 이윤은 축적되고 재투자를 통해 팽창을 위한 동력은 커져갔다.  그렇지만, 그 동력은 한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었다. 관료제가 핵심부로 이윤을 이전시키는 구심력이라면, 제국 유지를 위한 군사비 지출은 주변부로 향하는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구심력과 원심력의 상반된 힘의 작용 속에서 제국의 체제는 팽창해 나갔다.


 제국의 정치적 중앙집권화는 그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었다. 강점이라는 것은 그것이 강압(공납과 과세)을 통해서 그리고 교역의 독점적 이익을 통해서 주변부에서 중심부로의 경제적 흐름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약점은 그 정치적 구조 때문에 필요했던 관료제가 너무나 많은 이윤을 거두어들이게 마련이라는 데에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억압과 착취가 반란을 부르고 또 이것이 군사적 지출을 증대시켰기 때문이다. 정치적 제국들은 경제적 지배의 원시적 수단이다. 말썽 많은 정치적 상부구조의 "낭비"를 없앰으로써 더 많은 잉여가 하층에서 상층으로,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다수에서 소수로 흘러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을 발명한 것이야말로 근대세계가 이룩한 사회적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34


 인플레이션은 소득의 재분배 - 유럽 세계경제가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복잡한 재분배 - 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치적으로 취약한 부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한 방식이었으며,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이 축적된 자본은 누군가에 의해서 다시 투자될 수 있었다. 특히 지주들은 농민들로부터 돈을 끌어내는 새로운 방식을 줄곧 찾고 있었다. 기억해둬야 할 점인데, 그와 같은 주장은 초과이윤이 존재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이 투자를 자극했다는 것이기도 하다.(p134)... 인플레이션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요된 저축, 따라서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이었고, 이러한 이윤을 세계경제 체제를 통해서, 주변부 및 반주변부로부터 우리가 세계경제의 신흥 핵심지역이라고 불러온 곳으로 불균등하게 배분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135


 이같은 상황 속에서 포르투갈이 앞장서고, 에스파냐에 의해 본격화된 제국주의 팽창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관료제', 경제적으로는 '노동분업'을 활용하여 불균등한 팽창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정치와 경제의 효과적인 결합을 통해 보다 많은 수익을 끌어당길 수 있었기에, 결국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곳에서 중앙집권화가 잘 되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정치와 경제는 한 몸처럼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의 제국들은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1450년 당시에 유럽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등장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다른 곳에는 그러한 무대가 없었다. 이 체제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제도, 즉 어느 일정 지역 안에 자리잡은 "세계적" 범위의 분업과 관료제적인 국가기구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106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범세계적인 노동분업 위에 구축되었는데, 이 노동분업에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범세계적인 노동분업 위에 구축되었는데, 이 노동분업에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다양한 영역들(핵심부, 반주변부, 주변부)은 특별한 경제적 역할을 떠맡았고, 상이한 계급구조를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 상이한 노동통제 방식을 발달시켰고, 그 체제의 작동으로부터 불균등하게 이득을 얻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활동은 주로 국가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국가들은 세계경제 안에서 떠맡은 다양한 역할의 결과로 제각기 상이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중 핵심부 국가들이 가장 중앙집권화되어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249


  <근대세계체제 1>에서 월러스틴은 정치적 범위와 경제적 범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핵심부-주변부'의 구조 안에서 정치적 권력의 작동은 핵심부 전역과 주변부의 일부로 한정된다. 주변부 외곽에 대한 정치권력의 공백은 끊임없이 자본가들의 진출을 자극하였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보다 더 일찍. 더 넓게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연준다. 역사적으로 영국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 EIC)의 인도지배가 대영제국 이전에 있었다는 점은 이러한 월러스틴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자본주의란, 경제적 소득은 "개인의" 수중에 나누어 주면서, 경제적 손실은 정치체가 줄곧 감당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오히려 나의 주장은, 하나의 경제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는 경제적 요소들이 어느 한 정치체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될 수 있는 범위보다 더 넓은 영역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가들에게 구조적으로 뒷받침되는 행동의 자유를 부여한다. 몹시 편중된 그 보수의 분배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세계체제의 부단한 경제적 팽창을 가능케 해왔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533


 자본주의는 세계제국의 구조 안에서는 번영할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로마에서 출현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이다. 상인들은 단일한 국가구조 안에서보다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정치적으로 한층 수월하게 다양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단일 국가의 지배자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압력에 대응해야만 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밀이 단일한 민족국가의 구조 안에서보다는 비(非)제국적인 세계경제 구조 안에서의 노동분업의 확립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199


  외부로 팽창하려는 자본가들의 팽창에 대해 에스파냐 제국의 제도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충분한 정치적 시스템의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팽창은 에스파냐의 광활한 아메리카 식민지 내에서 다양한 이해관계 충돌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갈등 속에서 체제의 패권은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말았다.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관료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제국의 핵심부로 충분한 힘이 쌓이지 않는 반면, 제국의 주변부는 자본가들에 의해 통제되는 상황에서 제국의 쇠락은 당연한 결말이었다. 


 해외팽창이 교역의 확대로 이윤을 얻게 되는 상인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왕위의 영예와 수입을 확보하고자 하는 군주들의 이해관계와 전통적으로 맞물려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베리아인들이 탐험에 나서게 된 최초의 동기가 주로 귀족들의 이해관계, 특히 토지를 가지지 못한 그 악명 높은 "작은 아들들"의 이해관계에서 비롯했으며, 좀더 분별 있는 상인들이 탐험에 열중하게 된 것은 교역망이 일단 작동을 시작한 연후의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81


 에스파냐 제국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을까? 제국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아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쾨니히스버거가 말하고 있듯이, "에스파냐 제국의 근본적 약점은..... 과세의 기반이 협소했다는 점이다. 카스티야와 은은 제국의 재정을 지원하고 제국을 보호했다 ; 그밖의 영토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방관자들이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제국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그것은 제국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인 것이다. 만약 카탈루냐인들이 카스티야인들과 함께 하나의 국가 안에 통합되어 있었더라면 그리고 만약 카를 5세의 제국적 야망이 카스티야를 쇠진시키지 않고, 또 그로 하여금 그 제국의 다른 부분들과 불가피한 이해관계의 갈등, 자멸적이었던 그 갈등을 빚게 하지 않았더라면, 에스파냐는 사실 유럽 세계경제에서 핵심 국가가 될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과잉 팽창은 카를 5세와 그 후계자들을 지쳐버리게 할 따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278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에서 거대한 관료기구를 구축할 만한 행정적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국들의 낡은 방편, 즉 국왕과 에스파냐 정착민들 사이의 중개자로서 지역의 족장들을 그 정치체제에 끌어들이는 편법을 사용했다. 에스파냐는 또 자신의 정착민들을 완전히 통제할 힘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의 정치적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스파냐는 많은 경제적 양보를 했다. 이런 것들 중 하나는 인디오들이 가축을 기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경제활동의 독립적 기반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가축을 기르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도 있었을 행위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289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정치제도(관료제)가 이베리아 반도의 두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면, 이로부터 얻어진 교훈은 명백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부르주아지와 정치권력(군주, 귀족)과의 명확한 관계설정이 필요했다. 보다 성공적인 팽창을 위해서는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이익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는 혁명(革命 revolution)의 모습으로 네덜란드에서 먼저 출현했다. 이제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가 시작된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성공은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을 가능하게 한 정치적 틀은 무엇이었는가? 16세기 후반기는 암스테르담의 부상만이 아니라 이른바 네덜란드 혁명이 일어난 시기인데, 네덜란드 혁명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는 그 사회적 내용만큼이나 그 모습이 불분명하다. 먼저 그것은 혁명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혁명이었다면 민족혁명이었는가, 부르주아 혁명이었는가? 그리고 이 두 개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p312)... 나는 혁명의 발발에 대한 열쇠는 많은 "네덜란드" 귀족들이 군주는 자기들의 대변자가 아니며, 군주의 정책들은 중단기적으로 볼 때 그들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것이고, 군주가 정책을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능력 밖의 일이었다는 것을 갑자기 우려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들은 "민족주의적" 저항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314


 투쟁은 자신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생각하는 한 계급과 다른 모든 신분 사이의 투쟁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세계체제에서는 사실 이것이 통상적인 상황이었다. 자본가 계급(부르주아지)은 보편적 계급을 자처해왔으며, 두 적대자들에 맞서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생활을 조직하고자 노력해왔다. 한편에는 전통적인 신분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경제적 기능과의 상관관계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신분 구분의 유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구조를 이왕이면 비계급적인 구조로 규정하려고 든다. 부르주아지가 자의식을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서 활동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1> , p537

16세기 유럽의 세계경제는 전체적으로 단일계급 체제가 되려는 경향을 띠었다. 그것은 경제적 팽창과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서 이익을 얻고 있는 역동적인 세력들, 특히 핵심국가 내의 세력들이었는데, 이들은 계급의식을 갖추는 방향으로, 다시 말해서 주로 그 경제 내에서의 그들의 공통적인 역할에 따라 규정되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 정치적 장 안에서 활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P541

국가? 국가란 무엇이었는가? 이 당시에 국가는 군주, 그 이름이 칭송받고 위엄을 지키면서 점차로 신민들과 멀어져간 군주였다. 그리고 국가는 특별한 성격과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독특한 사회집단으로 등장한 관료제였다. - P57

금은(金銀)은 하나의 보루였다. 가치의 측정과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언제든 하나의 상품으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금은의 사용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금은이 없었다면, 이윤이 다양한 형태의 거치된 실현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유럽이 집단적인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 P80

우리는 근대 전 시기를 통해서 국가권력이 장기적으로 증대했음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적어도 핵심부 국가들 내에서는, 이처럼 증대된 중앙집권화와 내부 통제의 장기적인 과정을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가속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의 국가기구 관리자인 국왕들은 어떻게 그들 자신의 힘을 강화시켰는가? 그들은 관료제화, 권력의 독점, 정통성의 창출 그리고 신민의 동질화라는 네 가지 주요 메커니즘을 이용했다. - P209

근대세계사의 지속적인 주제들 중의 하나는 "민족주의(nationalism)"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사이의 시소놀이다... "제2차" 16세기의 산업변화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새로운 기술이나 사회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공장과 대량 생산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p347)... 핵심적인 변화는 공업의 지리적 배치에서 일어났다. 대략 1550년경부터 공업활동은 "북서부" 유럽의 몇몇 국가에 집중되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쇠퇴가 카를 5세 제국의 영토들에 차례차례로 놀라울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 - P348

유럽이 열심히 금은을 축적했던 것을 돌이켜 볼 때, 이처럼 공식적인 무역수지 불균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은 실로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유럽이 아시아가 제공하는 상품들을 원했다면, 이것은 그들이 치러야만 하는 대가였을 것이다. 이것이 나타내는 한 가지 본질적인 의미는 이 시기에 아시아가 유럽 세계경제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는 "보통 아시아 민족들이 세워놓은 조건과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몇몇 식민활동의 거점들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유럽인들은 모두 그곳에서 [아시아인들의] 묵인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유럽의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군사적 우위가 단지 해군력의 우위에 불과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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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3-23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독이세요? ^^

겨울호랑이 2022-03-23 20:15   좋아요 1 | URL
네 예전에 페이퍼로 드문드문 정리했었는데, 이번에 리뷰로 4편까지 한 호흡으로 정리해 보려합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