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이어 "이런 분들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서로 경쟁해서 원칙 있는 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노 후보의 발언 직후 연설장에 않아 있던 정 대표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으며 노 후보는 발언 직후 연설장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노 후보 발언 직후 종로 4가 한 음식점에서 국민통합21 주요 당직자들을 소집해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노 후보가 단일화 정신을 훼손한 채 이미 대통령이 된 것을 전제로 전횡을 하는 듯한 졸렬함을 드러냈다"며 지지를 철회키로 의견을 모았다. 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2>, p318/642


 오늘 새벽의 안철수-윤석열의 단일화 뉴스는 선거(사전투표) 전날 이뤄진 전격적인 선언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이로부터 2002년 12월 18일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결렬화를 떠올리는 듯하다. 선거에 미칠 파급력면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단일화 성사와 파기는 원심력과 구심력처럼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정치인 안철수의 '새정치' 여정의 끝에서 20여년 전 홍사덕(洪思德, 1943~2020)의 무지개 연합을 떠올리게 된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정치 자체의 위기'를 걱정하는 양대 세력에게 2000년 4월 13일로 예정된 제16대 총선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4.13 총선을 염두에 둔 정치적 이합집산이 활발해진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을 받은 이는 뛰어난 언변과 수려한 용모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홍사덕이었다.(p38)... 홍사덕은 1월 8일자 <한겨레>인터뷰에서 "국운을 개척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무지개 연합을 만든다"고 선언했고, 그 결과 1월 19일 '무파벌/지역타파/개혁신진'을 표방한 '무지개연합'을 공식 출범시켰다. 그러나 그는 출범식 선언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인 1월 27일에 한나라당에 입당함으로써 그의 홈페이지에는 격한 비판이 빗발쳤다.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1>, p39/618


 10년 넘도록 실체가 모호한 새정치를 표방하면서 여러 차례 번복하고, 단일화 이후 자신의 몸값과 안랩 주가를 올렸던 1,900억대 재력가 안철수와 20~30억이 없어 자신의 뜻을 접고 한나라당에 들어간 홍사덕을 직접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도 생각하게 되지만, 적어도 국민과의 약속을 눈깜박할 사이에 뒤집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겨진다. 안철수와 홍사덕을 통해 우리나라 정치에서 양당제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와 함께 다당제 정치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안철수의 재산을 생각하면 그에게 부족한 것이 돈은 아니었을텐데, 그럼에도 그가 독자적으로 완주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홍사덕의 무지개연합이 보여준 한계점은 한국정치에서 '돈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점이라면, 안철수의 새정치가 보여준 한계점은 무엇일까. 정치테마주로서 '안랩'의 주가 부양이 정치인 안철수가 아닌 경영인 안철수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일까. 정말 잘 모르겠다...


 PS. 홍사덕과 기자들과의 대담 내용을 보면서 우리나라 기자들도 저런 깊이있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되는 것을 보면 사회가 계속 발전해온 것만은 아닌 듯하다.


 정치가 현실인 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1주일 만에 뒤집어도 된다는 것까지 의미하진 않을 게다. 그와 같은 '변절'에 대해 홍사덕 자신이 내세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홍사덕은 기자들과 주고받은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 : 자신이 생각하는 당을 만들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답 : 어림짐작 20억, 넉넉히 계산하면 30억이다.

 문 : 결국 20억이 없어서 한나라당을 선택한 건가?

 답 : 좋은 뜻 있는 사람에겐 돈이 따르지 않는 것이다.

 문 : 무지개 연합을 시도했지만 돈이 안 모여서 한나라당으로 갔다고 했는데, 한나라당으로 가니 돈 사정이 좀 풀리나?

 답 : 여기는 큰살림이니까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문 : 홍사덕 위원장은 말을 참 잘한다. 그런데 말솜씨보다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다. 아무리 말솜씨가 좋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궁색하면 말같이 들리지 않는다. 무지개연합이라는 새 정치를 주창하다가 한나라당이라는 헌 정치를 하려 하니 요즘 당신이 하는 말이 말같지 않다는 생각 안 해보았나? 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1>, p4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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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2-03-06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당신이 하는 말이 말 같지 않다-
사이다:-).
현재 언론도 언젠가는 부패도가 내려갈 터닝포인트를 갖게 되지 않을까요. 막연하게라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06 12:50   좋아요 1 | URL
저도 2000년의 언론 기자가 이렇게 핵심을 잡아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시원함과 함께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함께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는 MBC 100분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언론 현실에 대해 밝힌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레거시 미디어가 개선되기를 바라기보다 뉴미디어에 의한 대체가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갱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