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말아놓았던 지나간 세월은 풀어지고 연못가 그 자리로 돌아온 서희와 봉순이는 한 사내를 의식 밖으로 몰아내 버린다. 공동의 기억이란 순수한 것이다. 특히 어린 날의 그 공동의 기억 때문에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이라는 의식의 유대가 지속되는지도 모를 일이라면, 이들이 비록 혈육이 아니요 신분의 도랑이 깊다 하여도, 서희가 남다른 아집의 여자라 하여도 이들의 해후가 슬프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7> , p153/514


 토지 독서챌린지 13주차. <토지 7>의 처음에서 간도로 떠나올 때 서희네와 헤어지게 된 봉순은 다시 이들과 만나게 된다. 혜관 스님과 함께 나타난 봉순. 오랫만에 만난 이들이지만, 흐른 시간이 적지 않았던 만큼 이들 사이에 놓여진 간격 또한 너무도 멀었다. 예전에 아기씨 서희를 지키기 위해 호위무사로 의기투합한 길상과 봉순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기녀(妓女) 기화(紀花)가 된 봉순. 서희의 남편이 된 길상. 애기씨에서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의 아내가 된 서희. 봉순은 이들과의 만남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봉순이...... 하인하고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거는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야. 이곳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나를 바라본다. 고향 사람들은 힐난의 표정으로 내 얼굴을 외면한다. 모두들 나를 격하하려 들고 있다. 봉순이 그 아이는 더욱더 그러하겠구나. 최참판네 가문이 시궁창에 던져졌다 생각할 게 아니냐? 시녀였던 그 아이가 사모하던 하인이 지금은 내 남편이야.' _ 박경리, <토지 7> , p173/614


 봉순의 생각을 서희도 모를리가 없기에 서희 역시 봉순을 편하게 대할 수가 없다. 은연중에 가졌을 봉순에 대한 미안함, 과거 자신을 돌봐주었던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애써 뭉개며 자존심을 세우는 서희. 이러한 서희의 모습에서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1775 ~ 1817)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샬럿이 말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가문이며 재산,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아.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그분은 오만할 권리가 있어."... "오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메리가 자신의 깊은 사고력을 뽐내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_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 p22/438


 모든 것을 다 갖춘 이가 자신의 자질에 대해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오만. 샬럿의 말에 따르면 여러 면에서 서희는 오만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거기에 더해 메리의 말처럼 오만한 것이 일반적인 성향이라고 한다면, 봉순과 대면하는 서희가 가졌을 오만함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거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다시피 간도로 건너온 서희. 이제는 재산을 쌓아 과거 최참판댁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된 그는 누구보다도 오만할만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그것이 권리가 되어 남들에게 '허영'으로 보여졌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길상은 고독했다. 고독한 결혼이었다. 한 사나이로서의 자유는 날개죽지가 부러졌다.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인간이란 습관을 뛰어넘기 어려운 조물인지 모른다. 그 콧대 센 최서희는 어느 부인네 이상으로 공손했고, 지순하기만 하던 길상은 다분히 거칠어졌는데.  _ 박경리, <토지 7> , p171/514


 물론, 부부간의 문제가 어느 한 편의 문제인 경우는 극히 드물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한때 '아씨- 하인' 관계가 이들 부부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면에서 오만한 서희와 '콧대 센 아기씨'라는 편견을 가진 길상 내외는 다른 면에서 한국판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들이 아닐까 한다. 다만, <오만과 편견>에서는 오만한 피츠윌리엄 다아시와 그에게 편견을 가진 엘리자베스 베넷이 결혼을 하면서 신데렐라와 같은 동화같은 결말로 나아가지만, 후자는 극적인 결혼 이후 점차 식어가는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판이 보다 현실적이라 하겠다. 


 이와 함께 <토지>의 또다른 커플 '윤이병 - 금녀'는 다른 의미에서 이루어지지 못한다. 어린 시절 서로 좋아했고, 그 결과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으나 현실에서 보여준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깨진 사랑의 전형을 이들 사이에서 떠올리게 된다.


 아무튼 금녀는 이제 윤이병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핀 꽃이었다. 손에 닿지 않기 때문에 한층 요염하게 핀 꽃이었고, 욕망으로써도 꺾을 수 없는 꽃을 방편으로 어찌 꺾을 수 있을 것인가.(p202)... 금녀를 좋아한 건 사실이야. 금녀의 집안이 망하지 않았다면 결혼을 했을지 몰라. 처가의 후원을 받아서 일본으로 유학하고, 결국 금녀도 나도 불운했던 거야. 교회당에 나오는 처녀 중에 금녀가 젤 예뻤지. 감히 김두수 같은 놈, 언감생심이지. 찬송가를 부를 때 금녀는 천사 같았어. 그런 금녀가 점박이 병신을 좋아해? 아닐 거야. _ 박경리, <토지 7> , p207/514


 이처럼 이번 주에 읽은 <토지 7>에서는 과거와는 달라진 이들의 사랑 이야기들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과 같이 여러 사연을 가진 이들의 사랑이 모두 같은 밝기를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어둡고 힘든 시기에 이들이 겪는 사랑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진다...


 시기와 조롱을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추는 뭇시선 속에 상처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척한다. 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고 하질 못하는가. _ 박경리, <토지 7> , p172/51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10-10 0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 읽었던 토지에서는 길상과 서희의 관계가 식어가는게 이해가 어려웠었는데 지금은 너무 잘 이해돼서 좀 슬퍼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1-10-10 08:14   좋아요 0 | URL
저는 뒤늦게 읽어서 그들의 관계가 잘 이해되었지만, 만약 저도 결혼 전에 읽었다면 안타깝게만 느꼈을 듯 합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