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마리아 신부는 스페인 내전 때 공화파의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체포되어 처형될 뻔할 정도로 전체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프랑코가 가톨릭을 자신의 통치 이념의 한 축으로 삼은 것은 그에겐 천행이었다. 그야말로 "교회를 친구로 둔 민중은 운이 좋다". 그는 이 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라사트-몬드라곤 가톨릭 액션'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는 좌파 사상의 영향(특히 초기 마르크스주의)을 받았을지언정, 폭력혁명은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_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티아리에타, <호세 마리아신부의 생각>, p266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기반을 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협동조합인 몬드라곤 협동조합(Mondragon Corporation Cooperative)과 창시자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Jose Maria Arizmendiarrieta Madariaga, 1915 ~ 1976). 사회적 기업 또는 협동조합의 롤모델로 널리 알려진 조합과 창시자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 이들만큼 이질적인 조합도 없을 듯하다. 국민 진영의 프랑코(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odulo Franco y Bahamonde, 1892 ~ 1975)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던 호세 마리아 신부가 공화정부군 편의 중심지였던 바스크(Basque)지역에서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고 만들어진 몬드라곤 협동조합. 


 칸타브리아 해안을 따라 펼쳐진 북부 지역은 국민군에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였고, 마드리드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속히 끝내려고 한 네 차례의 연이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난 뒤 국민군의 자연스러운 공격 목표가 되었다... 병력에서 우위에 서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적의 취약 지점을 제압한 다음, 그곳 병력을 더 어려운 목표물인 중부 지역 공격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아라곤과 안달루시아 전선은 공화 정부가 비교적 빠르게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였던 북부 해안 지역이 분명한 공격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397 


 가톨릭 신부이면서도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호세 마리아 신부와 바스크 지역으로 처음부터 공화정부 지지지역이였음에도 개전 초기인 1937년 3월 공세에서 국민군에게 점령당했던 몬드라곤(Mondrgon).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성공은 어쩌면 스페인 내전의  이념 갈등을 개인적/지역적으로 직접 체험한 이들의 화합이 보이지 않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를 <스페인 내전>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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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0-29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것 참 특이하네요...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이 가톨릭 사제단
을 가혹하게 처형하고 모욕해서 종교계에서
반발이 격렬했다고 하던데 -

그 중에서도 깨인 사제분들은 프랑코 총통
에게 저항했었군요.

겨울호랑이 2020-10-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가톨릭 사제여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이도 있을 것이며, 바스크 민족이면서도 프랑코의 이념에 동조한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호세 마리아 신부가 바스크 족이었던 것도 저항의 이유 중 하나였이리라고도 생각됩니다만, 이념 전쟁을 단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