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靑田) 양식을 통해 한국적 산수화를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청전 이상범(李象範, 18 ~ 1972)의 작품을 느낄 수 있는 도록. 40호 전지 가격의 그림이 1 ~ 2억으로 평가받는 수묵화 대가의 그림 114점이 생생하게 수록되어 있다. 도록에 수록된 그림 중 다수가 1930년대 후반 이후 1960년대까지 그려진 것으로 이 시기는 작가가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금강산, 설악산 등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과 자연의 전체적인 형태감 재현에 집중한 해방 이후 산수화, 고성(古城)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주로 그려진 시기에 해당한다. 안개에 싸인 듯 신비한 느낌을 풍기는 산과 함께 있는 지게를 진 농부, 허름한 초가집 등은 이 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닌 아름다운 현실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청전 자신은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장기 말소사건) 다음 날 나는 경기도 경찰부로 연행되어 갔다.
내가 경기도 경찰부로 풀려난 날로부터 1945년 8월까지 나의 칩거 생활을 계속되었다. <신동아>(1971.7) p216 ~ 229
그러나, <신동아>와의 인터뷰와는 달리 청전은 1940년대 칩거하지 않았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황국신민화와 군국주의를 선양하기 위한 전람회 심사위원이나 국방헌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에 빠짐없이 출품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즐거 사용한 필법과 산수화풍이 실은 일본 남화풍의 잔영으로 해방후 유행했던 전형적 기법이라는 사실도 함께 기록한다.
1930년대 일본 문화통치에 대한 저항자가 1940년대 친일로 전향한 사례가 청전의 경우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근현대사의 많은 인재(人材)들의 변절과 이들이 해방 이후 각 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청전의 그림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예술과 예술가는 분리되어 평가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고요하면서도 힘찬, 세밀하게 평화로운 한국의 자연을 담은 청전의 그림은 그림 밖의 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