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각 : 책을 보고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어요.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언젠가 죽기 때문에, 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죽음을 반가운 손님으로 받아들이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이에요.
나[연의]의 생각 : 할아버지는 참 좋으시겠어요. "저도 이모 보고 싶은데..." 아내 잘 만나시고 하늘나라에서도 잘 지내세요.
[아빠]의 생각 :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챙겨가는 물건들은 비록 그쪽에서는 필요없는 것들 뿐이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기다렸기에 두려움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 할아버지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하게 됩니다.
학교 과제로 나오는 [가족과 함께 하는 독서] 중 이번에 <여행 가는 날>을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리고, 그 손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할아버지. 이것저것 챙겨서 좋은 날 떠나는 할아버지는 사실은 저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지만 낯선 손님과의 대화 속에서 무언가 보통의 여행이 아님을 알아가게 되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동화임에도 죽음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룬 <여행 가는 날>. 이번 페이퍼에서는 [아빠]의 생각에서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 합니다.
"걱정 말거라. 나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란다." <여행 가는 날> 中
<여행 가는 날>은 두 가지 면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책입다. 하나는 '뽀얀 안개같은 손님'으로 표현되는 저승사자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할아버지의 자세입니다. <신과 함께>의 저승 3차사로 알려진 저승사자의 존재는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공포의 신(神)이지만, <여행 가는 날>에는 마치 '꼬마유령 캐스퍼'처럼 친근하게 등장합니다. 친근한 여행 동반자로서의 저승사자를 통해 독자들은 죽음이 결코 두려운 존재만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명신손님처럼 멀리 낯선 땅에 깃들어 있으면서 긴 여행을 통해 이 땅을 찾아오는 신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어둠의 신 저승사자다. 그들은 저 멀리 저승 황천에 살면서 인간 세상으로 훌쩍 건너와서는 수명이 다한 사람들을, 또는 신의 노여움을 산 사람들을 왈칵 붙잡아서 아득한 어둠의 땅으로 데려간다. 한번 그네들에게 붙잡히면 꼼짝없이 모든 것을 다 잃어야 하는 공포의 대상이 저승사자다.(p134)... 망자를 잡아가는 삼차사는 일직사자와 월직사자, 강림도령이라 돼 있는데, 강림도령의 활약이 두드러진다.(p180) <살아있는 한국 신화> 中
"이제야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할아버지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어요. 손님이 왔으니 할아버지는 이제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해요. 뽀얀 안개같은 이 손님은 할아버지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러 왔답니다. <여행 가는 날> 中
또한, <여행 가는 날>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은 낯선 손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손님을 기다렸다는 할아버지의 말 속에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가 <노년에 관하여 Cato Maior de Senectute> 했던 죽음이 편한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 그것은 우리 나이의 사람들을 가장 불안하고 걱정스럽게 하는 것 같네. 죽음이 노년에서 멀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토록 오래 살아오면서도 노인이 죽음은 무시되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 왜냐하면 죽음이 영혼을 영생할 어떤 곳으로 인도한다면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네.(p78)... 내가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치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고는 항구에 입항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p81) <노년에 관하여> 中
또는 남겨진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할아버지의 말 속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 ~ 1986)가 <노년 La Vieillesse>에서 말한 '죽음은 주변인에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보부아르가 말한 죽음에 대한 주변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죽음 앞의 인간 L'homme Devant la Mort >에 자세히 나오지만, 이미 여러 페이퍼에서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짚고만 넘어가겠습니다.
"아, 그렇지! 가는 길에 이 동전으로 통닭을 사 가자. 오랜만에 함께 둘러앉아서 먹으면 눈물 나게 맛있을 거야." "그런데 할아버지, 안 슬퍼요?" "슬프기는, 미안하지. 남겨진 사람들이 슬퍼할까 봐 그게 미안해."<여행 가는 날> 中
노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운명이 아니다. 죽음은 이제 임박한 것, 개인적인 사건이다.(p614)... 죽음은 사르트르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라고 부르는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노년을 이 범주에 넣었었다. 대자는 거기에 도달할 수도, 그것을 향해 자신을 투사시킬 수도 없다. 죽음은 내 가능성들의 외적인 한계이다... 내가 죽게 되면 그 죽음은 타인에게 죽음인 것이지 나 자신에게 죽음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타인들이 나를 보는 관점을 취하여 내가 늙는 것을 알듯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 앎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며 외적으로 제기된 것이다.(p615)... 사실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죽음은 가까이도 멀리도 있지 않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바란다는 것, 혹은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긍정의 의미다.(p617) <노년> 中
<여행 가는 날>은 이와 같이 죽음을 잘 준비해서 맞이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준비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연의]의 생각에도 살짝 언급이 되었지만, 사실 몇 개월 전에 연의는 이모를, 연의 엄마는 언니를 긴 여행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의 의미가 저희 가족에게 깊숙하게 와 닿습니다.
<여행 가는 날>에서 할아버지는 여행 끝에 헤어진 부모님과 아내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여행을 떠납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우리는 할아버지가 만남을 이뤘는지에 대한 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가바드 기타 Bhagavadgita>에서 스승 크리슈나가 왕자이자 제자인 아르주나에게 한 이야기 속에서 할아버지 여행의 끝을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지향도 그곳을 향해야하지 않을까요.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 하루 죽어간다는 다른 말이기에.
목숨이 끝나는 순간에 나만을 기억하며 육신을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나의 지경에 이를 것이니, 거기에는 의심이 없느니라. 어쨌거나 목숨이 끝나는 순간 어떤 성질의 것을 기억하며 떠났거나 간에 틀림없이 그대로 되는 것이니, 쿤티의 아들아 그것은 일생을 거기 젖어 있었기 때문이니라.(p331) <바가바드 기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