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거주불능 지구 - 한계치를 넘어 종말로 치닫는 21세기 기후재난 시나리오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지음, 김재경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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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는 개별 허리케인, 개별 폭염, 개별 기근, 개별 전쟁 등 구지적인 재해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립된 단서 같은 게 아니다. 지구온난화는 가해자라기보다 공모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기후 속에서 살아가면서 온갖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변화된 기후가 다시 또 모든 인간과 인간의 활동을 둘러싸고 있다.(p41)... 뜨거운 지구에서는 가장 빈곤한 국가들이 더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호주를 제외하고는 GDP가 낮은 국가들이 가장 극심한 기온 상승을 겪게 된다. 정작 남반구 국가들 대다수는 지금까지 지구의 대기를 그리 많이 오염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런 결과를 맞이한다.(p47)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2050 거주불능 지구 The Uninhabitable Earth: Life After Warming>의 저자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David Wallace-Wells)는 탄소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단순한 기후변화에 그치지 않고 기후재난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는 기온상승으로 인한 폭염과 해수면 상승, 가뭄과 산불 등의 증가는 사회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키고 먼저 가난한 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매우 비관적인 내용의 시나리오다. <2050 거주불능 지구>는 다른 기후변화에 대한 우울한 전망을 12가지 기후재난으로 설명하는데, <탈출기 Exodus>에서 모세(Moses, BC 1393 ~ BC 1273)가 파라오에게 예언한 10가지 재앙을 연상시키는 시나리오는 신앙심 깊은 미국인들에게 종말처럼 다가간다. 이는 다른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많은 책과 큰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2050 거주불능 지구>는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기후변화를 바라본다. 기후변화문제에 대해 결론중심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다소 독특한데, 이러한 독특함은 다른 책들과 차이를 가져온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인류가 계속 이전처럼 살아갈 수만 있다면 ‘자연‘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상당 부분 잃는다 하더라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인류가 결코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p64)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저자는 환경주의자 입장에서 기후변화를 바라보지 않는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입장에서 기후변화를 바라보기에 기후재난으로 가는 이러한 시나리오에 대해 인류 정체의 공동책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음 세대 후손에게, 마법 같은 혁신을 일으킬 기술자에게, 당장의 폭리에 집중하는 정치인에게 미루고 있다. 설령 강압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이 책에 ‘우리‘라는 단어가 강박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p331)<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저자는 기후재난에 대한 책임을 우리 모두에게 돌리는 한편,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미국 책임론에 대해 변론한다. 지구온난화가 산업화 이후 일어난 추세라는 일반의 설명에 대해 최근의 탄소배출량 현황을 근거로 서구와 미국 대신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책임을 부각시키며, 이들이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함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온난화가 산업혁명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쌓였다가 이제야 갚을 때가 된 도덕적/경제적 부채와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기 중에 배출된 탄소 중 절반 이상은 불과 지난 30년 사이에 배출됐다.(p17)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유명한 파리기후협약에서 기온 2도 상승을 최소한의 요구 조건으로 설정해 전 세계 국가의 동참을 요구한 것도 불과 2016년에 일어난 일이었다.(p76)... 트럼프의 협약 탈퇴 결정 역시 실리적인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트럼프의 실수가 궁극적으로 생산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기후변화 문제에서 주도권 잡기를 포기하자 중국의 시진핑에게 훨씬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기회와 유인이 주어졌다.(p77)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기후변화 문제에서는 확실히 중국이 거의 모든 패를 쥐고 있다. 온 세상이 존속과 번영을 위해 안정적인 기후를 필요로 하는 이상, 이미 탄소배출량 증가세가 멈췄으며 머지않아 줄어들기 시작할 미국과 유럽의 탄소배출량 궤적보다는 개발도상국의 탄소배출량궤적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p293)<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이와 함께 저자는 개인단위에서의 변화는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소비에서의 작은 변화는 자기 만족에 불과하며, 정치적인 행동만이 현재의 재난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기후변화의 고통을 감지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문제의 원인으로 개인의 무책임을 탓하는 것은 일종의 연막 술책에 가깝다. 우리는 개인의 소비 행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소비 행위가 한편으로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며 또 한편으로는 미덕을 과시할 수 있는 아주 현대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개인의 소비 선택은 거의 늘 사소한 요인에 불과하며 오히려 더 중요한 요인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p140)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선택적 소비와 웰니스 추구는 둘 다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이런 태도의 근원에는 신자유주의 정신에 의해 다시금 보장된 기본적인 약속이 깔려 있다. 바로 소비자가 정치적 참여 행위 대신 소비 행위를 통해 정치적인 성향은 물론 미덕까지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는 약속이다.(p284)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세상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두드러지게 배출하는 상위 10퍼센트가 탄소배출량을 유럽연합 평균 수준으로만 낮춰도 전 세계 탄소배출량은 35퍼센트나 떨어진다. 개인이 식단을 바꾸는 정도로는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정책을 바꾼다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유기농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진정으로 염원하는 목표가 기후를 구제하는 일이라면 투표가 훨씬 더 중요하다. 정치는 도덕적 증폭기와 같기 때문이다.(p282)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예언된 12가지 재난 중 가장 큰 재난은 ‘시스템의 붕괴‘일 것이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기후재난을 불러왔고, 이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신자유주의가 이로 인해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기후 리바이어던>의 내용을 토대로 설명한다.

기후변화는 두 가지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첫째로는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발생하며 그로 인해 일부 지역에 숨 쉴 틈조차 없는 영구적인 불경기가 닥칠 것이다. 둘째로는 전 세계적으로나 특정 정치조직 내에서나 부유한 자보다 가난한 자가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음으로써 이미 터무니없는 수준인 소득 불평등이 점점 노골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p250)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신자유주의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데 실패했다면 다음 후계자는 무엇이 등장할까?(p288)... 바로 신자유주의다. 정확히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신자유주의다.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오로지 자본의 흐름에만 관심이 있는 세계 상태가 도달할 것이다. 강박에 사로잡힌 신자유주의는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피해와 퇴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겠지만 권위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 이런 존재가 바로 ‘기후 리바이어던 Climate Leviathan‘이다.(p289)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요약하면,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저자는 현재까지 지구온난화 현상을 바탕으로 12가지 재난과 함께 암울한 디스토피아(dystopia)를 제시한다. 저자의 글에 따르면 이러한 미래에서 우리가 벗어날 길은 거의 없어 보인다. 조금 정도를 약화시키거나 시기를 늦추는 정도일뿐. 더욱 처참한 것은 이러한 미래의 끝에 현재의 불평등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신자유주의질서가 더욱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견해에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먼저, 현재 상황이 위기이니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구 유럽이 산업화를 통해 근대화를 이루었고,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제국주의 팽창의 결과로 20세기 신생 독립국들은 다시는 짓밟히지 않기 위해 산업화의 길을 선택했다. 이들 중 절대 다수가 아직도 개발도상국인 상태에서 전 인류에게 이러한 방향으로 가도록 이정표를 제시한 서구문명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탄소배출량이 절대 다수인 중국(94억 6,700만 t)과 인도(22억 7,700만 t)을 근거로 미국(51억 1,800만 t)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을 내세워 문제 해결에 중국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함을 강조하지만, 저자는 이들 국가들의 산업발전 정도와 인구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최근 한 시기에 절대치만 비교한다.(사진) 제조업을 개발도상국으로 아웃소싱(outsourcing)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글로벌 공급 체인을 구축한 현 체제에서 3.3억의 미국이 13.9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과 13.5억이 인구를 가진 인도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라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 1인당 탄소배출량이 압도적인 미국은 뒤로 물러서도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미국 예외주의‘에 불과하다.

세상에 초강대국이 미국 하나였던 시절에는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저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7년에 미국은 세계 탄소배출량의 15퍼세트만을 차지하며 미국 국경을 넘어서면 기후부인주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구온난화의 책임을 오로지 미국 공화당이나 공화당의 뒤를 봐주는 석유 회사에게만 돌리는 것은 미국 중심주의적인 생각에 가깝다(p226)... 화석연료 사용에 기업이 미치는 영향은 실재한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단기적인 이익을 좇고 기호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전 세계 노동자 및 소비자의 태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p227) <2050 거주 불능 지구> 中

또한, 개인의 소비생활 변화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저자의 말 속에서 개인의 작은 변화로는 탄소배출의 결과인 12재난 시나리오를 피할 수 없다라는 운명론적인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 함께 소비 대신 생산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 책임을 돌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큰 위험에 처해 있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저자의 입장처럼 공동책임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는 기후재난의 끝을 ‘신자유주의 질서의 공고화‘로 바라보는데, 신자유주의에서 강조하는 자유시장주의의 무한경쟁의 결과로 빚어진 기후재난에 대해 왜 사회주의/공산주의 방식의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가. 우리는 책임을 배급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시장의 규칙인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 기후 재난이라는 현실에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맞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더 많은 수익을 거둔 국가에서 보다 책임있는 비전과 부담을 선언했을 때 그때가 탈(脫)기후재난(Exodus)의 원년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우리의 작은 행동변화가 투표와 같은 정치 행동과 함께 이루어졌을 때가 바로 < 대학 大學>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며 <2050 거주불능 지구>의 리뷰를 갈무리한다.

ps.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코로나 19 재난 이후 선진국으로 제조업이 회귀한 후에 판단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향후 선진국의 제조업이 활성화되는 시기에 환경 문제가 수면 아래로 내려앉는다면, 기후변화 문제는 정치적 이슈라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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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0-04-1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구 온난화, 돌이키기엔 이젠 늦었겠죠? ㅠㅠ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이걸 고민해야겠죠?

겨울호랑이 2020-04-12 23:32   좋아요 0 | URL
지구온난화라는 문제가 수 십년동안 쌓였던 문제이니민큼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만, 우리의 작은 실천부터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