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19세기의 모든 특징들은 이미 1830년경에 드러난다. 부르즈와지는 완전히 권력을 소유하고 또한 그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귀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각하여 순전히 개인적인 생존을 유지할 뿐이다. 시민계급의 승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해진다.(p15)... 공업화의 진전이나 자본주의의 전면적 승리와 보조를 같이하는 경제적 합리주의, 역사과학/정밀과학의 발전 및 이와 결부된 사유(思惟)의 일반적 과학주의, 계속된 혁명의 실패와 그 결과 생긴 정치적 현실주의, 이 모든 것들이 낭만주의와의 거대한 싸움을 준비하는 바, 낭만주의와의 이러한 싸움이 향후 100년간의 역사를 꽉 채우게 된다.(p16)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독자층은 서로 다른 두 진영으로 분리되고 예술은 서로 대립하는 두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이때부터 모든 예술가는 반대되는 두 질서인 보수적 귀족의 세계와 진보적 부르즈와의 세계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p17)

르네쌍스 이래 점차 드러나는 근대 자본주의의 근본적 경향은 이제 어떤 전통에 의해서도 완화되지 않는 그 뚜렷하고 비타협적인 명료성 속에 나타난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비인격화의 경향, 즉 경제기업의 전 메커니즘에서 개인의 환경에 대해서 고려하는 모든 직접적/인간적 영향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업은 자체의 이해와 목적을 추구하고 자체의 논리법칙에 따라가는 하나의 자율적 유기체가 되며, 자기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삼는 폭군이 된다.(p22)

모짜르트(W.A.Mozart)가 항상 객관적이며 필연적인 확고한 플랜을 좆는 것같이 보이는 데 반하여,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모든 주제, 모든 모티프, 모든 음조가 마치 "나는 이렇게 느끼니까" "나에겐 이렇게 들리니까" "나는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 하고 작곡자가 말하고 있는 듯이 울린다. 과거 대가들의 작품이 잘 균형 잡히고 잘 구성된 작곡과 깔끔하고 잘 마무리된 멜로디임에 비하여, 베토벤과 그후의 작곡가들의 창작은 괴로운 가슴의 심연에서 터져나오는 부르짖음이며 읊조림인 것이다.(p56)

자연주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이다. 진실감에 대한 자연주의의 가정이 새롭기는 하나, 이러한 가정이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언제나 자의적이게 마련이다.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후자의 과학주의, 즉 현실의 예술적 묘사에 정밀과학의 원칙을 적용한 데에 있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주의적 예술이 지배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은 관념론과 전통주의의 정신에 대한 과학적 세계관 및 합리주의적/기술중심적 사고방식의 승리에 따른 한 징후일 따름이다.(p81)

혁명의 승리와 차티즘(Chartism, 1836 ~ 48, 6개 항목의 급진적인 인민헌장을 내세운 영국의 정치운동)의 좌절 이후에야 비로소 부르즈와지는 자기의 확고한 힘을 느꼈고, 그리하여 이제 양심의 갈등이니 양심의 가책 따위는 갖지 않게 되었으며, 이미 어떤 비판의 필요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문화적 엘리뜨, 특히 문필가들은 사회에서 하나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느낌을 잃어버렸다.(p163)

똘스또이와 도스또예프스끼의 관계에서 우리는 볼떼르와 루쏘 사이에 있었고 괴테와 쉴러(J.Ch.F. von Schiller)간의 관계에서도 그 비슷한 것이 있는, 의미심장하고 가장 깊은 뜻에서의 전형적이고 원형적인 정신적 관계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감각성과 사상성, 또는 쉴러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박한 것'과 '감상적인 것'이 대면한다.(p190)

기술의 진보와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문화의 중심이 현대적 의미의 대도시로 발전해가는 일로서, 이 대도시는 새로운 예술이 뿌리내리는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 인상주의는 유례없이 도시적인 예술인데, 그것은 다만 인상주의가 풍경으로서의 도시를 발견하고 그림을 시골에서 도시로 옮겨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을 도시인의 눈으로 보고 현대적 기술인의 극도로 긴장된 신경으로 외부 세계의 인상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p201)

시기상으로도 문학의 인상주의와 회화의 인상주의 사이에는 얼마간의 간격을 볼 수 있다. 회화에서는 인상주의의 가장 왕성한 시기가 이미 지나간 때에야 비로소 그 양식적 특징이 문학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 차이는 문학에서의 인상주의는 비교적 일찌감치 자연주의, 실증주의, 유물론과의 연결고리를 잃고 거의 출발부터 익히 알려진 이상주의적 반동의 역할을 떠맡은 데에 비하여, 회화에서는 인상주의가 해체된 다음에야 그러한 반동이 나타난다는 점이다.(p215)

플로베르의 세계관과 베르그쏭의 세계관을 갈라놓는 중요한 차이는, 플로베르가 아직도 인생의 이상적 실체를 갉아먹는 하나의 파괴요인으로 시간을 파악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시간관의 변화, 아울러 체험적 현실 전체에 대한 평가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서 그것은 제일 먼저 인상파의 그림에서, 다음에는 베르그쏭의 철학에 와서, 끝으로는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요, 그 속에서 이념과 이상이 가치를 잃고 삶과 정신이 실체를 상실하는 요소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p269)

영화의 시대

20세기 예술의 주류를 이루는 경향들은 모두 전 세기의 선구자들에게서 그 기원을 갖는다. 입체파는 쎄잔느와 신고전주의자들에게서, 표현주의는 고흐와 스트린드베리에게서, 초현실주의는 랭보와 로트레아몽에게서 각각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예술사상의 연속성은 당시의 경제사 및 사회사가 어느정도 일관된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p285)

연극은 여러가지 면에서 가장 영화와 닮은 장르이다. 특히 시간적 형식과 공간적 형식을 종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이 나란히 병존할 뿐이지 영화에서처럼 양자가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영화와 다른 예술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p302)...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이 마치 그 기능의 호환성을 통해 결합되어 있기나 한 것처럼, 공간이 활성화되어 시간적 자질을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거의 공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순간들의 배열순서에 일종의 자유가 생긴다.(p30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0-03-05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어 사다 놓은 책인데 몇년째 keep 만 하고 있습니다. 리뷰 읽으니 더 궁금해지는 책입니다. ^^
근데 어쩜 이렇게 책을 빨리 읽으세요?^^

겨울호랑이 2020-03-05 23: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사실 저도 예전에 사다 놓고 틈틈이 들여다 보다가 이번에 맘먹고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몰아보다보니 전체적인 흐름이 더 잘들어오는 것 같네요. 다만, 그 깊은 내용이 모두 제것은 되지 않은 것 같네요 ㅜㅜ 아무래도 소화시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