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양을 째야 했고,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열십자 모양으로 매스를 두 번 그으면 피가 섞인 멀건 죽 같은 고름이 흘러나왔다. 환자들은 능지처참을 당하듯이 사지를 벌린 채 피를 흘렸다. 하지만 곧이어 배와 다리에 반점들이 나타났고, 멍울들은 더 이상 곪지 않는가 싶더니 곧이어 다시 커졌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죽었다.(p51) <페스트> 中


[그림] La Peste(출처 : https://www.wikiart.org/fr/arnold-bocklin/la-peste-1898)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 ~ 1960) 의 <페스트 La peste>는 흑사병이 덮친 알제리의 소도시 오랑(Oran)를 배경으로 한다. 처음에 쥐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죽음은 서서히 소도시의 사람들을 덮쳐오면서 퍼지는 불안감과 공포. 그리고, 페스트의 창궐(猖獗)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이 소설은 매우 실감나게 묘사한다.


 불과 사흘 만에 열병 발병율은 네 배나 뛰어올랐다. 사망자가 열여섯에서 스물넷으로, 스물여덟로, 서른둘로 증가했다. 나흘때 되던 날, 당국은 어떤 유아원에 임시 병동을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시한 농담으로 자신들의 불안을 감춰 오던 우리 시민들은 예전보다 더 풀이 죽어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p83)... 8월 한복판에 이르자 사실상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자 개인의 운명이란 더 이상 없었고, 페스트라는 집단의 역사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극심한 것은 이별과 유배의 감정이었으며, 거기에는 공포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p215) <페스트> 中


 갑작스레 자신의 삶을 침범당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한다. 페스트를 위협요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안전한 존재라고 느꼈을 때, 사람들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개체(個體)로 행동한다.

 재앙이란 사실 공동의 문제이지만, 일단 닥치면 사람들은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렇지만 전쟁이든 페스트든 사람들은 늘 속수무책이다.(p53)... 우리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별이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하는 공통의 감정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를 우선순위에 놓고 있었다.(p102) <페스트> 中


 그렇지만, 물러설 곳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변하게 된다. 성문들이 닫히며, 도시가 개방계(開放系)에서 폐쇄계(閉鎖系)로 바뀌면서 이기적 유전자들이 생존을 위해 이타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순간이 된다. 사랑하는 이/존재와 이별을 해야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외부에서 온 침입자를 적(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추상적인 존재인 '페스트'는 구체적인 불행으로 내부에서 실재화(實在化)된다. 사람들은 페스트와의 싸움을 통해 점차 고통을 겪으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도시로 통하는 성문들이 폐쇄되는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전까지 시민들은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상태는 의심의 여지 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성문이 닫히고 나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서술자는 물론이거니와 그들 모두는 마치 한 배에 탄 꼴이 되었고 어떻게든 맞춰 나가야 했다... 성문들이 폐쇄되자 벌어진 일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p89) <페스트> 中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추상적인 것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추상과 제대로 붙어야 한다.(p115)... 리유는, 또한 무엇보다도 새로운 각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적 관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를 테면 우울한 투쟁과도 같은 것, 오랜 기간 동안 우리 도시의 삶 전체를 지배한 그 투쟁을 계속 추적할 수 있었다.(p119) <페스트> 中


 외부로부터 다가와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이 불행이 우리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부당한 고통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괴롭히도록 했고,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고통과 한편이 되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질병이 갖는 수법의 하나이다.(p99) <페스트> 中


 이제 군중들은 페스트를 적으로 인식하고 힘든 사투(死鬪)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아폴로에 의지하여 싸움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절망적인 싸움의 끝을 알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 사람들은 아폴로 대신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중세 페스트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을 때 유럽을 감싸던 광기(狂氣)가 작은 시 오랑에 넘쳐나게 된다. 낮에는 불안, 밤에는 위안이 이어지면서 공포에 담금질 되던 사람들은 서서히 바뀌어간다.


 수많은 군중이 기도 주간에 참여했다. 평소 오랑 시민들의 신앙심이 두터워서가 아니었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종교로의 귀의가 그들을 빛으로 인도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 시민들을 매우 특별한 심리 상태에 처해 있었는데, 그들에게 충격을 주는 믿기 어려운 사건들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변화가 있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페스트란, 오긴 왔지만 결국엔 떠나가 버릴 불쾌한 손님일 뿐이었다.(p121) <페스트> 中


 무더위에 침묵까지 가세하자 겁에 질린 우리 시민들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훨씬 더 심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하늘의 빛깔과 대지의 내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영향을 주었다... 기력을 소진해 버린 봄이 지천으로 활짝 핀 수천의 꽃들 속에서 마지막 힘을 다하다가 페스트와 무더위라는 두 배의 무게에 눌려 서서히 뭉개지려 한다는 걸 누가 봐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p146) <페스트> 中


 오랑 시민들이 이 전염병을 다른 병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던 초기에는 종교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들은 쾌락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낮이 되면 사람들 얼굴에서 생생히 드러나는 불안이, 붉게 타오르는 먼지투성이 황혼 녘에는 일종의 격렬한 흥분과도 같은 것, 모든 사람들을 열의에 들뜨게 만드는 어설픈 자유로 용해된다.(p157) <페스트> 中


 그리고 거짓말처럼 힘든 싸움의 끝이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 왔음에도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이는 페스트와의 싸움이 그들 자신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전염병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후퇴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들은 선뜻 기뻐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키우면서도 그들에게 신중함을 가르쳐 주었고, 그럼으로써 전염병이 불원간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점점 버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소식이 모두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커다란 희망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p343) <페스트> 中


 통계 수치가 가장 희망적이던 바로 그 시기, 우리 시민들은 모순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은 흥분과 의기소침이 번갈아 연이어 나타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그 시기에 탈출했던 사람들은 본능적인 감정에 굴복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페스트는 깊은 회의주의를 심어 두었고, 그들은 그것을 제거하지 못했다. 희망이 그들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페스트의 시대가 다 끝나 가던 바로 그 시기에도 그들은 여전히 페스트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p347) <페스트> 中


 페스트는 외부에서 왔고 다시 외부로 돌아갔지만,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 마음에 페스트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그 씨앗은 언제라도 다른 형태의 '페스트'가 닥쳤을 때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그들은 페스트를 물리쳤지만, 동시에 페스트를 받아들인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저버렸음을 리유를 제외한 군중은 결코 알 수 없었다.


 리유는 기뻐하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책에서 알 수 있듯이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가구들이며 이불이며 오래된 행주 같은 것들 속에서 수십 년동안 잠든 채 지내거나 침실, 지하 창고, 트렁크, 손수건 심지어 쓸데없는 서류들 나부랭이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께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p396) <페스트> 中


 그는 단지 페스트를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우정을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인간의 정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추억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뿐이다.(p372) <페스트> 中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깊은 불안을 던져 주고 있는 지금 시점에, 카뮈의 <페스트>는 질병이 어떻게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것인지 잘 보여준다. 페스트를 비롯한 전염성 질환이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의 위험보다 서로가 자신을 주위로부터 격리시키고 스스로 고립되는 유배의 감정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카뮈의 통찰은 지금 우리에게도 분명 의미있게 다가옴을 느끼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그는 오랑 시민들이 보여 주는 모순을 가감 없이 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가깝게 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경계심 때문에 선뜻 나아가지 못한다. 누구든 자기 이웃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이 페스트균을 옮겨서 자신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p253) <페스트> 中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0-02-0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저도 이 책이 읽고 싶어 도서관에서 대여해 놓았어요~~
곧 읽어 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2-04 23:02   좋아요 1 | URL
때가 때인지라 몰입이 잘 되네요. 페넬로페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