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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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거의 칠 주가 지났다. 나는 장례식 때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겠다는 너무도 강렬한 욕망이, 그녀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듣고 얼빠진 듯 말문이 막혔던 그때 상태로 되돌아가기 전에 작업에 착수했다.(p9) <소망 없는 불행> 中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 ~ )는 <소망 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u''ck>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어머니 이야기를 한다. 작품에서 어머니의 일생을 그리면서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 시작은 배움의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 배움의 욕망은 어머니에게 새롭게 세계를 보는 법을 알려주었고, 이로부터 어머니는 달라지게 되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했다.(p19) <소망 없는 불행> 中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어머니에게 문학을, 정치를 알려주었고 이를 통해 어머니는 '여러 명 중 한 명'이 아닌 '개인'으로 자리잡아갔지만, 이러한 어머니의 깨우침은 일반적힌 사람들의 지향과는 달랐다. 그리고 어머니의 불행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나의 어머니는 이런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 끝없는 강요도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p53)... 나의 어머니는 영원히 위축되고 존재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p56)... 그녀는 점차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여자>가 되어갔다.(p61) <소망 없는 불행> 中


 대다수 사람들은 '개인'으로 서기 보다 '무리(유형)' 안에 속하면서 안락함을 느꼈고, 무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에, 기꺼이 자신의 개성(個性)을 포기했지만, 어머니는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유형(類型)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출신이라든지, 비듬이 떨어져 괴롭다든지, 발에 땀이 난다든지 하는 개인적 특성이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 매일매일 반복되는 문제들 따위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유형에 들어감으로써 개인은 부끄럽게 여겨졌던 외로움과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스로를 망각했으며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때로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었다.(p36) <소망 없는 불행> 中


 이미 언급된 의식(儀式)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은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p45) <소망 없는 불행> 中


 그 결과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섞이기를 거부했고, 고독감을 느끼며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집단으로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외로운 길을 선택한 어머니. 작가는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의 죽음과 개별 사안과 이로부터 도출된 추상적 개념의 관계를 연결짓는다. 추상적인 개념은 현실을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현실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이 과거를 추억으로 미화하듯이. 때문에,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에게도 의식화, 추상화는 거부해야할 대상이었다. 동시에, 어머니의 생애를 쓰려는 한트케에게도.


 각자 다른 구석을 볼 테니 외로움은 그만큼 더 커질 거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조금 뒤어다녀야겠다... 타인들이란 그녀를 방해하고, 기껏 잘해 봐야 약간 감동을 주는 어린애들에 불과했다.(p75) <소망 없는 불행> 中


 비참한 상황에서 그들은 역겹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구체적으로 체럼 가능한 모습으로 사회 통념들을 교란시켰다면 이제는 개선되고 깨끗해진 <가난한 계층>으로서 그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이어서 예전에 비참했던 모습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궁핍에서 오는 비참함은 구체적인 말로 묘사될 수 있지만 가난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다.(p51) <소망 없는 불행> 中


 때문에, 저자 한트케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릴 때 객관적으로 쓰려 노력했던 것은 단순한 기자정신이 아니라 유형화를 거부했던 어머니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길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망 없는 불행> 안에서 집단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와 의식화/추상화를 피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어울어져 우리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글을 쓸 때는 난 반드시 옛날에 대해, 적어도 쓰고 있는 시간 동안은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쓴다. 늘 그렇듯이 난 문학적으로 대상에 몰두하며 나 자신을 회상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계로 피상화시키고 객관화시킨다. 나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p12) <소망 없는 불행> 中


 한 인물을 추상화하고 형식화하는 데 위험한 점은 물론 그 추상화 및 형식화 작업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이야기되고 있는 그 인물이 잊혀지고 꿈속의 이미지들처럼 구절들과 문장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 개인의 삶이 동기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하는 문학적 의식(儀式)이 된다.(p39) <소망 없는 불행> 中


 그렇지만, 역사가가 아무리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서술한다고 했을 때, 조감도(鳥瞰圖)처럼 완전히 시대와 떨어져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망 없는 불행> 속의 작가가 객관적으로 서술한다고 수없이 강조하지만, 분노와 격정에서 나온 욕구로 쓰여진 글이 완전하게 객관적일 수 있을까? 그러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때로 그녀를 한참 들여다보고 난 후에는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면 나의 지리함이 극에 달해 심란해져서 시체 곁에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p80)... 나는 쓰러지고 말 것 같은 분노 속에서 나의 어머니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p81) <소망 없는 불행> 中


 그런 면에서 <소망 없는 불행>은 개인으로 서려고 했지만, 좌절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삶을 비통한 마음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써내려간 아들의 사모곡(思母曲)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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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0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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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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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5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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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5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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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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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1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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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12-04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객관적 서술은 불가능할 거로 생각합니다. 주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만요.
작가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없지요.

겨울호랑이 2019-12-04 13:45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말씀처럼 작가처럼 주관적인 주체는 없는 듯합니다. 객관적이라면 보고서가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