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환자의 침실은 가정에서 병원으로 전이되었다. 이러한 전이는 의학적 기술을 빌미로 가족들에게 용인되었으며,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더욱 보편화되고 절차도 매우 간편해졌다. 이때부터 병원은 죽음이 공개성 혹은 그것의 잔재들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 이렇게 해서 병원이 고립된 죽음의 장소가 된 것이다.(p1030) <죽음 앞의 인간> 中


 <죽음 앞의 인간 'homme Devant la Mort>의 저자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20세기의 죽음을 '역전된 죽음'으로 특징짓는다. 죽음을 입에 담지 않고 '침묵'을 통해 회피하는 모습이 <죽음 앞의 인간>에서 그려진다.


 죽음이라는 말은 금기처럼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 되고 있어서 예의범절을 아는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합당한 표현으로 완곡하고 정숙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수사학을 사용해서 발설할 수 없는 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면, 20세기에 와서는 침묵에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p1032) <죽음 앞의 인간> 中


 이러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Tuesdays with Morrie>에서는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노교수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시한부 삶을 남겨두었지만, 노교수는 아직 젊은 제자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을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내용을 중심으로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죽음과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리 교수의 태도 안에서 우리는<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에서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0 ? ~ BC 50?)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린 죽음의 광경을 보는 걸 너무도 두려워하지. 저번에 책을 읽었네. 병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시트를 머리에 씌운 다음 바퀴 달린 침대에 주검을 싣고 통로를 지나 내려간다더군. 죽음의 광경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안달하는 거지. 사람들은 죽음이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곤 해. 자네도 잘 알듯이 죽음은 전염되지 않아. 삶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죽음도 자연스럽다네. 그것은 우리가 맺은 계약의 일부일 뿐이야.(p249)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830)...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서로 하나로 합쳐져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때는 분명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우리에게,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도 감각을 일으킬수 없으리라.(839~840)... 그가 언젠가 태어났었든,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었든, 이제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대는 물론 죽음 속에서 잠든 것처럼, 그렇게 남은 온 세월 동안 괴로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 하지만 우리는 소름 끼치는 화장장 가까이에서 그대가 재가 된 것을 그칠 줄 모르고 애곡했노라, 그리고 그 어떤 날도 우리 가슴에서 영원한 슬픔을 없애지 못하리라.(904~908)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中


 살아간다는 것이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의 다른 이름임을 생각한다면, 모리 교수와 루크레티우스의 말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 긍정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으로도 죽음을 받아들인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는 말과 사랑을 나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받는 것은  내가 죽어 가는 느낌을 준다네. 하지만 베푸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심오한 말이다. 그리고 과연 맞는 말이다. 받는 것, 소유하는 것은 살아 있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마케팅, 영리주의, 광고계의 기본이겠지만, 모리는 '문화에 현혹되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새 차, 새 옷, 새 평면 TV를 소유하는 것. 이런 것들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일시적인 흥분감이 있지만, 신제품 냄새가 빠지기도 전에, 품질 보증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진다.(p30)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우리 문화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네. 우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어. 그러니 스스로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것을 굳이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그것보다는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야 해.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네 그래서 그들은 불편한 상황에 처한 나보다 훨씬 더 불행해.(p83)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죽기 전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라는 모리 교수의 말은 쇠렌 키에르케고르(Sψren Aabye Kierkegaard, 1813 ~ 1855)의 '신(神) 앞에 선 단독자'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키에르케고르와 달리 모리교수는 유대교 신앙을 가졌기에 차이가 있지만, 유일신이며 인격신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크게 무리한 해석만은 아닐것이다. 이에 <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 <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l Døden>의 일부를 옮겨본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주 분명하고도 단순하다. 말하자면, 단독자가 스스로 행위를 통해서 진리를 낳을 때 오직 그 때 비로소 진리가 그에게 존재하는 것이다.(p358)...  우리는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동정심은 한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은 모두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그리고 진지하게 인정할 때만 진실하다. 오직 그때에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다.(p186) <불안의 개념> 中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어떤 세속적, 육체적 질병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닌데, 왜냐하면 죽음은 사실 모든 질병의 끝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그 어떤 물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병은 곧 그 끝이 죽음이고 또 죽음이 그 끝인 그런 질병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절망이라고 하는 것이다.(p63) <죽음에 이르는 병> 中


 죽음이 필멸의 존재인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과제라는 점에서 <불안의 개념>에서 말한 단독자가 가져야 하는 동점심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죽음 앞에 선 단독자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진리가 실현되는 것이며, <죽음을 이르는 병>에서 말한 죽음을 가져오는 절망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런지. 다소 기독교적인 해석이지만, 모리 교수의 태도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그림자가 살짝 느껴진다.('살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리 교수의 이야기에서는 '원죄'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의 리뷰에서 다룰 계획이다.) 다시 돌아오면, 모리 교수는 키에르케고르의 동정심보다 더 나아가 사랑을 나눌 것을 강조한다. 


 내가 이 병을 앓으며 배운 가장 큰 것을 말해 줄까? 사랑을 나눠 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p104)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내 말을 믿게. 죽어 가고 있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다 같다는 게 참말임을 알게 되네 . 우리 모두 출생이라는 걸로 똑같이 시작하지. 그리고 똑같이 죽음으로 끝나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야? 인류라는 대가족에 관심을 가져야 하네.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게.(p231).. 여기에 비밀이 있네. 아이 때와 죽어 갈 때 이외에도, 즉 살아가는 시간 내내 사실 우린 누군가가 필요하네.(p232)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사랑을 나누는 것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사선(死線)의 지평을 바라본 한 노학자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살아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죽어서는 단독자로서 심판대에 서는 것은 동서양(東西洋) 모두에서 공통된 처지인 듯하다. 차이가 있다면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환생(環生)을 통해 업(業)을 소멸하는가 하는 점인 듯하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만일 그대가 애착심과 혐오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면 앞에서 말한 어떤 환영이 나타나더라도 진리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에게 기도하라. 그리고 자비의 신에게 기도하라. 그대가 지금 사후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라. 모든 나약함을 버리라. 그대의 아들과 딸들 또는 두고 온 친척들에 대한 애착을 끊으라. 그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p447) <티벳, 사자 死者의 서 書> 中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의미의 이 라틴어는 고대 로마 개선식 때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인사로 사용되었다. 기쁜 날 사용된 이같은 말이 사용된 이유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절대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와 '기회', 'timing'을 의미하는 카이로스에서 이 또한 분리될 수 없음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카이로스)를 잘 살릴 때, 우리가 죽음 이후 시간이 소멸된 어느 지점에서 절대 시간(크로노스)를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통해 죽음의 의미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낸 지 20년이 흘러서야 마음 깊이 깨닫는다. 모리를 힘들게 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잊히는 것이었다.(p27)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잊히기를 두려워 한 이름이 '죽음'인 노교수를 위해서 '메멘토 모리'를 읊어보며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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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19-11-24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겨울호랑이님의 깊은 고찰에 경의를 표합니다.
죽음에 대해 잘 알 수 없어서 그저 카이로스적 시간의 소중함을 붙들고 살 수밖에 없는 저인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11-24 00:32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 중 제가 아는 몇가지를 옮겼을 뿐입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시나이 산에 올랐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새벽에 출발해서 제 발끝만 보고 무작정 걸은 후 아침해가 떴을 때, 매우 높은 돌산 정상에 도착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삶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속에서 무작정 걷는 카이로스의 삶을 살다보면 크로노스의 결과는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2019-11-24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4 0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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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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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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