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를 구분하는 라캉의 "방법론적 구분"은 분화의 이론(혹은 단지 그 역사적 효과)이다. 이제 상징계는 물질성과 기술성을 지니고 있는 언어기호를 포괄한다. 다시 말해, 언어기호는 철자와 숫자로서 유한한 집합을 형성하며, 철학적으로 꿈꾸어왔던 의미의 무한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상상계는 유아의 본래 신체보다 더 완전한 운동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체의 거울상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실재계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호흡 곤란, 추위, 현기증과 더불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상계는 영화의 요람기에 탐구되어온 바로 그 광학적 환영을 실행한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로부터는 라캉이 전제했던 것 말고는 아무것도 드러날 수 없다. 즉, 아무것도 없다. 실재계는 상상계의 거울로도 상징계의 격자로도 포착할 수 없는 잔여물 또는 폐기물이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이러한 방법론적 구분은 매체의 기술적 구분에 명백하게 일치한다. 모든 이론은 각자의 역사적 선험성을 가진다.(p38) <축음기, 영화, 타자기> 中


 프리드리히 키틀러 (Friedrich Kittler, 1943 ~ 2011) <축음기, 영화, 타자기 Grammophon, Film, Typewriter>는 20세기 아날로그 기술 매체들인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라캉(Jacques-Marie-Emile Lacan, 1901 ~ 1981)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로 대응시켜 이들을 해석한다. 따라서,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기 전 라캉의 용어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순서라 여겨지며, 이번 페이퍼에서는 브루스 핑크(Bruce Fink)의 <라캉의 주체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를 통해 내용을 비교해보고, 21세기 매체 전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나 욕망은 담화를 통해서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무의식은 다른 사람들의 말, 다른 사람들의 대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목표, 열망,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p35) <라캉의 주체> 中


 언어로서의 타자는 대부분의 아이들에 의해 동화된다. 타자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소망들을 불손하고도 부적절하게 변형하는 음험한 불청객 침입자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우리의 욕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면서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무엇이기도 하다.(p29)... 우리 자신과의 혹은 다른 사람과의 일상적 대화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하는 저 담화가 우리 자신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것과는 생각보다 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았다. 실로 그것은 언어로서의 이 다른 현존에 의해 침투되어 있는 것이다. 라캉은 이를 분명한 용어로 표현한다. 자기는 타자이다. 자아는 타자이다.(p31) <라캉의 주체> 中


  라캉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은 다른 사람(타자)들의 생각들이 흘러들어와 수용되는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의 생각은 언어에 의해 전해지는데, 이때  우리는 우리의 언어가 아닌 타자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를 생각해보자). 그런 면에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談論)이며, 자아와 타자는 다르지 않다. 자아와 타자를 맺어주는 언어. 그렇다면 언어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 라캉은 언어의 기능을 상징계와 실재와의 관계에서 찾는다.


  라캉의 실재에는 지대들도, 하위구분들도, 국부화된 높낮이도, 혹은 틈새와 충만도 없다. 실재는 갈라짐 없고 분화되지 않은 일종의 직물이며, 모든 곳이 충만한 그런 방식으로 짜여 있다. 실재가 별도의 지대들로, 구분되는 지형들로, 대비되는 구조들로 나뉘는 것은 상징적 질서의 결과인데, 상징적  질서는 실재의 매끄러운 겉면을 자르고 들어가서 구분들과 틈새들과 구별가능한 존재자들을 만들어내며 실재를 안장安葬시킨다. 실재를 폐기하면서 상징적 질서는 '현실"을 창조한다.(p62) <라캉의 주체> 中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은 그것의 현실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실존하지 않는다. 라캉의 용어법에서 실존 existence은 언어의 산물이다. 따라서 실재는 언어를 앞서므로, 실존하지 않는다.(p63)... 라캉적 관점에서 볼 때 정신분석의 전제는, 언제나 상징계가 - 실재계를 암호화하고, 그로써 그것을 변형하거나 환원하는 가운데 - 실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식적으로 그려보자면, 상징계는 실재 위에 덧쓰기를 하고 실재를 지움으로써 실재를 빗금친다.(p65) <라캉의 주체> 中


 라캉에 의한면 '말할 수 없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언어 이전에 사태(事態)는 없는 것이다. 실재는 어린아이가 주위의 환경(타자)으로부터 언어를 배울 때 형성되는 것이며, 외부의 암호화된 언어와 의미를 받아들여 해석함으로써 비로소 실존한다. 이러한 외부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구분되며, 이들은 거칠게 표현해서 상상계는 우리가 유사함을 느끼는 세계인 반면, 상징적 관계는 암호화된, 보다 추상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상상적" 관계는 환영적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아들간의 관계인데,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대립 - 동일한과 상이한의 대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상상적 관계는 당신이 다양한 이유로 당신 자신 같다고 간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내포한다.(p160)... 우리가 우리 자신 같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타자에 대해서, 우리가 타자와 맺는 것과 유사한 관계에 있다.(p162)... 상징적 관계는 언어, 지식, 법, 경력, 학계, 권위, 도덕 이상 등등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관계이다, 타자에 의해 지칭된 대상들과의 관계이다.(p164) <라캉의 주체> 中


 그럼, <축음기, 영화, 타자기>안에서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살펴보자. 저자 카틀러는 암호화된다는 면에서 '타자기'를 상징계에, 유사함을 저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영화'를 상상계에 마지막으로 '축음기'를 실재계에 배치한다. 


 타자기는 처음으로, 자판이라는 계산되고 정돈된 저장고에서 선택된 문자를 제공한다. 손글씨의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자간과 행간에 의해 분리되고 구분된 요소들이 서로 나란히 등장한다. 따라서 상징계는 인쇄 활자의 지위를 가진다... 영화는 움직이는 도플갱어를 최초로 저장할 수 있었고, 다른 영장류와는 달리 인간은 그 안에서 자신의 신체를 인지(혹은 오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상상계는 영화의 지위를 갖는다... 축음기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모든 기호의 질서와 단어의 의미들 이전에 후두에서 내지르는 모든 소음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실재계는 축음기의 지위를 갖는다.(p39) <축음기, 영화, 타자기> 中


 여기에서 우리는 추가적으로 상징계와 실재계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재은 외부로부터 암호화된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래의 자기는 점점 작아지고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밀려나게 된 '잔여물'들은 무의식으로 밀려나 의식의 다른 원인이 된다. 언어를 통한 상징계와 실재계의 교류를 통해 인간은 성장한다.


 우리는 될 수 없으며, 단순한 잔존물이나 찌꺼기에 해당한다. 매 단계에서 적어도 실재가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상징화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저 "최초의", "본래적" 실재는 점점 더 적게 남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상징계와 나란히 존속하는 잔여물은 언제나 존재한다.(p66)... 중첩되는 상징 적용의 단순화된 모델에서 우리는 1 다음에 곧바로 3이 올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1 바로 다음에 오는 위치에서 우리는 3을 일종의 잔여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회로에서 사용 하나의 수는 배제되거나 옆으로 밀려나게 된다... 라캉은 이 배제된 수나 상징들을 그 과정의 카푸트 모르툼(caput mortuum)이라고 부른다.(p67)... 카푸트 모르툼은 사슬이 포함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슬의 타자이다... 사슬 바깥에 필연적으로 남게 되는 그 무엇은 내부에 있는 것의 원인이다. 내부가 있기라도 하려면, 구조적으로 말해서 무언가가 밖으로 밀려나야 한다.(p68) <라캉의 주체> 中


 여기서 매체들이 위치하게 된 세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축음기와 영상기록기는 각각 청각, 청각+시각적으로 '시간'을 저장하는 매체다. 둘 다 시간을 저장하는 매체지만, 영화는 보다 종합적으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상상계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이에 반해, '타자기'는 언어(문자)를 통해 정보를 암호화한다는 면에서 '상징계'의 자리에 놓인다.


 축음기 Phonograph와 영상기록기 Kinematograph에 이르러 비로소 저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시간은 청각적인 것에서는 소음의 주파수 혼합체로, 광학적인 것에서는 연속되는 단일 이미지들의 운동으로 저장되었다. 모든 예술은 시간에서 그 한계를 갖는다.(p17) <축음기, 영화, 타자기> 中


 레코드판의 홈이 끔찍한 폐기물들, 즉 육체의 실재를 저장하는 동안에, 극영화는 한 세기 동안 문학이라고 불렸던 모든 환상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넘겨받는다... 이때부터 신낭만주의 작가들은 사랑을 쉽게 성취할 수 있었다.(p284) <축음기, 영화, 타자기> 中


  문자는 자신이 권력을 획득했다는 사실만을 저장한다. 문자는 자신을 만들어낸 신의 저장 독점권을 찬미한다. 이 신은 문자를 이해하는 독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기호의 제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책들은 이집트의 <사자 死者의 서>와 같은  죽은 이들의 책이라 하겠다. 책은 모든 감각들이, 그 감각의 저편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망자의 제국과 같다.(p24) <축음기, 영화, 타자기> 中


 이와 같은 이유로 20세기 영상 매체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에 대응하여 논리를 풀어가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한 후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는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외에도 라캉 이론의 여러 부분이 책 본문에 담겨있는데, 예를 들면 상징계의 불완전성을 설명하는 라캉의 이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 ~ 1954)의 에니그마(Enigma) 암호 체계 해독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내용이 좋은 예라 여겨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미테이션 게임 Alan Turing: The Enigma>을 참고하면 좋겠다. 괴델의 불가능성 정리에 대해서는 일전에 정리한 페이퍼 주소를 알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모든 기표들의 집합이라고 가정된 집합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영원히 집합 바깥에 남아 있는, 집합의 바로 그 이름이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 집합은 그 자신을 자기 자신의 원소 가운데 하나로 포함한다. 이는 역설적 결과이다.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말이다. 이 논증은 대수의 불완전성에 과한 괴델의 정리와 연결할 수 있는데, 이 정리는 모든 공리적 체계들로 일반화할 수 있다.(p72) <라캉의 주체> 中


애니그마는 실용적으로는 장점이지만 이론적으로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애니그마의 암호가 자기 반전反轉적 그룹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기계에서 암호화와 그 암호에 대한 해독이 이루어지려면, 철자 조합들이 서로 교환 가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고사령부 OKW가 O를 K로 암호화했다면, 역으로 K는 O의 암호여야 한는 것이다. 이로부터 두번째로 "어떤 철자도 자기 자신을 통해서는 암호화될 수 없다는 특성"이 도출된다. 다시 말해 OKW도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튜링은 이 작지만 중요한 비밀을 폭로하는 함축을 순차적인 분석에 적용하여 해법의 개연성을 조정할 수 있었다.(p451) <축음기, 영화, 타자기> 中


 괴델의 증명과 관련 페이퍼  :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10195327


 키틀러가 <축음기, 영화, 타자기> 안에서 20세기 매체를 통해 분석을 수행했다면, 21세기에는 어떤 방향으로 정보 기술 매체들이 발전할 것인가? 1985년에 씌여진 <축음기, 영화, 타자기>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 키틀러의 다른 저작 <광학적 미디어 : 1999년 베를린 강의>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실재는 외부로부터 타자의 언어를 받아들임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라캉의 이론을 생각해본다면, 암호화된 상징계가 실재계이전에 존재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 면에서, 암호화 또는 압축은 현실 존재에 선행되는 작업일 것이며 컴퓨터는 이전의 그 어느 매체보다 혁명적으로 이러한 압축을 수행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환이 그것이다.

 

 모든 압축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n-1 차원이 기표가 n차원을 은폐하고 숨기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신神의 살과 피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것도 그 때문이고, 성상파괴를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에 그려진 이미지에 맞서 싸웠던 것도 그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근대의 자연과학과 기술이 텍스트 기반의 현실 개념에 맞서 전쟁을 벌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플루서는 이 마지막 전쟁에서 일차원적 텍스트가 영차원의 숫자나 비트로 대체됐다고 보고, 이제는 차원이 없기 때문에 무언가 은폐될 위험도 없음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컴퓨터는 모든 차원을 영차원으로 완전히 압축하는 기술이다.(p346) <광학적 미디어 : 1999년 베를린 강의> 中


 그리고, 그 결과 21세기 우리는 빛의 속도로 전송되고, 저장되는 시대에 살게 된다는 것이 키틀러의 예언이다. 이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더이상 고전 역학의 시대가 아닌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의 시대를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고전 역학과 전혀 다른 가정에서 출발하는 양자 역학과 의미와 과거와 전혀 다른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볼 때, 물리학적으로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양자혁명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디지털 이미지 처리 방식은 관습적 예술과는 달리 이미지를 본뜨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계에 호응한다. 데이터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실리콘 칩과 데이터를 전송하는 금/구리선으로 이뤄진 현재의 시스템이 광학적 회로와 광섬유 케이블로 이뤄진 새로운 시스템으로 대체된다면, 디지털 이미지의 계산 속도도 더 빨라지겠지만 만델브로트가 발견한 자기 유사성의 수학적 구조도 더 강력해질 것이다... 이제 광학적 미디어가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시스템이 수립될 것이다. 그러므로 광학적 미디어에 관한 내 강의도 그 시스템에 관한 예언으로 마무리하겠다. 그것은 빛을 빛으로 전송할 뿐만 아니라 빛으로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이 될 것이다... 정보로서의 빛 또는 빛으로서의 정보의 최대 전송 속도는 광자 에너지를 플랑크 상수로 나눈 몫의 제곱근에 경험적 계수를 곱한 값과 같을 것이다.(p349) <광학적 미디어 : 1999년 베를린 강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9-10-16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야민이 기술 매체로 사진, 영화에서 그친 게 아쉽듯 키틀러도 21세기 매체로까지 진전되지 못하고 아날로그 기술 매체 분석에서 그친 게 아쉬운 지점입니다. 시기적으로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지금처럼 디지털화가 빠른 시대에서는 더욱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하잖아요.
휴대폰 하나로도 쓰나미를 일으키기 충분하니까요.
역사 이해는 늘 사후적이니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매체의 저변을 더 쪼개어서 분석 제시해주는 건 멋지더군요👍 비싸서 벼르고만 있었는데 얼른 사서 읽었으면 좋았을 걸 싶더군요.

겨울호랑이 2019-10-16 00:33   좋아요 1 | URL
저 또한 마찬가지로 매체 안의 속성을 라캉의 심리학에 대응해서 분석한 부분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매체가 당대 사람들의 요구 또는 욕구의 산물임을 통찰한 키틀러의 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AglmA님 말씀처럼 21세기에는 다양한 매체가 스마트폰으로 수렴해가는 현상을 키틀러는 어떻게 분석했을지 궁금해 집니다. 그의 후기작을 통해 유추한다면, 스마트폰 등의 매체와 빛을 연결시켜서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그 안에 어떤 방식으로 담겼는지 또는 수렴해갔는지를 설명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만. 그건 본인만이 알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