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국가(家産國家, patrimonial state)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회학에서 국가 체제를 분석할 때 등장하는 중심 개념 중 하나다. 베버에 의하면, 가산 국가란 가부장제하의 가정(oikos)을 확대한 개념이다... 베버에 따르면 가산 국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경제 체제는 "특권 체제(liturgic governance)"다. 특권 체제란 특정 집단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와 용역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대신, 그 대가로 특정 집단이 추구하는 경제적 목표에 걸맞는 독점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p4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란 서구에 특수한 근대적인 합리적 기업의 자본주의지, 3천 년 전부터 중국, 인도,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피렌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 퍼져 있는 고리대금업자, 전쟁 물품 조달자, 관직 및 징세권 임차인, 대상인 기업가, 대금융업자 등의 자본주의가 아니다.(p11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中 


 막스 베버(Max Weber, 1864 ~ 1920)는 중국의 경제체제를 봉건제(封建制, feudalism)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정체, 유지되어 왔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리처드 폰 글란(Richard Von Glahn)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The Economic History of China>를 통해 막스의 주장에 반박한다.


 내가 정의하는 가산 국가란 군주가 귀족 가문과 주권을 공유하는 국가다... 중국 역사상 기원전 450년 경 전제 군주 국가가 출현했는데, 그 이전까지가 가산 국가 체제였다. 막스 베버는 전형적인 가산 국가 체제가 왕조 시대 후기 중국의 정부 형태라고 했지만, 나의 견해는 다르다. 내가 보기에 기원전 3세기 최초의 통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에서 가산 국가 체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p44)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베버의 견해에 의하면 통치자와 신하가 일정 지역에 대해 '의무 - 독점권' 을 교환하지만, 글란은 중국경제사는 긴장과 화해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봉건제도는 주(周)나라 이후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경제 체제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중원(中原)지역에서는 상업이 발달한 반면, 변경 지역에서는 중앙의 지배를 받는 체제가 발달하게 된다. 


 전국(戰國) 시대 말에 두 가지 분명한 경제 발전 패턴이 출현했다. 화북평원(華北平原) 일대의 위(魏), 한(韓), 조(趙)나라들에서 상공인 계층은 군주의 영향력을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이와 반대로 변경 지역의 진(秦), 초(楚), 연(燕) 나라는 전제 군주가 관료제를 공고히 하여 경제적 자원을 총괄했다. 여기서 재정 국가 체제가 비롯되었다... 강력한 국가가 나서서 경제를 통제하는 전국 시대 후기의 경제 체제는,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을 건설한 이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p164)<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중앙 집권 체제국가인 진(秦)과 뒤를 이은 한(漢)에 의해 중국 경제 체제의 전체 틀이 만들어진다. 특히, 한 무제(武帝, BC 156 ~ BC 87)이후 소금, 철의 전매 정책과 통화주조권은 황제의 경제지배권과 토지를 기반으로 한 호족의 저항은 이들의 갈등관계를 잘 보여준다. 


 소금과 철은 일반적인 수요 공급의 탄력성이 떨어지는(비탄력적인) 상품이므로, 통치자는 이로부터 상당한 수익을 끌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일반적인 직접세의 부담을 아예 없앨 수는 없더라도 상당히 줄일 수는 있다.(p229)... 게다가 통치자는 오직 자신만 가진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화폐를 주조할 권리다.... 통치자는 화폐와 재정(財政) 정책을 통해, 화폐의 교환 가치를 조절할 수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상품의 가격도 통제할 수 있다. 이처럼 교환 가치를 지렛대 삼아 국가는 거래의 조건을 통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적 경제 행위를 관리할 수 있다.(p23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무제(武帝)의 정책을 달가워 하지 않는 반-국가 개입주의 이데올로기와 중농주의 원칙이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무제가 실시했던 시장과 생산에 대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에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 자체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다... 호족(豪族)의 정치적 승리는 부와 투자의 중심이 상업에서 토지로 이동한 것이었다(p238)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반면, 이들의 협력 관계를 잘 보여주는 제도의 예로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를 들 수 있다. 균전제의 목적이 안정적인 세수 확보라면, 이러한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지방 호족의 협조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중앙집권체제 경제 하에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당나라 시대 확립된 이들 제도는 '안사의 난'을 통해 무너지게 되고, 중국 경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균전제는 백성 간의 사적인 예속 관계를 끊고 국가가 직접 백성을 통제 및 관리하기 위한 폭넓은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균전제의 목적은 토지 경작 면적을 최대한 늘리고 국가의 세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토지 할당 기준을 각 가구의 소비량이 아니라 노동량에 둔 것은 그 목적이 백성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기보다 세금 수입의 안정을 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p322)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당(唐)나라 이전까지 '국가 - 지방' 권력자들의 긴밀한 협조 체제는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Lushan Rebellion, AD 755 ~ AD 763)을 통해 붕괴한다. 요(遼), 금(金), 원(元) 등 유목민족의 화북(華北)지역 지배는 이 지역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한 반면, 경제의 중심지는 시장 경제의 확대와 함께 강남(江南) 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은 중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재정 시스템의 기본을 고정된 인두세에서 진보적인 토지세로 바꾸는 등의 몇 가지 변화는 반란의 직접적 결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토지 소유는 더이상 균전제의 규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後漢) 이후로 토지를 축적해온 귀족도 부침하는 시장 경제에 노출되었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사적인 기획이 번성했다. 특히 소금 산업처럼 경제의 일정 분야가 국가직속으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시장 경제를 규제하던 시스템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상인은 대체로 더 확대된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바로 남부의 벼농사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었다.(p393)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처음에 몽골은 북중국 평원을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초원으로 바꿀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집행하는 와중에 계획이 중단되었다. 계획은 중단되었지만 북중국의 농업 경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북중국은 극심한 인구 손실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209년 금나라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와 명(明)나라 설립에 즈음하여 실시된 1393년 의 인구 조사를 비교하면 3분의 1이 줄어들었다.(p49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그렇지만, 원나라 시기에도 활기를 잃지 않았던 강남 경제는 명(明)나라 초기에 황제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 쇠퇴하게 된다. 영락제(永樂帝, AD 1360 ~ AD 1424) 당시 정화(鄭和, AD 1371 ~ AD 1434)의 해외원정 역시 제국주의 성격이 강한 해외 진출이었기에, 송나라 이후 강남을 중심으로 한 중국경제의 발전은 주춤하게 된다.



[그림] Zheng He Returns from Treasure Voyage (출처 : https://www.nationalgeographic.org/thisday/jul6/zheng-he-returns-treasure-voyage/)


 처음 제국을 수립할 때 명 홍무제(주원장)는 강남 지도층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 1380년에 이르러 홍무제는 강남의 지도층이 정부 관료로 참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일반 백성을 막론하고 모두가 황제의 계획에 방해가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결국 홍무제는 흐름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관리를 숙청하고 강남 대지주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했다.(p50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황제에 의한 경제통제와 화북/강남 지역의 경제 침체로 인해 명나라 경제는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침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유럽(정확하게는 라틴아메리카)로부터 은(銀)유입이었다. 오늘날의 양적완화(量的緩和, quantitative easing, QE) 정책을 연상시키는 통화팽창은 다시 명나라 경제를 끌어올렸으며, 이러한 명말의 경제성장은 청나라의 자유방임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명나라 후기 상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바로 1570년 이후 외국에서 들여온 은(銀)이었다. 화폐로 사용되는 은은 여전히 주조되지 않은 형태로 유통되었지만, 그럼에도 화폐 공급량이 급격히 확대되자 시장 경제의 숨통을 죄던 핵심적 문제가 제거되었다.(p545)... 청나라는 이전 왕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민간 경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편이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상인 조합은 대개 거래 관계보다 출신지를 배경으로 형성되어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번성했다.(p559)... 기본적으로 중개인 시스템이나 의집(자유시장)은 모두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 상권으로부터 세금을 간접 징수하는 방식에 속했다. 청나라 정부는 해외 무역에 대해서도 자유방임 정책을 채택했다.(p561)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저자는 베버의 주장과는 달리 중국 경제가 결코 정적인 체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한 무제 이후 지속적으로 경제지배력을 확대하려고 한 중앙정부와 토지에 기반한 지방실력자들의 협조와 긴장 관계 속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상업이 부수적으로 발달되어왔으며, 화북에서 강남 지역으로 개발이 확대된 역동적인 중국경제사를 우리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발견한다. 또한,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안에서 다음과 같이 역동성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기술 혁신의 부족'이라는 중국 경제의 한계성도 지적한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우리는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슘페터식 경제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도 발전했지만, 정부와 제도도 함께 발전했다. 국가의 재정 운용과 폭넓은 사회경제의 상호 작용은 시대 상황이나 이념의 방향에 따라 달라졌다. 슘페터식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중국 왕조는 시의 적절하게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p37)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18세기 경기 호황은 인구와 농업 생산량의 점진적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p569)... 17세기 말부터 중국은 인구가 급격히 성장했는데, 1680년부터 1850년까지 무려 3배나 성장했다. 전근대 역사상 이런 사례는 없었다. 오래도록 유지된 국내 평화, 그리고 시장의 효율성, 생산의 지역별 전문화, 화폐 공급의 확대가 가져다 준 지속적 경제 성장이 이처럼 전례없는 인구 성장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면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산 기술의 혁신 부족이었다. 토지, 물, 식량, 에너지 등 자원의 압박은 갈수록 커졌고, 기술 혁신 없이는 이를 완화할 수 없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p605)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中


 이처럼 저자는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 중국 경제체제가 결코 봉건제에서 정체된 체제가 아니라, 춘추/전국 시대 이래 자유경제와 통제경제 사이에서 다양한 방향 모색의 결과임을 밝힌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국경제사에서 발견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 서양에 비해 뒤지게 된 것은 다른 원인이 있어서일까? 서양의 자본주의, 과학, 종교에는 중국에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통해 차차 알아볼 계획을 세우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1. 중국 자본주의 관련 : <중국, 그 거대한 행보>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대분기>

2. 중국 과학 관련 : <중국의 과학과 문명>

3. 중국 철학 관련 : <중국철학사> <중국고대사상사론> <중국근대사상사론> <중국현대사상사론> <중국정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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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9-08-27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두꺼운 책을 이렇게 잘 소화해주시다니.. 감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27 21:25   좋아요 1 | URL
사마천님 잘 지내셨는지요? 사마천님께 좋은 말씀을 들으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