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칭기스 카한의 뿌리 : 지고하신 하늘의 축복으로 태어난 부르테 치노(잿빛 푸른 이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이었다. 그들이 텡기스를 건너와 오난 강의 발원인 보르칸 성산에 터를 잡으면서 태어난 것이 바타치 칸이다.(p23) <몽골비사 元朝秘史 제1권> 中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몽골제국의 건설자 칭기스 칸이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주장을 펼친다. 저자는 책에서 고구려 멸망 후 연남생(淵男生, AD 634 ~ AD 679)으로 대표되는 대대로 집안과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연합해서 세운 발해(渤海, 大震)과의 대립 구도가 타타르와 몽골 부족 사이 대립의 기원으로 이어내려왔음을 주장한다.


주몽(朱蒙)이 세운 고구려(高句麗)에서 그 후손 대조영(大祚榮)의 발해(渤海)가 나왔고, 이 발해에서 대조영의 아우 야발(野勃)의 4세손 금행(今幸)의 아들 함보(函普)에서 금(金)나라가 나왔다.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保活里)에서 그 14대 후손 칭기스 칸(成吉思汗)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원(元)나라 황가가 나왔다. 비록 우리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이기는 하나, 고구려(高句麗) 왕가에서 나온 이 계보는 지나 땅의 명明) 대를 거쳐, 금나라 유부(金國遺部)에서 태어난 "아이신교로 누르하지(愛新覺羅 努爾哈赤)"의 청(淸, 1616 ~ 192) 황실로까지 이어진다.(p91)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칭기스칸의 선조는 원리 "고구려왕족(高句麗王族)의 서자(殘蘗)"들로 지방통치자로 파견된 "말 골(말갈)"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고구려가 망해 정통 왕가의 적자(嫡子)들이 사라지자 이들을 대신하여 한 세대만에 신라와 당나라의 손에 찢기어 무너진 고려구의 옛 땅자리에 "발해(渤海) = 고려(高麗)"를 세운 고구려 왕족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고려 별종") 말갈 대씨 가문이다.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간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이 당나라에서 안동(安東, 요동 고구려)으로 돌아오자마자 말갈과 접촉하여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고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p120)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저자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북동부에 거대한 세력을 가진 고구려의 후손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세력을 통합한 것이 테무진, 후에 칭기스 칸(成吉思汗, AD 1162 ~ 1227)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인의 후예였던 장보고(張保皐, AD 787 ~ 846)의 손자인 궁예(金弓裔, AD 869 ~ AD 918). 금(金)을 세운 시조 역시 같은 고구려인의 후손임을 책에서 밝힌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高句麗) - 발해(渤海) - 금(金) - 몽골(元) - 청(淸) 순으로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는 나라들이 북방에서 건립된 것으로 해석된다. 


 칭기스 칸은 대야발의 19세 손인데, 그 모골 가계와 숙적이었던 타타르 종족 두 가계는 알고보니 둘 다 한 할아버지에서 나온 가계였고, 그들의 태시조는 바로 고구려 주몽이었다.  참고로 "칭기스 칸"은 바로 이 "진국왕(震國王)" ="팅기스 콘"이 구개음화를 거친 소리의 이름이었고, 그의 어릴 적 이름 "테무진"은 좀더 나중에 보게될 것이나, 고구려 제3대왕 "대무신(大武神)"왕이라는 말이다... 그 주몽의 손자가 바로 어릴적 이름이 달리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었는데, 이 이의 성씨는 "대씨(大氏)"의 유래로 보이고, 그의 이름은 "무쿠리"는 "모굴/몽골"과도 같다.(p86)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후삼국 세 나라,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 가운데 스스로를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선포한 궁예의 경우를 보자. 그의 어머니는 사실은 궁파(弓巴) 장보고의 딸이자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 어머니에게서 난 출신성분 때문에 궁예는 갓난아이 시절에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르러 신라 궁정에서 버림을 받았다. 그는 그 때문에 애꾸눈이 된 불운의 왕자였다.(p188)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은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7세 선조인 금시조 함보에게 아버지이자 동시에 칭기스 칸의 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다. 이 때문에 "고려왕(王)씨"와 조신(女眞)의 금(金)나라 황족 "완안(完顔)씨"는 서로 같은 것이다. <금사> "금국어해성씨"편의 "왕안은 곧 왕씨다(完顔曰王)"라고 한 말은 바로 이 뜻인 것이다!(p49)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2> 中


  저자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다소 새롭게 느껴지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고구려(高句麗) - 발해(渤海) - 금(金)나라 - 원(元)나라 - 청(淸)나라를 세운 이들이 한 사람의 선조 "주몽"에서 나온 한 집안 한 가계였다. 이런데도 아직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아역사공정이 설 땅이 있겠는가?(p46)... 이 연구를 통해 나는 발해 - 금나라 - 원나라가 이룬 사적들이 이 땅을 떠나간 고구려 - 발해의 백성,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이룬 세계사적발전 과정이었음을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결과를 알린다.(p47)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먼저, '테무진'을 '대무신왕'으로 해석한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스 칸의 이름이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 부족의 테무진 우게를 죽이고,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한다. 만약, 저자의 말이 맞는다면, '테무진  우게'야 말로 'original 대무신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테무진'이 '대무신왕'이라는 의미가 맞다고 해도, 그것은 왕을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용사(勇士)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의 뜻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50 예수게이 용사가 타타르의 테무진 우게, 코리 보카를 비롯한 타타르족을 약탈하고 돌아온 바로 그때 임신중이던 후엘룬 부인은 오난강의 델리운 동산에서 칭기스 카한을 낳았다. 태어날 때 오른손에 주사위뼈만한 핏덩어리를 쥐고 태어났다. 타타르족의 테무진 우게를 잡아왔을 때 태어났다고 해서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주었다.(p39) <몽골비사 元朝秘史 제1권> 中 


 또한, 저자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의 많은 내용을 '음(音)의 유사성'에 의해 설명하는데, 책에서 다른 저자의 내용을 비판할 때 자신이 주장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음의 유사성' 역시 우리가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주류이론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은 오늘날의 "아르군 강"이 "에르게네 쿤"과 음운적으로 상응하기 때문에, 곧 이 두 지명이 서로 비슷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을 주요한 근거로 보고, 이 때문에 양자가 서로 같은 곳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름소리가 서로 비슷하거나 같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 양자가 같은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에르게네쿤"이라고 보는 만주 서북방의 "아르군 하"와 정확히 소리가 같은 강이 또 하나 있기 때문이다.(p269)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成吉思 汗) 1> 中

 또한, 저자가 주된 근거로 하는 <몽골비사>의 경우, 일종의 암호문이기에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몽골비사>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읽혀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그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각 장에 딸린 간략한 한문 요약문만 읽을 수 있었다. 이 요약문을 통해 텍스트에 담긴 이야기의 암시는 얻을 수 있었지만, 문서 전체의 내용은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감질만 날 뿐이었다. 이 문건을 둘러싼 수수께끼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을 <몽골 비사>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후 이 문건의 이름이 되었다.(p27)... 이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암호를 판독하고 내용을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문건은 몽골의 왕가 내 소수를 대상으로 쓴 것이고, 이들은 당연히 13세기의 몽골 문화만이 아니라 지형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 때문에 번역을 해놓아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p30)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中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생각해야할 부분은 '몽골 = 칭기스 칸'이라는 등식이다.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칭기스 칸 =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등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몽골의 유라시아 제국 정복이 칭기스 칸 개인 또는 집안의 힘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금 제국의 시조라는 함보가 한반도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해서 청(淸)의 중국 정복을 한민족의 대외 정복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개인 의견으로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었던 고려(高麗)와 몽골과의 관계처럼 지배층의 관계에 한정된 것이라 생각된다.

 여몽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몽골인들이 지닌 정치 관념의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외교관계를 '국가'나 '왕조'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칭기스 일족과 다른 나라 군주들과의 인신적, 개별적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시 고려 국왕은 제국의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영토와 백성을 갖고 있는 군주임과 동시에 칭기스 일족의 부마로서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제왕이었다. 정동행성의 승상이라는 직책도 제국의 고위 관리라는 점에서 제국 내적 존재였다. 몽골 제국 시기 고려의 정치적 위상은 이러한 국왕의 지위와 연동했기 때문에 이중적인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p155)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지배층의 관계가 아닌 사회 다수 구성원인 민중(民衆)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몽골의 세계 정복은 풍부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얻으려는 욕구와 이를 충족하기 위한 움직임이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과 맞물려 얻어진 결과이지, 개인의 힘만으로 이 거대한 정복사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면에서 칭기스 칸은 몽골 역사의 한 방편(方便)이라 여겨지다. 극단적이지만, 만약 칭기스 칸이 없었더라도 이 시기 몽골부족의 통합과 남쪽으로의 진출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칭기스 칸만큼의 성과는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물자였다... 비단길의 교역 도시들에 가까이 사는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 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 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사람들은 무기도 좋았다. 따라서 그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북쪽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머리를 써야 하고, 더 열심히 싸워야 했다. 이렇게 교역과 습격을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금속과 직물이 북방으로도 흘러들었다.(p59)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中


 유목민의 전투에서 중요한 화살촉은 철로 제작되었으며 대형화/다량화 양상이 나타난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기의 재료인 철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각종 무기와 물자가 유입되는 경로를 장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에 따라 주요한 철의 산지나 교역 통로에 위치한 집단들과 제휴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p129)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남쪽으로 진출을 위한 동기와 진출의 필요성이 오랜 기간 분열되어 온 몽골족을 통합했다고 바라봤을 때,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은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가능태(可能態) 중 실현된 하나의 현실태(現實態)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칭기스 칸이 어느 민족의 피를 받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에서 70년대 우리 경제 발전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발해인 칭기스 칸>은 저자 전원철 박사가 <몽골비사> <라시드 앗 딘의 집사>등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오랜기간 연구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매우 새롭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페이퍼에서 저자의 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것이 사실이지만, 책의 내용 전체가 허무맹랑하다고 말할 위치에 있지 않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이 페이퍼는 다소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제목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쪽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썼음을 말하고 싶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칭기스 칸 = 중국인'을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우리의 역사 연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조선의 왕 위만은 원래 연(燕)나라 출신이다. 연나라는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공격해 복속시키고 관원을 두어 요새를 쌓았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 땅으로 들어가자 노관 휘하에 있던 위만도 망명해 1,000여명의 무리를 모아 머리를 북상투 모양응로 튼 뒤 만이의 옷차림으로 동쪽 국경을 넘어 달아났다.<사기열전 史記列傳 조선열전 朝鮮列傳> 中


 같은 이유로 위만조선의 선조 위만이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고조선(古朝鮮)이 중국 왕조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칭기스 칸의 일대기를 다룬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알기 쉬우면서도 <몽골 비사>의 대부분 이야기를 잘 다루고 있는 훌륭한 책이라 여겨지기에, 시간 되실 때 편한 맘으로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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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8-11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리가 스코틀랜드 인의 후예라는 책도 읽은 적 있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19-08-11 21:56   좋아요 1 | URL
헉. 제가 들은 가장 먼 조상은 이스라엘 ‘단‘ 족과 수메르인, 훈족의 앗틸라 정도가 가장 멀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브레이브 하트」의 후예라는 상상은 감히 못했습니다 ㅋ

2019-08-1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1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