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형은 죽음과 같다. 거기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의 평형은 클라우지우스의 열소멸, 즉 완전히 균일한 우주를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평형 상태에 관심이 있지만 그 외 세계에서의 평형 상태는 절대 종결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은 평형에서 벗어나 존재하고, 궁극적으로 태양에서 오는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입이 지구에 생명이 있게 한다.(p160) <모양> 中


 끊임없이 가용 에너지는 공급받는 계와 진짜 평형 상태가 아닌 어떤 불변의 정상 사태를 향해 변화해 가는 계에서, 열역학 법칙은 그 계의 최종 상태를 결정하기에 더 이상 충분치 않다. 다시 말하면 지속적인 에너지 다발(flux)이 평형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p156) <모양> 中


  필립 볼(Philip Ball)교수의 형태학 3부작 중 <모양>의 리뷰에서 우리는 평형을 이루는 힘을 설명한 엔트로피(entropie)법칙과 이에 대항하는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입(influx)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주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다룬 책은 없을까. 이러한 물음이 이번 페이퍼의 주제이며, 그 주된 답은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 1859 ~ 1941)의 <창조적 진화 L'Evolution creatrice>로부터 찾을 수 있다.

 

 식물과 동물은 양분을 얻지 못하면 소멸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자기 자신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마치 큰 불길이 작은 불길을 그것의 양분을 소모함으로써 다 태워 버리고 소멸시키듯이, 소화의 근본적인 원인인 자연적인 열도 자신이 들어 있는 재료를 소모한다.(466b 29 ~ 32) <자연학 소론집> 中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oteles, BC 384 ~ BC 322)가 <자연학 소론집 Parva Naturalia>에서 동물과 식물을 비교, 대조하면서 수명의 길고 짧음 설명한 바 있다. 베르그손도 진화가 창조적 과정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동물과 식물로부터 출발해 '생명의 약동(elan vital))'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약동은 요컨대 창조의 요구로 이루어진다. 그 약동은 절대적인 방식으로 창조할 수는 없다... 생명의 약동은 거기서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는가?(p375)... 소화, 호흡, 순환계는 동물을 소제하고 수선하며 보호하고 가능한 외적상황에서 독립적이 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데 무엇보다도 동물이 운동으로 소비할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p376)... 그러면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섭취된 양분에서 생긴다. 왜냐하면 양분은 일종의 폭발물로서 이것은 스스로 축적한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한 불똥만을 기다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식물이다.(p378) <창조적 진화> 中


 설명이 길어질 것 같으니,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 1872 ~ 1970)의 도움으로 빠르게 정리해 보자. 그에 따르면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 동물들 가운데 새로운 분기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본능과 지성이 분리된 것으로 파악한다, 또한, 시간을 생명이나 정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특징으로 설명하고, 그중에서도 최고 상태에 이른 본능을 직관 intuition으로, 이와 관련된 시간을 지속 duration이 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 안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은 통합되고,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이 베르그손의 주장이다. 


 시간의 모든 순간들을 동일한 열에 놓고 본질적인 순간도 정점도 최고점도 인정하지 않는 과학에서 변화는 더 이상 본질의 감소가 아니고 지속도 영원성의 용해가 아니다. 시간은 흐름은 여기서 실재 자체가 되며 사람들이 연구하는 것은 흘러가는 사물들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과학적 인식은 그것을 완성하는 또 다른 인식을 불러내야 할 것이다.(p504) <창조적 진화> 中


  베르그손이 말한 생명체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다. 이 개념을 이해할 때, 다음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본다. 즉, 생명체의 시간을 이루는 재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재료가 되는데, 이들 재료는 서로 다른 양과 질을 가진다. 이처럼 재료가 반대되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필멸(必滅)의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닌지 적당히 버무리며  일단 '시간'을 마무리하고, 다시 생명의 약동으로 돌아가자.  


 모든 것들은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며 항상 움직임의 상태에 있다. 주변의 것은 이것에 맞춰 작동하거나 이에 거슬러 작동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는 곳을 옮긴 것들은 본래 주어진 것보다 더 오래 살거나 더 짧게 살지만, 반대되는 것들을 가지는 것들은 모두 어디에서도 영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재료라는 것은 곧바로 반대되는 것을 가지기 때문이다.(465b 25 ~ 32) <자연학 소론집> 中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고체화(固體化) 되기를 거부하는 생명의 움직임이 '생명의 약동'일 것이다. 그리고, <모양>에 따르면 생명의 약동이 직면하는 방해 중 하나가 생명 외부에서 작용하는 엔트로피 법칙이 아닐까 여겨진다. 만약,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 ~ 1947)의 우주론(宇宙論)을 담은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로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 전체는 그 본질적인 점에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유연하고 변형가능한 관(管)속에 풀어 놓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 관들의 끝에서 생명은 무한히 다양한 일들을 수행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의 약동이 물질을 관통하면서 단번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동은 유한하고 단 한 번 결정적으로 주어졌을 뿐이다. 약동이 나타내는 운동은 때로 빗나가고 때로 분열되며 항상 방해에 직면한다.(p379) <창조적 진화> 中

 

 진보의 기술은 변화의 한복판에서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이며, 질서의 한복판에서 변화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생명은 산 채로 미이라가 되기를 거부한다. 질서의 어떤 단조로운 체계 내에 오랫동안 정체하게 되면 정체하게 될수록 생기 없는 사회의 붕괴 소리는 그만큼 더 커지게 마련이다.(p641) <과정과 실재> 中


 <과정과 실재>에서는 서로 다른 대립자(對立者)들의 진보와 변화를 통해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데, 이를 물리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모양>에서 말하는 '엔트로피-반(反)엔트로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거기에 자리잡은 의식에 대해 어떤 가치를, 어떤 절대적인 실재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시간이 끊임없이 스스로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는 이 체계가 일체를 이루고 있는 예측불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의 구체적 전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지속은 물질 자체의 사실이 아니라 물질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의 지속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두 운동은 서로 연대하고 있다.(p498)  <창조적 진화> 中


 우리가 우주론을 구성함에 있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이접과 연접 - 일자 一者에 있어서의 다자 多者 the many in one -, 유동과 영속성, 이대성과 사소성, 자유와 필연, 신과 세계라는 궁극적인 대립자들이다. 이 목록에서 대립자들의 쌍은, 마지막 쌍을 제외하고는 직관의 어떤 궁극적인 직접성을 수반하는 경험 속에 있는 것들이다.(p645) <과정과 실재> 中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모든 생명체는 창조(creation)활동인 진화(evolution)를 하는데, 이러한 창조활동은 가장 발달한 본능인 직관을 통해 '지속'이라는 시간안에서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반면, 생명체 외부에 적용되는 '엔트로피 법칙'은 이에 대해 대항력으로 작용하며 이들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우주적 평형은 이상의 힘들이 만들어낸 균형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PS. 베르그손이 말한 <창조적 진화>의 시간은 유한한 반면,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 ~ 1677)의 시간은 '영원한 상 아래서 sub specie aeternitatis'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영원(永遠)하다. <에티카 Ethica>에서 해당 내용을 옮기며 형태학 3부작을 다시 우려먹은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정신은 영원한 상 아래에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신체의 현재의 현실적 존재를 파악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파악하는 것에 의해서 인식한다.(p354) <에티카 - 제5부 정리 29->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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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0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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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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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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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16: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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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19: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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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2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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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2-04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테리 이글턴 <유물론>에서 읽은 관련 내용이 있어 참고하시라고 옮깁니다. 아직 리뷰로 정리할 시간은 없어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생기론적 유물론vitalist materialism의 전통에 속하며, 그 전통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서 시작하여 스피노자, 셸링, 니체, 앙리 베르그송, 에른스트 블로흐, 질 들뢰즈, 기타 여러 사상가들로 이어진다. 당신이 이 전통에 설 경우에 얻는 혜택 하나는 이원론에 빠졌다는 나쁜 평판을 듣지 않으면서 정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나 에너지 형태의 정신은 물질 자체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전통은 일종의 비합리주의라는 질책을 받아왔다. 생기론적 유물론이 보는 실재는 불안정하고 변덕스럽고 끊임없이 변신한다. 관절염 환자처럼 뻣뻣한 범주들에 따라 세계를 분할하는 경향이 있는 정신은 이 끊임없는 흐름을 따라잡기 어렵다. 하나의 능력으로서 의식은 자연의 복잡성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서툴고 거추장스럽다. 과거에는 정신이 물질의 관성을 추월하곤 했다면, 이제는 변화무쌍한 물질이 정신을 앞지른다.

일부 생기론 학파들은 물질을 관념화하고 에테르화하는etherealize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그 학파들은 물질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물질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육중함을 외면할 위험에 처한다. 이런 온화한 관점에서 본 물질은 더는 아픔의 원천—우리의 프로젝트에 흠집을 내고 목표를 좌절시키는 자—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은 정신의 훌륭함과 유연성을 모두 가진다. 이것은 기이하게도 비물질적인 유형의 유물론이다.˝

겨울호랑이 2019-02-04 13:24   좋아요 1 | URL
^^:) 좋은 글을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에서 언급된 것처럼 데카르트 이래의 ‘이분법‘에 대해 스피노자는 반대에 서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서양에서 비합리주의적이라고 비판되는 학파는 물질과 정신을 분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양철학과 접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여겨집니다.

AgalmA 2019-02-04 13:4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이 그들을 너무 호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도요^^; 테리 이글턴은 스피노자, 베르그송, 들뢰즈의 생기론을 저 위의 일부 생기론으로 해석해 그들이 너무 관념으로 빠졌다고 비판적으로 보고 있어요. 이 책에선 그들에게 호의1도 없습니다. ㅜㄱㅜ (내 들뢰즈에게 흑흑...) 그래서 이 책은 반철학자인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데려오죠. 신체적 유물론, 인간적 유물론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이 이론이 정식 개념화될지는 미지수지만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유물론자인 테리 이글턴다운 스탠스지요.

겨울호랑이 2019-02-04 13:43   좋아요 1 | URL
^^:) 아마 AgalmA님 말씀이 맞을 듯 합니다. 그렇지만, 개똥철학자인 제가 생각하기에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형이하학적인 물질에 대해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이념화시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정한 유물론이 되기 위해서는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실천철학이 연계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