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문화혁명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남윤호 옮김 / 동아시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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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문화혁명이 외면적으로는 학문의 주역 교대, 그리고 그 표현 언어의 변화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직인, 예술가, 상인들이 속어로 자기표현을 시작해, 당시까지 라틴어가 단독으로 지배하던 문자 문화의 영역으로 월경해 들어감으로써 지知의 독점 구조의 일각을 허물어 냈던 것이다. 이런 분야에서 그들은 무엇보다 정확한 관찰과 정밀한 측정 그리고 정확한 기록을 중시했다. 그런 방식으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으며 나아가 자연에 대한 지식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느냐는 진리관에 근본적 전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16세기 문화혁명의 기본적인 의미다.(p689)  <16세기 문화혁명> 中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1941 ~ )는 <16세기 문화혁명>을 위와 같이 정의한다. 저자에 따르면 15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와 17세기 과학혁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16세기는 우리에게 어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기인가. 저자는 책에서 16세기 문화혁명의 여러 요인을 미술, 의학, 상업, 군사학, 기계학,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효과적으로 내용 정리를 위해 16세기 문화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몇 가지 요인을 책 순서와 조금 달리해서 정리해 본다.


  <16세기 문화혁명>에서 저자는 16세기가 이전 세대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바로 속어(俗語)로 쓰여진 서적의 등장이었음을 지적한다. 기존에 유럽에서 학문어로서 역할을 하던 라틴어 대신 각국의 언어로 쓰여진 책이 출간되었으며, 이로 인해 각 나라의 언어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발달은 과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문학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 프랑스의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를 통해 입증된다.


[사진] 셰익스피어(출처 : 위키백과)


 16세기에 이르러 속어로 쓰인 과학서가 등장한 과정을 통해 원래 민중의 대화체 언어였던 속어가 어휘를 풍부하게 더해 가며 사상과 학문의 기술에도 적합하게 성숙되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문법의 정비나 철자법의 확정을 통해 표준화가 이뤄졌다. 이것은 '국어'로서 자리 잡을 요건을 갖춘 언어가 형성돼 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p645) <16세기 문화혁명> 中 


 16세기 문화혁명의 지표는 대학과 인연이 없던 직인, 예술가, 외과의들이 속어로 고학서와 기술서를 쓰기 시작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당시까지 문자 문화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경험과 사고를 공표함으로써 학문 세계로 월경해 지식의 독점 구조에 바람 구멍을 뚫기 시작했던 것이다. 16세기 문화혁명은 언어혁명과 병행해 진행됐다.(p617) <16세기 문화혁명> 中


 그리고, 이러한 국어(國語)의 발달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이전 세기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 ~ 1468)에 의해 유럽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금속활자는 사상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종교 개혁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으며, 과학에서는 해부학과 식물학에 있어서 도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정밀한 도판이 딸린 과학서, 기술서는 그 뒤 16세기에 이르러 잇따라 인쇄돼 근대 자연과학서, 공학서의 원형을 형성하게 된다. 아그리콜라 Georgius Agricola의 광산학, 에르커 Lazarus Ercker의 천체관측용 기기, 그리고 오르텔리우스 Abraham Ortelius 나 메르카토르 Gerard Mercator의 지도책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언어 해석에 일관하던 스콜라 학을 초월한 것이었다.(p274),,, 언어에 의한 전달이 거의 절망적이던 시대에 인쇄된 도상은 거의 유일한 전달 수단이었다. 정확한 도판이 목판(나중엔 동판)을 통해 원화와 똑같이 몇 장이나 복제될 수 있게 돼서야 비로소 이들 과학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p276)<16세기 문화혁명> 中


 이러한 상세한 도상 표현은 유럽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저자는 <16세기 문화혁명> 안에서 이러한 변화가 기술자 계급에서 발생했으며, 기존 기득권이었던 소수 엘리트 지식인과의 대립(對立)을 가져왔다고 파악한다.


 16세기 문화혁명은 선진적인 직인, 기술자와 알베르티와 같은 소수 엘리트 지식인이라는 양 진영의 긴장감을 내포한 채 진행됐던 것이다.(p65) <16세기 문화혁명> 中


 라틴(Latin)어와 스콜라(scholasticu) 철학으로 대표되는 소수 엘리트 지식인들에 대해 속어와 근대 과학 철학을 가진 기술자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경쟁이 16세기 문화 혁명을 가져온 동인(動因)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은 질의 자연학이다. 거기엔 정량화를 지향하려는 의식을 희박했다. 이에 비해 근대에 이르러 정량화를 추구하려는 인식이 나온 배경에는 다름 아니라 상품생산과 화폐경제의 확대가 존재한다.(p302) <16세기 문화혁명> 中


  16세기에 플라톤(Platton, BC 427 ~ BC 348)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로 대표되는 질(質)의 자연학, 형이상학적 기하학(幾何學)은 뒤러(Albrecht Durer, 1471 ~ 1528)로 대표되는 현실의 필요에서 비롯된 대수학(代數學)으로 대표되는 현실 기술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사진] 뒤러와 원근법(출처 : 위키백과)


 뒤러는 기하학에서 유클리드의 탄탄한 논리의 철감을 벗겨내,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는 기법으로서 직인과 기술자에게 제공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뒤러가 현실 세계에 대한 수학의 광범위한 적용 그리고 근대적 수학의 유용성을 공공연히 논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기하학은 이데아의 세계 -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는 외형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적 존재의 세계 - 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뒤러의 기하학은 다름 아닌 '목수의 기하학'이다. 이는 그 이전엔 학문적 고찰의  대상에서 제외됐던 분야이며, 문장으로 기술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뒤러는 '목수의 기하학'을 저서로 펴냄으로서 그것이 현실 인식에 매우 유용한 존재임을 보여주었다.(p105) <16세기 문화혁명> 中


 이러한 경쟁과 도전을 통해 과학(science)와 기술(technology)가 결합되어 17세기 과학-기술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는 특히 수학(mathematics)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17세기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에 의해 대수학과 기하학이 결합되면서 결실을 맺는데, 이를 근거로 저자는 16세기 문화혁명이 과학혁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주장을 편다. 저자는 책에서 말하고 있지 않지만, 후에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에 의해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종합되었던 사상의 종합 역시 이 시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추론해 본다.


 근대 대수학은 16세기 후반의 비에트와 17세기의 데카르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해석기하학과 미적분도 17세기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치의 손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성과는 르네상스 시대 대수학의 발전에 힘입는 바 크다. 르네상스 대수학은 상업수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상인과 산수교사의 손에서 시작돼 16세기 중반 하나의 결말을 봤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근대수학의 단서는 상인들이 주도한 상업수학이었다.(p431) <16세기 문화혁명> 中


 이처럼 16세기는 유럽에 있어서 17세기 산업 혁명과 18세기 정치 혁명을 만들어내기 위한 동력을 쌓아가고 있었던 시기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책을 덮고 우리에게 16세기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유럽과는 달리, 우리에게 16세기는 너무도 아픈 시기였다. 우리의 16세기는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1598)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 1637)이 이어지면서 이전 시대까지 축적되어온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 속에서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로 대표되는 노론(老論)이, 사회적으로는 종법(宗法)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16세기가 우리에게 '상실의 시대'였기에, 경직되고 움츠러들었던 사회의 모습 속에서 이 시기가 우리에게 주는 아쉬움은 클 수 밖에 없다.


[사진] 우암 송시열(출처 : 위키백과)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 <16세기 문화혁명>은 우리에게 유럽 근대화의 맹아(萌芽)가 16세기부터 싹트고 있었음을 여러 분야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또한, 이러한 가능성이 언어 혁명과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사상의 확산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16세기와 마찬가지로 인터넷(Internet)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과거 우리 조상들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를 준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기에 <16세기 문화혁명>은 읽고 생각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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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5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5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1-05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제부터 <에디톨로지>를 읽고 있는데요. 뒤러의 원근법 이야기에서 올려주신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실려있네요.
다른 책에서 같은 사진 보게 되니 무척 반가운 마음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1-05 13:23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뒤러의 원근법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 것을 보니 매우 중요한 사건임을 알겠네요. 단발머리님 덕분에 저 역시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