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악하악 - 이외수의 생존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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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본가에서 저녁을 보내던 중 예전에 읽었던 이외수의 <하악하악>을 펴들었습니다. <하악하악> 속에서 작가가 툭툭 던지듯이 독자에게 건넨 말들은 때론 퉁명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웃음짓게도 만들고, 어느 구절에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게 만들더군요.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을 웃겼다 울렸다하게 만드는 이러한 힘이 작가의 역량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여러편의 글이지만, 그 중에서 특히 마음에 와닿은 몇몇 구절과 제 생각을 옮기며 리뷰를 대신해 봅니다.

 

 거리에서 행색이 남루한 사내 하나가 당신을 붙잡고 이틀을 굶었으니 밥 한 끼만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했다. 당신을 그를 불쌍히 여겨 수중에 있던 삼만 원을 모두 털어주었다. 그런데 사내가 그 돈으로 회칼을 구입해서 강도살인을 저질렀다. 당신이 사내에게 베푼 것은 선행일까 악행일까.(p14)

 

 낯선 이가 나에게 다가와 교통비가 떨어졌다며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있다. 때론 상습범으로 의심되기도 해 외면할까 생각이 드릭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지갑을 열게 된다. 인정(人情)의 마지노선이랄까. 이런 상황에서도 외면한다면 사람사는 곳같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악하악>에서 제시한 상황처럼 내가 준 돈으로 강도살인이 발생했다면...... 그렇게 된 현실이 가슴 아프겠지만, 결과로 인해 내 의도가 왜곡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여겨진다. 만약, 그런 기사를 접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지갑을 열지 않을까.  

 

 그리움은 과거라는 시간의 나무에서 흩날리는 낙엽이고 기다림은 미래라는 시간의 나무에서 흔들리는 꽃잎이다. 멀어질수록 선명한 아픔으로 새겨지는 젊은 날의 문신들.(p34)

 

 '그리움 - 과거라는 시간의 나무', '기다림 - 미래라는 시간의 나무'라면 '현재라는 시간의 나무'에는 무엇이 달려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하악하악>의 다른 본문 속에서 찾아본다. '현재라는 시간의 나무'에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태양을 받는 나뭇잎이 활짝 열려 있지 않을까. 현재를 살아가는 생명의 나무에는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의 동경보다는 광합성(光合成) 활동에 필요한 잎이 필요할 것이다. 아님 말구.

 

 척박한 땅에 나무를 많이 심는 사람일수록 나무그늘 아래서 쉴 틈이 없다. 정작 나무그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은 그가 뙤약볕 아래서 열심히 나무를 심을 때 쓸모없는 짓을 한다고 그를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이다.(p41) 

 

 예술이 현실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카알라일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그렇다, 태양으로는 결코 담배불을 붙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태양의 결점은 아니다.(p51)

 

 어디 예술만 그럴까. 자신의 삶을 가치없게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태양으로 담배불을 붙이려는 이들은 아닐까. 자신을 아는 것은 예술을 아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과연 얼마나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일까?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을 만나면 그래, 산에는 소나무만 살지는 않으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p181)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해도, 창 밖의 산에 온통 보라색 꽃만피어있다면 아마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을 것이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이라 했던가. 우리 사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박사모 꽃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느 중학교 한문시험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한자말의 뜻을 적으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한 학생이 '백 번 묻는 놈은 개만도 못 하다'라고 답을 적었다. 한문 선생님은 그 학생의 창의력을 가상스럽게 생각하여 반만 맞은 걸로 평가해주었다. 실화다.(p134)

 

 1990년 걸프전(The Gulf War)이 한창일 때 일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국사 시험 중 통일신라시대 군사 편제에 대해 묻는 주관식 문제가 출제되었다. 정답은 9서당 10정. 그런데, 어느 재치있는 친구가 당당하게 '다국적군'이라고 답을 적었다. 채점을 담당했던 아르바이트생은 그 학생의 재치를 가상스럽게 생각하여 정답으로 처리해주었다. 실화다. 거의 30년 전의 일이니 웃으며 넘어갔지, 내신 점수가 중요해진 요즘 일어났다면..... 생각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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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11-10 0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생일 책 택배가 늦어서 툴툴 댔었잖아요. 헌데 그즈음 cj 대한 통운에서 사고가 났더군요. 그걸 이제야 알아서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정권도 바뀌었고 조금 안심하며 내 관심사에 집중해도 되겠지 싶어서 뉴스를 뜸하게 봤더니.... 세상은 매일 이리 문제 투성인데 나는 매일 책타령만 하고 있....

오늘 알쓸신잡에서 실향민과 귀소 본능 얘기가 나왔죠. 유시민은 경주가 고향이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만약 갈 수 없다 생각하면 무척 가고 싶어질 거라고 했죠. 겨울호랑이 님의 저 보라색 꽃 사연 같은 격이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이런 삶의 유격들 속에서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겨울호랑이 2018-11-10 05:24   좋아요 2 | URL
현실을 생각한다면 항상 우리가 촛불을 들던 때처럼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보면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 우리를 불행하게도 만들지만, 다른 한 편으로 삶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네요. 결국 우리 모두의 마음은 꼭 하지말라는 것만 하는 ‘청개구리‘심보일까요 ^^:)

2018-11-10 0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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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0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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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0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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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1 19: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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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7 0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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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7 0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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