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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그의 저술과 사상에 관한 총설
W. D. 로스 지음, 김진성 옮김 / 누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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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데아론
W. D. 로스 지음, 김진성 옮김 / 누멘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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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그의 저술과 사상에 관한 총설
W. D. 로스 지음, 김진성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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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플라톤(Platon, BCE 428 ? ~ 348 ?)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 Theaitetos>에서는 제기된 '앎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난관(aporia)에 봉착되고, 소크라테스는 테오도로스와 동틀 녘에 다시 만나기로 하는 대화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밤사이 무너져 내린 대화의 논리 대신 떠오르는 햇살이 비친 후 드러나는 것은 단일한 총체로서의 이데아(idea)이며, 필멸의 감각 너머에 있는 불멸의 형상(形像) 그리고 형상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유(思惟)와 상기(想起)다. 


 플라톤이 자신의 이데아론이 사실상 기대고 있는 근거들을 아주 풍부하게 서술하는 곳은 <테아이테토스>이다. 왜냐하면 이데아론은 감각과 앎[인식]이 서로 완전히 다르고, 앎은 감각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존재들을 그 자신의 대상들로 요구한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감각과 앎의 차이에 관한 가장 정교한 증명을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곳도 <테아이테토스>이다. 더 나아가, 그는 명시적으로 <티마이오스>에서 말하듯이, 그의 이론은 앎과 참인 의견은 완전히 다르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가장 정교한 증명이 <테아이테토스>에 제시되어 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20


 

 형상은 이성(理性, logos)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이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동굴 안의 우리는 동굴 밖 태양과도 같은 불변의 진리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태양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야 하지만, 손발이 묶인 죄수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혼(魂)이라면 모를까.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논증에 실패하며 마무리되는 <테아이테토스>의 논리 붕괴는 앎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긍정을 의미한다.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누가 참된 생각을 우연히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자체로는 물론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참입니다. '정견'을 '이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플라톤)는 [정견] 인식= 인식에 의거한 바른 견해라는 관점에 이릅니다. 가능하지 않는 정의입니다. 지각도, 바른 견해도, 이성에 의한 정견도 인식일수는 없을 겁니다. _ 니체,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외 (유고 1864 가을 ~)> <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 , p120/387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로서 진리에 근접하는 경계면은 '서술될 수 있는 것이면서 판단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감각의 세계에 살면서 보편적인 진리를 인식하는데는 실패할 지라도, 동굴 속의 흐릿한 불로 간접적으로 형상을 인지하듯 개별적인 특징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며 더듬으며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보여주는 수많은 은유를 통해 논리를 끌어가는 방식은 이데아가 드러난 구체성으로부터 진리를 찾아가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형상의 세계로의 여정 - 양극과 유비- 이라 할 것이다.


 그(플라톤)는 한 가지 감각만의 대상들인 소리와 색과 같은 대상들과, 우리가 여러 감각의 대상들에 공통된 것으로 인정하는 특징들 - 존재와 비존재, 다름과 같음, 둘임과 하나임, 비슷하지 않음과 비슷함, 짝수임과 홀수임,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것들 모두' - 을 구별한다. 더 나아가 그는 뒤의 것들은 감각이 아닌 사유에 의해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두 가지 접근 관점으로부터 플라톤은 아주 폭넓게 미치는 속성들의 부류를 따로 뽑아내는 데에 이른다. 이것을 이후 사상가들은 초월자들(transcendentalia)로 인정하게 되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19


 현실 속에서 이데아는 서술된다. 그 서술은 언제나 거짓되지 않고 참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 플라톤의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가 연결되며, 이러한 세계관은 고대를 넘어 중세로까지 이어지며, 이데아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로 대체된다. 


 196c  왜냐하면 이런 일을 겪는 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을,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 중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린 거짓된 판단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일세... 사실은 거짓된 판단이 없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 수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87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프로슬로기온 Proslogion>의 신 존재 증명은 순수 사유에 의한 이데아의 인식과 언제나 참인 판단에 의한 논증의 전형적인 예를 잘 보여준다. 거칠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존재'를 가정하고, 존재성에 대한 판단 유무로 존재성을 부여하며, 이 존재보다 더 큰 존재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을 증명하는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테아이테토스>의 깊은 영향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단순히 지성 속에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이 생각될 수 있고, 이것은 [지성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단지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지성 속에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합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6


 그런 실재는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실재는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실재가 바로 우리의 주님이요 우리의 하느님인 당신입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8


 이러한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적 논증에 대해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은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s)을 통해 논박한다. 플라톤의 논리- 서술 자체가 참이며, 실존을 증명한다 - 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며, 더 나아가 형상의 세계가 감각의 세계가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러셀은 주장한다.


 내가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네가 "실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데?" 라고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그것은 황금 산이야"라고 말할 경우, 나는 황금산이라는 구에 일종의 실존 existence을 돌리고 있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플라톤의 이데아는 문장에서 주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주어는 동사와 형용사로 설명된다. '스콧은 스코를랜드인이다', '스콧은 1771년에 태어났다', '스콧은 아이반호도 썼다'와 같이 스콧은 여러가지로 서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된 문장 하나하나가 스콧의 존재성을 실증하는 것은 아니다. 스콧의 존재성은 '독립된 존재가 있다'는 존재성에 대한 별도의 기술로만 참/거짓 판단이 가능하다. 플라톤의 논증에서와 같이 서술되었다는 것만으로 실증되거나, 사유만으로 실재를 파악한다는 안셀무스의 논증은 기술이론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사유는 결코 형상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고, 더욱이 형상의 존재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기술 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것 the so-and-so'이라는 형식의 구를 포함한 진술은 올바르게 분석될 때, '그러한 것'이라는 구가 사라진다. "스콧은 <웨이벌리>의 저자였다 Scott was the author of <Waverly>"라는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기술 이론은 이러한 진술을 "한 사람이, 그리고 오로지 한 사람이 <웨이벌리>를 저술했으며, 그 사람은 스콧이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또는 더 충분히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x가 c라면 'x는 <웨이벌리>를 썼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된 존재 entity가 있고, 더욱이 c는 스콧이다." '더욱이'라는 낱말 앞에 첫 부분은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혹은 실존했거나 실존할 것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를 정의한다. 따라서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의미한다. "x가 c라면 'x는 황금이고 산이다'라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적 존재는 없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기술 이론에 따르면 '실존'은 기술구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스콧이 실존한다"라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문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되어 '실존 existence'을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1/1474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를 통해 아포리아를 통해서 논리의 한계, 감각세계의 한계를 보여주며, 이로부터 증명할 수 없는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여백으로 제시했다면, 러셀은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사실은 '존재에 관한 서술'이라는 끈으로 연결된 무수히 많은 서술의 집합으로서의 '감각의 이데아'를 보여주며 고대 형이상학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처럼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형상의 속성이 실은 감각의 연장임이 드러났다. 실존은 과연 서술 안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페이퍼에서 하이데거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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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생명과 안전을 돌보는 일을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지점에 와 있다. 거시적인 시야로 참사 이후 떠오른 과제 및 질문을 차분히 추리고 벼려보는 동시에 이웃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에 공명하여 서로의 마음을 돌보는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실상 연속적인 현상이라 말할 근거도 여기서 재차 확인된다. 둘 다 ‘전체’의 쇠락을 불가피하다고 보되 다만 그것을 향수 어린 비애감으로 돌아보느냐 아니면 긴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경축하느냐 사이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총체성 개념이 결국은 자본주의를 빈틈없이 완결된 전체로 물신화하지 않느냐는 우려에 관해서는, "맑스에게 자본주의의 ‘총체성’은 위기를 불가결한 계기로서 포함하고 (…) 여기에 깔린 전제는 전체란 결코 진짜 전체가 아니라는 것, 전체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라 강조한 지젝의 설명이 적실하다.

이행은 예시와 다르게 지금-여기에서 출발하여 심연 같은 간극을 한걸음씩 채워야 하고, 이 과정이 참된 이행이기 위해서는 또한 ‘전체’를 시야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다가갈 ‘도래하기 어려운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만큼이나 다양하게 제출되어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소설에 이르러 돌봄활동 속 젠더 역학이 뚜렷이 폭로되었다. 동시에 돌봄이 여성이나 주변인의 일로 간주된 채 급격히 시장화하고 공공 시스템이 부재하는 오늘날의 상황도 조밀하게 드러났다.인물, 계층, 세대 간 갈등이나 시장 안의 수요자와 제공자 사이의 갈등이 전경화하는 가운데, 돌봄을 둘러싼 ‘가부장×자본’의 문제가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음도 환기시켰다. 그런데 이런 폭로는 돌봄이 시장의 교환체계 속에 고착해 있다는 착시를 만들거나 고된 노동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돌봄활동의 특수성과 정동을 망각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돌봄 혹은 소외된 노동은 시민권을 얻는 동시에 여전히 폄훼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갇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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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의 치세에 이어진 상대적 관용은 편의주의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페르디난트는 종교적 사안에서 중용이 가능하다고 확신했고,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간의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최상의 해법이 서로 경쟁하는 종파 간의 타협이라고 믿은 에라스뮈스와 비슷했다.

1560년대부터 스페인령 신대륙은 대서양적 현상일 뿐 아니라 태평양적 현상이기도 했다. 볼리비아에서 채굴된 은은 이제 (동쪽이 아니라) 아카풀코를 거쳐 서쪽으로, 그러니까 1571년에 스페인이 건설한 필리핀의 마닐라 항구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비단이나 도자기와 교환되었다.

스페인의 신대륙과 구대륙은 서로 달랐다. 전자는 마드리드에서 일률적으로 운영하는 식민 사업의 대상이었고, 후자는 복합 군주국이었다. 다시 말해 스페인의 구대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단일 통치자 아래에 모여 있지만, 각 부분은 여전히 개별적인 특권과 제도, 대표단을 보유하는 여러 땅들과 왕국들의 집합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한 통치자는 그런 입술 때문에 "포첸포이들Fotzenpoidl"(대략 "멍청이 얼굴"로 번역할 수 있다)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근친결혼은 정신병, 뇌전증, 사산, 유아 질병의 원인이었다. 1527년과 1661년 사이에 스페인 왕위 혈통으로 태어난 34명의 어린이 가운데 10명이 1세가 되기 전에, 또 17명이 1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함으로써 유아사망률 80퍼센트를 기록했다(80퍼센트는 당시의 평균 유아 사망률보다 4배 높은 수치였다).

거의 똑같은 이 2점의 그림에서 티치아노는 중앙 유럽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톨릭 신앙에 취한 서로 다른 접근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자는 평화와 타협이라는 선물을 들고 오는 반면, 후자는 이제 막 레판토에서 승리를 거둔 호전적인 스페인의 칼을 가지고 온다.15

종교적 관용은 일부분 철학적 선택이었다. 그것은 헤르메스주의, 그리고 모든 현상을 단일한 관념의 표현으로 보는 믿음과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양극단 사이의 "중도"를 지향하는 인문주의적 모색, 그리고 극단적 행위를 삼가고 절제하도록 가르치면서 16세기 후반에 점점 인기를 끈 신新스토아 철학의 지적 태도와도 어울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해외 영토에서는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했고, 왕의 친림을 가장하는 표현이 물리적 상태를 대체했다. 그곳에서는 이상화된 국왕의 허상을 통해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권의 내재성과 위엄에 호소하는 도상학적 표현을 통해서 실재와 상상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런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는 왕을 상징했을 뿐만 아니라 대상과 제재를 조형적 요소로 대체했다. 또한 왕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국왕다움이라는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왕의 부재를 감추기도 했다.

바로크는 폭군들을 위한 호화로운 배경막으로 전락할 운명이 아니었다. 바로크는 통속적이다. 그러나 통속적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에서 그렇고,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 바로크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크는 르네상스 매너리즘의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양식으로부터 발전했다. 그러나 바로크가 본격적인 추진력을 얻은 계기는 예술이 종교에 복무해야 하고, "천국을 슬쩍 보여줄" 만큼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고 선언한 16세기 중엽의 트리엔트 공의회였다.

바로크는 암호로 말한다. 그러나 감추고 숨기기 위해서 쓰이는 연금술사들의 상징적 언어와 달리 바로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호를 사용한다. 바로크의 핵심은 풍유이고, 풍유는 흔히 상징(인간 조건의 양상이나 태도나 행동이 농축된 그림 문자나 주제)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바로크 예술에서 주제는 흔히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는 운문과 결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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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2첩 병풍에는 화성유수가 통솔하는 세 종류의 행사가 한 화면에 동시에 그려졌다. 특정한 날에 실제로 치러진 행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화성유수의 권한과 위용을 가시적으로 잘 표출할 수 있는 주요 임무를 한 화면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구성한 것이다.

관할 지역을 배경으로 그려진 지방관의 행렬은 지방관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지역의 읍격과 도시의 위상을 과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주문자나 화가 모두 행렬도의 오랜 전통에 익숙하지만 화려한 의장이 주는 압도적인 시각적 효과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읍성도 병풍은 초기에는 관아에 설치될 용도로 읍성의 전모를 인물 묘사 없이 그리기 시작했으며 〈화성전도〉가 연폭 읍성도 병풍의 유행에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용이든 감상이든 읍성도 병풍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점차 관찰사나 수령의 행렬이 첨가되었다.

이렇듯 19세기에는 읍성도 병풍이 반드시 관찰사의 업무 수행을 돕는 자료적 기능에 머물지 않고 감상물로 개인적으로 수장되었다. 그렇다면 관찰사의 위용이 시각화된 그림들이 반드시 관찰사 한 사람을 위해 제작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정할 수 있는 사실이나 행사를 그린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그 외에 관찰사나 수령의 이미지가 포함된 읍성도 병풍은 이상적인 관로官路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어 대형 화면이 주는 장식 효과와 함께 개인적인 소장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듯하다.

이처럼 지방 수령으로 재임할 때 이룩한 특정한 공적이 아닌, 부임 그 자체를 기념화의 주제로 삼은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 사가기록화에 나타나는 새로운 특징이다. 배경을 무시하고 오로지 행렬만을 보여주는 반차도 형식을 채택한 것도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료라면 공적인 회사繪事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반차도의 전통에 익숙했을 테니 수령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는 화려한 기치와 인물들이 행진하는 부임 행렬이 제일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에 정약용이 『목민심서 』에서도 말했듯이 지방관들이 부임 후 실무를 시작하면서 우선으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화공을 불러 지도[四境圖]를 작성하는 일이었다.19 소속 군현의 지형과 실정을 정확히 반영한 지도를 정당正堂의 벽에 걸어두고 행정에 참조하라는 것이다. 관할 구역의 상세한 지리적·인문적 정보를 담고 있는 대형 읍성도 병풍은 이와 같은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산수 표현에서 특정한 수지법이나 준법이라고 부를 만한 표현의 구사 없이 자유롭게 붓질을 가하는 것도 중앙 화단의 교육과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화사의 특징이다. 원근에 관한 의식이나 공간의 깊이에 대한 관심이 없어 화면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한편 19세기 경화사족들은 기행 탐승을 즐겼고 이를 기념한 기행사경도의 제작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풍조가 있었으며, 동시에 집안에 소장된 가전의 기행사경화첩이나 화병畵屛을 돌려보고 다시 제작함으로써 문벌의식을 표출하는 한 방법으로 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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