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의 치세에 이어진 상대적 관용은 편의주의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페르디난트는 종교적 사안에서 중용이 가능하다고 확신했고,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간의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최상의 해법이 서로 경쟁하는 종파 간의 타협이라고 믿은 에라스뮈스와 비슷했다.

1560년대부터 스페인령 신대륙은 대서양적 현상일 뿐 아니라 태평양적 현상이기도 했다. 볼리비아에서 채굴된 은은 이제 (동쪽이 아니라) 아카풀코를 거쳐 서쪽으로, 그러니까 1571년에 스페인이 건설한 필리핀의 마닐라 항구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비단이나 도자기와 교환되었다.

스페인의 신대륙과 구대륙은 서로 달랐다. 전자는 마드리드에서 일률적으로 운영하는 식민 사업의 대상이었고, 후자는 복합 군주국이었다. 다시 말해 스페인의 구대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단일 통치자 아래에 모여 있지만, 각 부분은 여전히 개별적인 특권과 제도, 대표단을 보유하는 여러 땅들과 왕국들의 집합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한 통치자는 그런 입술 때문에 "포첸포이들Fotzenpoidl"(대략 "멍청이 얼굴"로 번역할 수 있다)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근친결혼은 정신병, 뇌전증, 사산, 유아 질병의 원인이었다. 1527년과 1661년 사이에 스페인 왕위 혈통으로 태어난 34명의 어린이 가운데 10명이 1세가 되기 전에, 또 17명이 1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함으로써 유아사망률 80퍼센트를 기록했다(80퍼센트는 당시의 평균 유아 사망률보다 4배 높은 수치였다).

거의 똑같은 이 2점의 그림에서 티치아노는 중앙 유럽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톨릭 신앙에 취한 서로 다른 접근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자는 평화와 타협이라는 선물을 들고 오는 반면, 후자는 이제 막 레판토에서 승리를 거둔 호전적인 스페인의 칼을 가지고 온다.15

종교적 관용은 일부분 철학적 선택이었다. 그것은 헤르메스주의, 그리고 모든 현상을 단일한 관념의 표현으로 보는 믿음과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양극단 사이의 "중도"를 지향하는 인문주의적 모색, 그리고 극단적 행위를 삼가고 절제하도록 가르치면서 16세기 후반에 점점 인기를 끈 신新스토아 철학의 지적 태도와도 어울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해외 영토에서는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했고, 왕의 친림을 가장하는 표현이 물리적 상태를 대체했다. 그곳에서는 이상화된 국왕의 허상을 통해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권의 내재성과 위엄에 호소하는 도상학적 표현을 통해서 실재와 상상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런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는 왕을 상징했을 뿐만 아니라 대상과 제재를 조형적 요소로 대체했다. 또한 왕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국왕다움이라는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왕의 부재를 감추기도 했다.

바로크는 폭군들을 위한 호화로운 배경막으로 전락할 운명이 아니었다. 바로크는 통속적이다. 그러나 통속적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에서 그렇고,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 바로크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크는 르네상스 매너리즘의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양식으로부터 발전했다. 그러나 바로크가 본격적인 추진력을 얻은 계기는 예술이 종교에 복무해야 하고, "천국을 슬쩍 보여줄" 만큼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고 선언한 16세기 중엽의 트리엔트 공의회였다.

바로크는 암호로 말한다. 그러나 감추고 숨기기 위해서 쓰이는 연금술사들의 상징적 언어와 달리 바로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호를 사용한다. 바로크의 핵심은 풍유이고, 풍유는 흔히 상징(인간 조건의 양상이나 태도나 행동이 농축된 그림 문자나 주제)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바로크 예술에서 주제는 흔히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는 운문과 결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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