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빈 현대의 고전 5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스트리아에서는 대부분의 분야에 자유주의 이후 post-liberal 시대의 특징인 문화의 ‘현대성 modernism‘이 나타난 것이 1890년대인데, 그 후 20년 만에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새로운 고급문화가 마치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자라났으며 그 온실의 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 - 머리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순수이성비판 세트 - 전2권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58,000원 → 55,100원(5%할인) / 마일리지 2,900원(5% 적립)
2020년 05월 08일에 저장
절판
형이상학 서설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2년 9월
27,000원 → 25,650원(5%할인) / 마일리지 1,3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20년 04월 24일에 저장

순수이성비판 2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30,000원 → 28,500원(5%할인) / 마일리지 90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20년 04월 24일에 저장

순수이성비판 1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28,000원 → 26,600원(5%할인) / 마일리지 84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20년 04월 24일에 저장



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형이상학 서설 대우고전총서 32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형이상학은 본래 선험적 종합명제들만을 다루는 것이며, 이러한 명제들만이 형이상학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형이상학은 물론 그 개념들의 많은 분해들을, 그러니까 분석판단들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수행절차는 사람들이 자기의 개념들을 분해함으로써 한갓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여느 다른 인식방식에서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직관과 개념들에 의한 선험적 인식의 산출이, 결국은 또한 선험적 종합명제들의 산출이, 그것도 철학적 인식에서의, 그러한 산출이 형이상학의 본질적 내용을 이룬다.... 우리에게 오직 하나 남은 것은 '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하는 비판적 물음이거니와, 이 물음에 대한 답변 여하에 따라서 우리는 장차 우리의 거동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p143)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의 계획서라 밝힌 <형이상학 서설 Prolegomena>은 '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가?'라는 하나의 물음에 대한 칸트의 답이다. 결론부터 보자면, 칸트의 형이상학은 '인식과 그 서술이 지향해야만 하는 완성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초월적 이념(이성)에 의해 형이상학이 성립됨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번 리뷰에서는 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월적 이념들의 총괄은 자연적인 순수 이성의 본래적 과제가 되는데, 이 과제는 이성으로 하여금 순전한 자연고찰을 떠나 모든 가능한 경험을 넘어가게 하고, 이런 노력 중에서 형이상학이라고 일컫는 것을 성립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p307)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인식들은 경험적이지 않으며, 선험적 판단만을 담고 있어야 하며, 선험적 판단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구분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인식의 원천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이 경험적일 수 없음은 이미 그 인식의 개념 속에 들어 있다... 형이상학적 인식은 선험적 인식, 바꿔 말해 순수 지성과 순수 이성으로부터의 인식이다.(p126)...  형이상학적 인식은 순정하게 선험적 판단들만을 함유해야 한다... 판단들은 내용에 따라 한낱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덧붙이는 바가 아무것도 없거나, 확장적이어서 주어진 인식을 확대하거나 한다. 전자는 분석판단이라고, 후자는 종합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p127)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는 이 중에서 분석판단들은 모순율에 의거하기에 선험적 판단들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종합판단들은 후험적인 판단들도 있지만, 모순율 이외의 다른 법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분석적 판단과 다르다. 칸트는 형이상학적 판단은 모두 종합적 판단이라 보았기 때문에, 이후 칸트의 관심은 종합판단으로 향한다.


 분석판단들은 술어에서 주어의 개념에, 비록 그다지 명료하지 않고, 명료한 의식으로써 생각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미 실제로 생각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모든 분석판단들은 전적으로 모순율에 의거하며, 그 본성상 선험적 인식들이다. 긍정적 분석판단의 술어는 이미 앞서 주어개념 안에서 생각되는 것이므로, 이 술어가 모순 없이는 주어 개념에 대해 부정될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석적 명제들은 선험적 판단들이다.(p129)...  그 근원이 경험적인 후험적 종합판단들이 있다. 그러나 또한 선험적으로 확실하고, 순수 지성과 이성에서 생겨나는 그러한 종합판단들도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이것들이 결코 분석의 원칙, 곧 모순율에 따라서만 생겨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p129) <형이상학 서설> 中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은 모두가 종합적이다. 사람들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판단들과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 중에는 그 대다수가 분석적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이 학문의 목적이 전적으로 지향되어 있으며, 언제나 종합적인, 형이상학적 판단들을 위한 수단을 이룰 뿐이다.(p141) <형이상학 서설> 中


 이후 논의에서 비록 우리가 형이상학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순수 수학과 순수 과학의 존재를 통해 형이상학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이들은 경험을 통해 인식하지 않기에, 경험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일까?


 비록 우리가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선험적인 순수한 종합적 인식, 곧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이 실제로 있고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다행스런 일이다. 왜냐하면 저 두 학문은 한편으로는 순전한 이성에 의해, 또 한편으로는 경험에서 오는 보편적 일치에 의해 명증적으로 확실하되, 그럼에도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널리 인정되는 명제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어떻게 선험적 종합 인식이 가능한가만을 물으면 된다.(p145)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정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을 '감성'이라고 부르고, 감성을 통한 직접적 인식을 '직관'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직관과 실체의 개념이 선험적이라는 사실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이들은 경험과 무관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이다.  


  우리가 선험적으로 사물들을 직관할 수 있는 것은 감성적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일 뿐이며,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또한 객관들을 그것들 자체인 바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현상할 수 있는 바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간과 시간은 순수 수학이 그것의 명증적인 동시에 필연적인 것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식과 판단들의 기초에 두고 있는 그러한 직관들이다....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 순수 직관들이라는 사실을 통해, 공간과 시간은 모든 경험적 직관, 다시말해 현실적 대상들의 지각에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리고 이것들에 맞춰서 대상들이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러나 물론 단지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바대로만 인식될 수 있는, 우리 감성의 순전한 형식들임을 증명한다.(p161) <형이상학 서설> 中


 직관이 곧 영감을 통해 내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모든 현실적인 인상들에 선행하는 나의 주관 안의 감성 형식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함유하고 있지 않을 때에만, 나의 직관이 대상의 현실성에 선행하여 선험적 인식으로 생기는 일이 오직 유일하게 가능하다.(p159) <형이상학 서설> 中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이며, 우리는 이들 안에 있는 대상들을 감관을 통해 직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감관을 통해 직관적으로 얻은 지식은 경험적이고 주관적이다. 이러한 지식이 개인의 경험으로 머무르지 않고,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직관이외의 다른 요소인 지성이 필요하다.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지성이 모두 필요하다. 직관을 통해 들어온 '표상'과 지성을 통한 '판단'이 통일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들이 주관성과 객관성이 모두 획득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대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직관은 오직 감관들을 매개로 해서만 일어난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하지 않으며, 단지 반성할 뿐이다.(p169) <형이상학 서설> 中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한에서 경험적 판단들은 경험판단들이다. 그러나 단지 주관적으로만 타당한 경험적 판단들을 나는 순전한 지각판단들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아무런 순수 지성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사고하는 주관에서 지각들의 논리적 연결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자는 항상 감성적 직관의 표상들 위에 지성에서 근원적으로 산출되는 특수한 개념들 또한 필요로 하며, 이 개념들이 바로 경험판단을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만드는 것이다.(p189) <형이상학 서설> 中


 감관들의 일은 직관하는 것이고, 지성의 일은 사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고함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통일하는 것이다. 이 통일은 한낱 주관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여 우연적이며 주관적이거나, 절대적으로 생겨나 필연적이거나 객관적이다. 한 의식에서 표상들을 통일함이 판단이다. 그러므로 사고함은 판단함 또는 표상들을 판단들 일반과 관계 맺게 함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판단들은 표상들이 한 주관에서의 의식과만 관계 맺어지고, 그 안에서 통일이 되면 한낱 주관적이고, 혹은 표상들이 의식 일반에서, 다시 말해 거기서 필연적으로 통일이 되면 객관적이다. 모든 판단들의 논리적 계기들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통일하는 그만큼의 가능한 방식들이다. 이 같은 계기들이 개념들로 쓰인다면, 그것들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필연적으로 통일하는 개념들이고,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들의 원리들이다. 한 의식에서의 이 통일은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다.(p201) <형이상학 서설> 中


 위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는 감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표상)하고, 지성을 통해 사고함(판단)을 알게 된다. 이러한 표상과 판단을 일치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우리가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자연'이 아니라 '내가 인식하고 사고한 결과물로서의 자연'이라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른 것들도 사실은 우리의 법칙을 자연에 적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지성은 자연의 보편적 질서의 근원이다. 지성은 모든 현상들을 자기 자신의 법칙들 안에 파악하고, 그로써 비로소 경험을 선험적으로 성립시키며, 그에 의해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되어야 할 모든 것이 지성의 법칙들에 필연적으로 종속된다. 무릇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는 우리의 감성 및 지성의 조건들에 독립적인 사물들 그 자체의 자연[본성]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p233) <형이상학 서설> 中


 '보편적 자연법칙들은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라는 명제는 이미 저절로 다음의 명제, 즉 '자연의 최상의 법칙수립은 우리 자신 안에, 다시 말해 우리 지성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에, 그리고 '우리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을 경험에 의거해 자연으로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자연을 그 보편적 합법칙성의 면에서 순전히 우리의 감성과 지성 안에 놓여 있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에 이른다.(p227)... 내가 이와 관련하여 "지성은 그의 (선험적인)법칙들을 자연에서 길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을 자연에게 지정한다"라고 말하면, 처음에는 기이하게 들릴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확실하다.(p229)  <형이상학 서설> 中


 결국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지식인 '앎'에 이를 수 없다. 표상과 판단의 통일이 경험적 판단의 한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험을 넘어선 초월적인 무엇인가(우리의 인식너머에 있기에 규정할 수 없는)가 필요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그 단초(端初)를 갖고 있다. 바로 '이성'이다. 


  경험을 통해서는 앎에 이를 수 없다. 이 물음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성은 결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성이 순수 지성을 그에 국한시키고 있는 경험적 사용은 이성 자신의 전체 사명을 충족시키지는 않는다. 각각의 개별 경험은 경험 구역의 전체 권역의 단지 한 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가능한 경험의 절대적 전체는 그 자신 경험이 아니되, 그럼에도 그것은 이성에게는 하나의 필연적 과제이다. 이 전체에 대한 순전한 표상을 위해 이성은 그 사용이 단지 내재적인, 다시 말해 주어질 수 있는 한의 경험에만 상관하는 저 순수 지성개념들과는 전혀 다른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성개념들은 완벽성에, 다시 말해 전체적인 가능한 경험의 집합적 통일에 상관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주어진 경험을 넘어서고, 초험적이 된다.(p243) <형이상학 서설> 中


 감성세계는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연결된 현상들의 연쇄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자립적인 것이 아니고, 본래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현상들의 근거를 함유하고 있는 것과, 즉 한낱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들 그 자체로서 인식될 수 있는 존재자들과 관계한다. 사물들 그 자체의 인식에서만 이성은 조건 지어진 것으로부터 조건들로의 진행에서 완벽성에 대한 요구가 언젠가는 충족되는 것을 볼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p291) <형이상학 서설> 中


 우리는 이것에 대해을 말할 수 없지만, 두 가지는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성'을 통해서 초월적인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우리는 이성을 통해 완벽한 절대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식의 한계로 인해 형이상학적 세계의 최고존재자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안의 이성을 통한 이끌림을 통해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형이상학은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가 <형이상학 서설>에서 내린 결론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바, 그것은 한낱 우리 행위[활동]들의 자연원인들인 주관적으로 규정하는 근거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런 한에서 그 자신 현상들에 속하는 존재자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낱 이념일 따름인 근거들이 이 능력을 규정할 수 있는 한에서, 객관적인 이 근거들과도 관계 맺고 있다. 이 연결은 당위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 능력을 이성이라고 일컫는다.(p274) <형이상학 서설> 中  


 순수 이성은 자기의 이념들 중에 경험의 분야를 넘어가 있는 특수한 대상들을 의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과 연관한 지서사용의 완벽성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완벽성은 원리들의 완벽성일 뿐, 직관과 대상들의 완벽성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완벽성이 명확하게 표상되게 하기 위하여, 이성은 그 완벽성을 그 인식이 저 [지성의] 규칙들에 관하여 완벽하게 규정된 객관의 인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객관은 단지 하나의 이념일 뿐으로, 지성인식을 저 이념이 가리키는 완벽성에 가능한 한 근접시키기 위한 것이다.(p251) <형이상학 서설> 中


 우리는 하나의 비물질적 존재자, 하나의 오성세계, 그리고 모든 존재자 중의 최고존재자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오직 사물들 그 자체인 이것들에서만 현상들을 그와 동종의 근거들에서 도출함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완성과 충족을 만나기 때문이며, 또한 이 현상들은 항상 어떤 사상(事象) 그 자체를 전제하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인식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그 어떤 사상(事象) 그 자체를 암시하고 있기에, 현상들과는 구별되는 어떤 것과 실제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p292) <형이상학 서설> 中


 이성은 우리에게 어떤 것에 대해 그 자체를 가르쳐주지 않고, 가능한 경험의 분야에서 오직 자기 자신의 완벽한 그리고 최고 목적을 향해 있는 사용과의 관계에서만 가르쳐준다.(p305) <형이상학 서설> 中


 <형이상학 서설>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칸트의 주장과 함께 <순수이성비판>의 전체적인 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시간, 공간 등 선험적 지식 등을 비롯한 이야기는 빠져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순수이성비판>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고 일단 미루도록 하자. 다만, 리뷰를 마무리하기 전 괴델(Kurt Godel, 1906 ~ 1978)의 불완전성정리(Godel's incompleteness theorems)에 대해 간단하게 확인해보자.


 수학의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수학의 체계에서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제1불완전성 정리). 나아가 수학의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수학의 체계에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체계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제2불완전성 정리)


 위와 같이 요약되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형이상학 서설>을 다시 보자. 제1불완정성 정리에 의하면, 순수 수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식 세계 내에서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형이상학 서설>의 주장과 일치한다. 반면, 제2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식 범위 내에서는 우리의 인식이 올바르다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닐런지. 이처럼,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포함한 모든 것이 부정된다면, 인식 너머의 존재도 부정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제1불완전성 정리와 제2 불완전성 정리를 종합한다면, 형이상학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일전에 정리한 <신의 존재에 대한 괴델의 수학적 증명>을 다시 읽고 보다 상세히 정리하기로 하고 리뷰를 갈무리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 꽃양배추하고 양배추하고 콩요리하고 바나나하고 오렌지도 안 먹어. 그리고 난 사과하고 밥하고 치즈하고 생선튀김은 싫어. 그리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토마토 절대 안 먹어."(내 동생은 토마토를 아주 싫어해요.)


"아하, 이건 으깬 감자가 아냐. 보통 다들 그렇게 착각하는데, 사실은 아니라고. 이건 바로 백두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걸려 있던 구름보푸라기야."


 그 다음에 롤라가 말했어요. "오빠, 저거 좀 몇 개 줄래?" 그래서 내가 말했죠. "뭐, 저거 말이야?"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어요. 왜냐고요? 롤라가 가르킨 건 바로 토마토였거든요.  그러자 롤라가 말했어요. "그럼 물론이지 '달치이개쏴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 I Will Never Not Ever Eat a Tomato> 中


 딸아이 책 중애서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를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심하게 편식하는 동생 롤라를 위해 오빠 찰리가 꾀를 내어 골고루 먹게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귀여운 여동생과 오빠가 나누는 대화가 참 정겨운 동화입니다. 예전 딸아이에게 읽어줄 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1857 ~ 1913)의 <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내용이 떠오릅니다.


 언어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영상이다. 이 청각영상이란 순전히 물리적 사물인 실체적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의 정신적 흔적, 즉 감각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는 소리의 재현이다.(p92)... 우리는 개념과 청각영상의 결합을 기호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상 용법에서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청각영상 만을 지칭한다.(p93)... 우리는 전체를 지칭하는 데 기호(signe)라는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개념과 청각영상에는 각각 기의(signifie)와 기표(signifiant)를 대체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다. 또 좀 더 간략히 언어기호는 자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바, 그 이유는 우리가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전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p94) <일반언어학 강의> 中


 기표(記表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e)의 결합관계는 자의적이고, 언어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연합에서 비롯된 전체라는 소쉬르의 말에 따르면,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의 오빠 찰리는 어리지만, 매우 통찰력있는 소년입니다.  동생 롤라가 먹지 않는다고 말한 '토마토'의 의미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 동생은 '토마토'라는 기표를 싫어하지, '빨간 야채인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봤으니까요. 결국, 오빠 찰리는 동생을 위해 '기표 - 기의'의 조합을 동생이 원하는 관계로 다시 설정하여 긍정적인 행동 변화를 끌어냅니다. 이로써 비록, 이들이 말한 언어가 보편언어는 될 수는 없겠지만, 그들 남매간에는 누구보다 잘 통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작가 로렌 차일드 (Lauren Child)는 이런 점을 고려해서 작품을 썼겠지만, 다소 엉뚱함을 즐기는 아이들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아이들 세계에서는 충분히 있음직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문화 현상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는 요한 하위징아 (Johan Huizinga, 1872 ~ 1945)의 <호모 루덴스 : Homo Ludens :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의 말은 생각해 볼 만 합니다.

 

우리가 놀이에 부여했던 정의는 시의 정의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언어의 리드미컬하고 대칭적인 배열, 각운과 유사운(類似韻)으로 의미의 핵심을 찌르는 것, 의미의 고의적인 가장, 어구의 인공적이고 예술적인 구성 등 이 모든 것이 놀이 정신의 다양한 표현이다.(p255) <호모 루덴스> 中


 언어의 한 갈래인 시(詩), 그리고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의 많은 요소와 이론이 놀이를 통해 설명된다는 사실은 어린이가 어른의 스승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랫만에 읽은 동화책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운 하루였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5-15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5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8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8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한민국 인구·소비의 미래 - 충격적 인구 변화에 맞춘, 소비 분야 해법 제시!
전영수 지음 / 트러스트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 인구, 소비의 미래>는 한국의 인구변화와 이로 인한 소비시장의 변화를 설명한 마케팅 책이다. 저자는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인구 구조를 소개하고, 이에 따라 변화하는 고객과 시장의 모습을 우리보다 앞선 초고령사회인 일본 사회를 통해 예측한다. 저자의 예측은 현재 일본 모습을 근거로 했기에 <대한민국 인구, 소비의 미래>에서 전망한 새로운 소비주체로서의 노년층과 이로 인한 중성고객의 증가, 원스톱 서비스 시장의 확산 전망 등에 대해서는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하는 공감을 형성한다.

반면, 의문을 갖거나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한국의 저출산 원인을 ‘청년세대의 출산파업‘에서 찾는 저자의 결론이 그렇다. 고령화 사회에서 표심에 따라 노년층 위주의 정책이 펼쳐지고, 그 결과 청년층이 이에 대한 강한 반발로 조직적으로 자기 인생을 포기하며 ‘결혼/출산‘을 포기했다라는 저자의 분석은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노년층 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청년들이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진단이 아닐까?

표심은 무섭다. ‘표심=정책‘은 당연하다. 관건은 표심향방이다. 인구변화를 보건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고령>청년‘의 무게중심에 변화는 없다. 그 결과가 압도적인 고령정책이다. 정책 순위는 언제나 그랬듯 고령우선/노년배려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힘없는 청년 요구는 밀린다. 비명을 질러도 표심이 아니면 흡수되지 못한다. 출산감소는 그 역풍의 결과다.(p84) <대한민국 인구/소비의 미래> 中

한국의 인구변화는 예측무용의 속도, 범위에서 가장 독특, 차별적인 특성을 갖는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가히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획기적인 인구변호가 펼쳐지는 현장이 한국이다... 한국의 출산감소가 이토록 가파른 이유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한국사회 특유의 역동적인 에너지다. 출산카드의 거래비용/기회비용이 급격하게 마이너스로 치닫는데다, 이로써 ‘출산=손해‘라는 인식이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필요이상 신속/과감하게 전달/공유된 결과로 보인다. 본능과 현실 사이에서 대부분의 청년세대는 자가발전적인(?) 논리개발/공감확대로 출산파업에 나선 셈이다. 이게 인구유지선(2.1명)을 깨고 인구위기선(1.3명)까지 하향돌파하며 사실상 특정 규모를 갖춘 정상국가에선 사상최초로 1.0명 이하로 출산율을 떨어뜨린 배경이다. 문제는 앞으로다. 국민성이란 쉽게 안 변한다고 전제하면 출산감소는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역동적인 국민성이 쉽게 줄어들 여지도 낮다.(p49) <대한민국 인구/소비의 미래> 中

저자의 분석대로 정책에 반발하는 집단으로서의 ‘청년세대‘가 아니라, 어려운 현실에 부딪힌 청년 개개인을 우리는 봐야하지 않을까. 결혼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린 청년 세대.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인구 문제의 원인에 대해 한 단계 더 들어갔어야 했다. ‘인구 문제‘로 돌아가서 자산(資産) 중심 - 특히, 부동산 - 의 경제를 유지하려는 노년층의 투표행태가 청년세대의 어려움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에 대한 답이 준비되지 않고 인구문제의 원인을 단정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저출산-고령화‘ 문제의 원인은 결혼에 대한 청년세대의 부정적인 인식 확산이다. 그 결과 결혼/출산이 줄어들고, 이로 인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노년층의 비중이 커졌다는 것이 현재 인구 문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저자는 서둘러 다음 장에서 소비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인구 변화는 받아들여야 할 ‘상수‘라 말하면서 인구 문제에 대한 설명을 서둘러 마친다.

급격한 인구변화의 출발은 급격한 출산감소에서 비롯된다. 후속세대(분모)가 줄어드니 고령인구(분자)가 그대로라도 분수값은 역전될 수밖에 없다. 고령화발 인구구조의 비중변화다. 출산감소는 이전단계인 결혼감소 때문이다. 결혼이 적어지니 출산도 줄어드는 구조다.(p56) <대한민국 인구/소비의 미래> 中

예측무용의 속도/범위로 진행 중인 급격한 인구변화가 한국적 특징인 만큼 그 대응과 관련된 실망적인 정책무용론도 자연스런 한국적 특수성으로 귀결된다... 인구는 상수(常數)다. 상수가 악재인데 방치할 수는 없다.(p88) <대한민국 인구/소비의 미래> 中

그리고, 다음 장(章)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장과 고객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제는 ‘고령화‘에 초점을 맞춘다. 새로운 소비의 주체인 노년층(어른세대) 중심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구 문제에 있어서는 ‘저출산‘ 문제에 초점에 맞추고, 마케팅 문제에 있어서는 ‘고령화‘에 중점을 둔다. 이와 같은 ‘저출산-고령화’ 현상의 분리가 타당한 접근 방식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저출산‘ 문제를 마케팅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을까. 저출산이 우려된다면, 향후 정부 정책에 있어서 출산장려정책이 어떤 분야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이러한 경우 새로운 시장이 어떻게 열릴 것인가에 대한 분석이 추가적으로 있을 수는 없었을까.
‘저출산 - 고령화‘ 문제는 분리해서 바라보지 않고, 지금 당장의 현상이 아닌 장기적, 정책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저출산’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관점이 <대한민국 인구, 소비의 미래>에는 부족하다. .

신시장을 주도할 유력한 어른친화적인 판매채널은 방문판매가 아닐까 싶다.(p111) <대한민국 인구/소비의 미래> 中

원스톱의 즉시해결은 모바일이 절대 우위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편의점은 모바일의 틈새공략이 가능하다... ‘세븐일레븐 vs 아마존‘의 대결양상을 정리하면 편의점의 안정적인 성장세도 아마존과 비교할 때 편리성 시장을 대상으로 서로의 경합관계라기보다는 보완관계로 해석된다. 접근방식에선 극단적인 차별화를 보이지만, 직접적인 경합관계는 지양된다.(p234) <대한민국 인구/소비의 미래> 中

마지막으로, 책에서 전망하는 미래 소비 시장의 모습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본문에서는 일본 소비시장의 현황을 우리의 미래 시장 모습이라고 가정하고, 논리를 전개하지만, 일본과 우리의 시장 모습은 같지 않다. 특히, 모바일로 대표되는 온라인 시장의 활성화, 시장점유율 정도는 일본과 우리가 큰 차이가 있는데, 과연 편의점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일본시장과 모바일/어플에 익숙한 우리 시장의 전망을 같게 가져갈 수 있을까. 이러한 경우에는 오히려 알리바바로 대표되는 중국 모바일 시장을 또 다른 사례로 보완제시해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마케팅 책인 <대한민국 인구, 소비의 미래>는 일본 사례를 바탕으로 미래 소비 시장의 한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다만, 인구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한 점과 일본 중심의 예측이 갖는 한계점도 동시에 보여준 책이라 여겨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