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왈도 에머슨 : 자연 위대한 생각 시리즈 3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서동석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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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은 두 가지 요소, 즉 힘과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달콤하고 건강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이 둘 사이의 균형이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 요소가 과도해지면 그것이 부족한 것만큼이나 해악을 끼친다. 모든 것은 극단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좋은 성질의 것도 나쁜 요소와 섞이지 않으면 해로워진다.(p195)...  우리는 두 가지, 즉 환경과 생명을 갖고 있다. 예전에 우리는 긍정적인 힘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부정적인 힘, 즉 환경이 그 반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은 압제적인 환경이다... 자연의 책자는 운명의 책자이다.(p231) <자연> 中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 ~ 1882)의 <자연 Nature>에서 자연(自然)은 긍정적인 존재가 아닌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존재인 자연이 인간에게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리뷰에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에머슨의 답(答)을 찾아보려 한다. 


 에머슨에게 자연은 감각적이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세계,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는 부정적인 세계다.


  자연은 인간의 보다 고상한 욕구, 즉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을 채워 준다.(p23)... 

 모든 만물은 도덕적이다. 그 무한한 변화 속에서 영적인 본성과 끊임없이 관계 맺고 있다. 따라서 자연은 형태와 색깔과 움직임으로 찬란해진다... 자연은 언제나 종교의 동맹자이며, 자연의 모든 화려함과 풍부함을 종교적 감정에 부여한다.(p49) <자연> 中


 만물의 주변과 변경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모든 왕국을 통해 자연은 그 근원이 되는 원인에 충실하다. 자연은 언제나 정신을 말한다. 자연은 절대적인 것을 암시한다. 자연은 영원한 결과이다. 자연은 우리 뒤의 태양을 언제나 가리키는 위대한 그림자이다.(p69) <자연> 中


 이에 반해, 인간은 이성적이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며, 원인을 탐구하는 존재다. 에머슨에게 인간이 '빛의 자녀'라면, 자연은 이의 그림자에 해당한다. 빛의 밝은 면이 긍정적인 인간이라면, 어두운 그림자는 부정적인 자연에 속한다. 에머슨은 이처럼 부정적인 자연이 인간에게 의미있는 이유는 긍정과 부정의 조합을 통해 인간의 완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영민한 거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머리이자 가슴이며 크고 작은 모든 것에서, 모든 산의 지층에서, 관찰과 분석에 의해 드러나는 색깔의 모든 새로운 법칙과 천문학적 사실 또는 대기의 영향 속에서 자신의 일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p77) <자연> 中


 지적으로 고려하여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연과의 관계에서 고려할 때, 그것을 우리는 정신이라 부른다. 정신은 창조자이다. 정신은 그 자체에 생명을 지니고 있다.(p35)... 생각과 그 적절한 상징을 연결하여 말할 수 있는 인간의 힘은 그 성격의 단순함, 즉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온전히 그것을 전하고자 하는 욕망에 달려 있다.(p37) <자연> 中


 보다 세부적으로 인간 삶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 진리와 덕의 조화(harmony)로 완성되며. 에머슨은 부정적인 면의 제거가 아닌 부정적인 것과의 혼합을 통해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에머슨은 이러한 아름다움이 잘 표현된 것이 예술(藝術)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에머슨은 예술의 아름다움(美)이 단순한 자연의 모방이나 인간 정신의 구현이 아닌 자연과 인간 정신의 혼합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진리와 덕을 사랑하는 마음은 눈을 정화시켜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게 만들 것이다. 점차 우리는 영원한 자연 만물의 원초적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세계는 우리에게 한 권의 펼쳐진 책이 될 것이며, 모든 형상은 감추어진 생명과 궁극의 원인을 드러낼 것이다.(p43) <자연> 中


 자연의 아름다움은 마음속에서 재현되는데, 이것은 메마른 관찰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이다. 예술 작품의 생산은 인간성의 신비에 한 줄기 빛을 던진다. 예술 작품은 세계의 추상이거나 요약이다. 그것은 축소화된 자연의 결과이거나 표현이다... 예술은 인간이라는 증류기를 통과한 또 다른 자연이다. 세상은 이처럼 영혼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이 요소를 나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부른다.(p31) <자연> 中


 '미 美'로서 보이고 느껴지는 자연의 이러한 아름다움은 최소한의 부분일 뿐이다... 미를 완성하려면 보다 높은, 말하자면 정신적인 요소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유약한 성질을 배제하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높고 신성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의지가 결합될 때 발견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신이 미덕에 새긴 표시다.(p27) <자연> 中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과 하나된 궁극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 에머슨은 이에 대해 순응과 일관성을 피하고, 자신 내면의 소리(神聲)에 귀를 기울이며 현재를 살아갈 것을 권유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살펴본다면 에머슨의 자연사상은 중용(中庸) 또는 적도(適度) 사상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진한 포도주를 희석시키기 위해 사용한 물처럼, 에머슨에게 자연은 그런 존재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사진] The Symposium in Ancient Greece(출처 : https://www.metmuseum.org/toah/hd/symp/hd_symp.htm)


 그대 자신을 믿어라. 신의 섭리가 그대를 위해 마련한 그 위치, 그대의 동시대인들이 있는 사회, 세상사의 관계를 받아들여라.(p92)...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누구나 비순응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불멸의 영예를 얻고자 하는 자는 선이라는 이름에 방해받지 말고, 그것이 과연 선한 것인지 탐구해야 한다. 결국 자신의 마음의 고결함 이외에 신성한 것은 없다.(p95) <자연> 中


 삶 자체는 힘과 형식의 혼합물이고, 둘 중 어느 하나가 조금이라도 과도해지는 걸 견딜 수 없는 법이다. 이 순간을 완성하고, 인생행로의 모든 걸음마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며, 가능한 한 좋은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순간에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자.(p190) <자연> 中


 이처럼 <자연>에 나타난 에머슨의 자연관(自然觀)은 순수한 자연주의자 또는 환경주의자(Environmentalism)의 사상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에머슨의 자연 사상은 <주역(周易) 계사전> 의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또는 노자(老子, BC 601 ? ~ ?) <도덕경 道德經>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에머슨의 <자연> 안에서도 우리는 '허(虛)'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에머슨의 '허'를 통해서 수학에서 '허수(imaginary number)'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에머슨에게 자연은 이성을 통해서 인식되었을 때 의미가 부여될 수 있기에 수학의 '허'가 이에 해당한다 여겨진다. 또한, 허수가 '실수(real number)'로 표현할 수 없는 해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것처럼, 에머슨에게 자연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 있어서 자연은 재료일 뿐만 아니라 과정이며 또한 결과이기도 하다. 모든 부분들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서로의 일손이 되어 일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의 자비는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인간을 양육한다. 유용한 예술이란 바로 그 자연의 혜택들을 인간의 재치로 재생산하거나 새로이 조합한 것들이다.(p20)... 모든 보조물들의 도움으로, 노아의 시대로부터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표면은 얼마나 변했던가!... 인간이 먹는 것은, 단지 먹기 위함이 아니라 일하기 위함이다.(p21) <자연> 中


 이러한 면에서 에머슨의 자연은 수동적 존재다. 그의 사상에서 독립 변수(independent variable)는 신의 뜻과 인간의 의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개발주의자의 사상에 가깝지 않을까.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의 사상 속에서 말보로 맨(Marlboro Man)으로 대표되는 서부개척가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 또는 대상화한 에머슨의 자연주의 사상은 21세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상으로서는 한계를 느낀다.  에머슨의 <자연>을 통해 자연을 좋아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는 못했던 한 사상가의 모습과 함께 20세기 미국의 정신을 확인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그림] Marlboro Man(출처 :  https://www.compulsivecontents.com/detail-event/remembering-the-marlboro-man/)


  인간은 기대어 선 버드나무가 아니고, 스스로를 독립시킬 수 있고 독립시켜야만 하며, 자기 신뢰를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힘이 생겨날 것이다. 인간은 신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고, 여러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인간은 동정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p120) <자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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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의 왕국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자연과학선집
에드윈 허블 지음, 장헌영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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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도의 예상이 완전히 믿을 만하다면 필요한 크기의 곡률 반경은 증거에 의해 제외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확실한 해는 보증되지 않는다. 중요한 자료는 오차로 둘러싸여 있다. 자료를 인내의 한계까지 밀어 넣으면 우리는 속도편이를 조사의 체제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우주는 인지할 수 있는 바로 그 작은 경계 안에서 물질로 가득할 것이다. 반면 속도편이로서 해석을 포기한다면 적색편이 안에서 의미조차 알려지지 않고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하던 원리를 발견할 것이다. 이론은 여전히 일반 상대론의 팽창하는 우주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팽창률은 관측으로 알 수 없다.(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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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 자기실현
이부영 지음 / 한길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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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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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영 교수의 분석심리학의 탐구 3부작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은 칼 융(Carl Gustav Jung, 1875 ~ 1961)의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 Analytische Psychologie)을 대중적으로 설명한 입문서(入門書)다.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3부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한마디로 '무의식(無意識, unconsciousness)의 창조적 역할'이라 하겠다.  

 

 융의 무의식관은 무의식이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능력을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집단적 무의식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의식의 뿌리를 이루며 정신생활의 원천이라고 보는 만큼, 진화의 흔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p33) <그림자> 中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는 무의식을 진화과정의 부산물로 인식한 반면, 융이 바라보는 무의식의 세계는 '창조의 원천이자 뿌리'다. 융은 무의식을 이처럼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했기에, 그의 이론에서 무의식의 영역은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등으로 구분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 즉 의식(consciousness)과 모르고 있는 마음, 즉 무의식(the unconscious)로 이루어지며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특성과 기능에 따라 의식계에서는 '나'(Ich, ego)'를 볼 수 있고 무의식계에서는 '그림자' '아니마'(Anima) 또는 '아니무스'(Animus) '자기'(self)라 부르는 독특한 요소가 있다. 우리의 정신은 심리적 복합체, 콤플렉스로 이루어지며 이 가운데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콤플렉스는 다른 말로 원형(Archetype)이라 부른다.(p35) <그림자> 中 


 우리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한다면, 우리가 자아(自我 Ich ego)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의 주체(主體)인 반면, 무의식계의 양상은 조금 복잡하다. 무의식의 영역은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신분석학 3부작에서는 우리 삶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합해 '자기실현'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이들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는 각각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이번 페이퍼에서는 <그림자>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내용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람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p41)... 우리의 무의식에는 의식과 무의식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원형이 있다. 이것을 자기원형(Archetypus des selbst)이라 하는데 이 또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원형적 그림자는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으로서의 '나'의 그림자에 비해 엄청나게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p42) <그림자> 中


 칼 융에 의하면 그림자는 무의식에서 열등한 인격에 해당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하이드씨, 스타워즈 Star Wars에서 포스(Force)의 어두운 면, 절대선(絶對善)에 대응하는 절대악(絶對惡)이 그림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칼 융의 그림자는 단순하지 않다. 그림자는 개인 차원과 집단 차원의 그림자의 복층구조이며, 이 때문에 다소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진] Dark Force Darth Vader(출처 : https://artinsights.com/product/dark-force-darth-vader-star-wars-original-painting-by-william-silvers/)


 그림자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개인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에 억압된, 앞으로 의식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열등한 인격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가장 밑바닥 단계는 동물의 충동성과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p85) <그림자> 中


 그림자의 의식화란 그림자의 표현으로서 완결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림자가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으로 나타날 경우에 한한다는 사실도 언급하였다. 집단적 무의식의 그림자상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다름 아닌 자기 마음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 충격을 간직하는 것 이외의 일을 할 수 없고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파괴적인 충동에 휩쓸리지 않고 조심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p203) <그림자>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란 어떤 집단 성원의 무의식에 같은 성질의 그림자가 형성되어 다른 집단에 투사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경우 그림자는 개인적인 특성을 가지기보다 집단적 특성을 지닌다. 그러한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그 집단성원이 하나의 페르조나, 즉 집단의식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p118) <그림자> 中


 여기에서 우리는 연극 탈을 의미하는 페르조나라는 개념을 만난다. 집단사회의 규범과 관습은 개인에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식'을 강요하고, 그 결과 개인의 무의식에는 집단의식의 그림자도 함께 자리하게 된다. 일본인의 심리를 설명할 때 흔히들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를 통해 설명한다. 친절한 겉모습과는 또다른 속마음을 가진 이들 용어를 통해 집단적 무의식과 그 그림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태어난 이후 개인이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무의식의 층을 융은 개인적 무의식(the personal unconscious)이라 하였다. 프로이트 초기학설의 무의식은 여기에 포함된다... 융은 더 나아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마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생활사에서 나온 무의식의 층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인간 고유의 원초적인,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무의식의 심층으로 이것을 융은 집단적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 이름하였다.(p33) <그림자> 中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조나(Persona)'라 부른다. 그것은 집단정신에서 빌려온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집단이 개체에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 그 집단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할 여러 유행이다.(p36) <그림자> 中


 그렇다면, 이처럼 열등한 그림자가 창조적 기능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그림자>를 통해 우리가 그림자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으로 받아들였을 때 우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림자>의 나머지 내용은 이러한 양상이 전래 동화와 종교(宗敎)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마음 속의 열등한 것, 미숙한 것은 통제와 억제, 혹은 승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살림'으로써, 즉 움직이게 함으로써 발전/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의 그림자의 의식화는 바로 무의식의 열등기능인 그림자를 의식이 받아들이고 의식에 동화시켜 나감으로써 그 바라던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p277) <그림자> 中


 그림자의 문제, 그림자와의 대면과 갈등은 결국 대극의 합일과 완성의 상징 - 결혼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겪어야 하는 필수적인 고통의 과정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도 많은 동물들이 콩쥐를 돕는다. 본능의 중요성은 여기서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p242)... 친어머니는 이야기의 무대 뒤에서 초능력을 발휘하여 콩쥐를 돕는다. 다시 말해 그녀는 무의식의 지혜와 가까이 있고 의붓어머니와 그 딸은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한 개인을 놓고 볼 때 사람은 때로 이 두 갈등 사이에서 방황한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찾을 수 있다.(p243) <그림자> 中


 그리고, 의식과 열등한 인격의 통합이후 우리는 새로운 통합대상을 만나게 된다.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가 그들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모두 혼(魂)에 속하는 개념인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남성의 무의식(아니마)은 여성적 특성을, 여성의 무의식(아니무스)는 남성적 특성을 가진다는 점이라 하겠다. 융에 따르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한 전체적 관점에서는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적 특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빛과 어둠의 서로 떨어져 있던 두 측면은 아니마를 통해서 만나게 된다. 자아의식이 무의식을 소홀히 하면 그림자가 아니마를 감싸버려서 아니마를 인식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 그림자를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자에 오염되어 분간하기 어려웠던 아니마가 드러나서 인식하기 쉬워진다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p255) <그림자> 中


 아니마는 독일어의 제엘레(Seele, 심령)에서, 아니무스는 가이스트(Geist, 심혼)에서 빌려온 라틴어 용어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의 혼과 같은 것이다. 혼이나 넋, 또는 심령이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의 표현이며 '나'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와 같은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남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여성적 속성을, 여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남성적 속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p43) <그림자> 中


 무의식의 측면에서 여성과 남성이 다른 면을 한마디로 지적한다면 아니마는 기분(Launen, mood)을, 아니무스는 의견(Meinungen, opinion)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p63)... 우리는 남성의 무의식의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의 아니무스의 특성이 단지 남녀의 의식에서 배제된 내용만으로 일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 깊은 원형적 토대, 즉 '선험적 전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p64) <아니마와 아니무스> 中


 저자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해 자신 안에 내재한 다른 성(異性)의 요소와의 통합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진정한 남성상을 '51%의 남성과 49%의 여성'으로 말할 수 있다라면, 진정한 여성상은 여기에 대칭(對稱)적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융은 여기에 머물지 말고 통합적 자기로 나갈 것을 강조한다.


 융의 아니마/아니무스론은 인간이 남성과 여성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남성은 여성적 요소를, 여성은 남성적 요소를 살려서 의식에 통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전체정신의 중심에 거의 접근하게 된다.(p36) <아니마와 아니무스> 中


 '자기(Self, Selbst)'란 자기실현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다. 자기란 전체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그것은 인격성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그것은 의식의 중심인 '나(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전체정신 그 자체, 혹은 그 전체정신의 중심이며 핵이다... 융은 인간무의식 속에서 하느님과 같은 신상(神像)을 발견한 것이다.(p45) <그림자> 中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몇 가지 지점이 있다. 첫째는 우리 모두는 페르조나 동일시를 통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회적으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할 바를 부여받고, 그 역할에 따라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부모로서, 좋은 자식으로서 우리 모두는 각자 부여받은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우리 역시 그 역할에 동화(同化)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갈등은 특히 부모와 자식간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가족간의 상처 문제는 상당부문 페르조나의 문제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페르조나 문제는 자신 내면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둘째로, 우리가 성별 특성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뒤바뀜을 확인하면서, 성(性) 역할이나 특성에 대한 편견을 깨닫게 된다. 마치 <거울 나라의 앨리스 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처럼 우리는 현실과 다른 거울 너머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거울 속의 집에 대해서 상상한 것들을 모두 말해 줄게. 저긴 물건들이 반대로 있는 것만 빼면 우리 집 거실하고 아주 똑같단다. 의자 위에 올라서면 저 안을 볼 수가 있어. 벽난로 뒤만 빼고 말이야. 아아! 벽난로 뒤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p206)... 우리 거실 문을 활짝 열어두면 거울 속 집의 복도가 살짝 보인단다. 우리 복도랑 무척 비슷하지. 하지만 저 너머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어.(p207) <거울 나라의 앨리스> 中


 벽난로를 대칭점(symmetric point, 對稱點)으로 거울 나라와 앨리스가 속한 세계(世界)는 분리되어 있지만, 이들 모두가 세상(世上)을 만드는 것처럼,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내면의 소리에, 사회적으로는 약자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 이는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영역이라고 한다면, 무의식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개발에 초점을 두어야 하겠지만, 장기적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 개발보다 보존 또한 중요한 문제임을 생각하게 된다. 무의식의 의식화와 경제개발은 이러한 부문에서 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문은 교육(敎育)문제에 있어서, 아이들 잠재력 개발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조기 교육을 통한 아이들 잠재력 개발이 좋은 문제인가 역시 이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접근법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은 칼 융의 사상을 쉽게 정리한 입문서다. 그래서, 칼 융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설명하되 일반인들이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도록 잘 정리한 책이라 생각된다.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을 읽은 후 칼 융의 사상에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먼저 프로이트 사상을 접한 후 칼 융 저작을 접하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이상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무의식은 궁극적으로 무의식적이다. 자아가 전일(全一)의 경지인 자기의 경지에 근접할 수는 있으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는 언제나 자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곳에는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실현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vollkommener Mensch)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vollstandiger Mensch)이 되는 것이다.(p47) <그림자> 中


PS. 아니마와 아니무스 통합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마징가 Z>의 아수라 남작의 사례를 통해서 반증되는 것은 아닌지 짧게 생각해 본다.


[그림] 아수라 남작(출처: https://anidb.net/character/5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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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10: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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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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