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개혁이라는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부르짖거나 실천하는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사회 개혁은 얼마든지 부르짖을 수 있고 실천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더욱 사회개혁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봉건사회나 전제군주체제에 반동으로 생겨났다는 데는 동일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경제구조의 이질성으로부터 두 주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봉건사회나 전제군주사회가 무너지고 민주주의 사회가 형성되려면 인간 본위적 사회개혁은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p31)'
<태백산맥> 제3권에서는 사회개혁과 관련한 대화가 이뤄진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남(南)과 북(北). 서로 다른 길을 택했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개혁(社會改革)'을 당면 과제로 떠안게 되었다. 비록, 체제가 다른 국가지만, 이들이 공통된 과제를 맞이하게 된 것은 '국가'라는 체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국가는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을 위한 씨족들과 마을들의 공동체다. 그리고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이란 행복하고 훌륭하게 사는 것(to zen eudaimonos kai kalos)을 뜻한다. 따라서 국가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모여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훌륭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따라서 그런 공동체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자가 자유와 신분에서는 같거나 더 우월하지만 정치적 탁월함에서는 더 열등한 자들보다, 또는 부(富)에서는 더 우월하지만 탁월함에서는 뒤처지는 자들보다 국가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 )<정치학> (1281a2)
<정치학>에서 말하는 내용에 따르면, 체제와 관계없이 공동체에 더 많이 기여하는 자가 더 큰 몫을 가져가게 된다. 전통농업사회에서는 지주(地主)계급이, 산업자본시대에서는 자본가(資本家)계급이, 공산당이 지배하는 공산국가에서는 당(黨)이 많은 몫을 차지하게 된다. 많이 기여한 자가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의 문제는 이러한 많은 몫이 재분배되지 않고, 후대에 계승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민중들은 40여년 전 조선왕조의 백성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의식은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우리나라 공산당 역사는 중국보다 앞서 있었고, 자유주의다, 농촌계몽주의다 하는 것들이 의식변화를 촉진했습니다. 결국 지주계급의 몰락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기운이고 역사의 필연인 것입니다.... 지금 이남이 내걸고 있는 민주주의는 링컨이 정의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정당한 사회 개혁의 절차를 거쳐 지주계급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주계급을 보호하고 있는 이남의 체제는 민주주의라는 허울뿐 봉건사회의 답습이고 연장일 뿐입니다. 과감한 사회개혁 없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게 되면 사회혼란은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p32)'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전남 벌교 지역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남한 지역에 속한다. 당시 남한이 당면한(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는 기득권의 상속, 유지 문제였고, 이러한 사회적 모순은 과감한 사회개혁 또는 혁명의 필요성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남한의 현실은 미국의 민주주의와는 차이가 있었다. 남한에서 민주주의는 거창한 구호일뿐,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반면, 남한 민주주의의 롤모델인 미국 시민 혁명은 어떻게 파급되었는가. 이를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 ~ 1859)의 <미국의 민주주의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 혁명이 일어나면서 주권재민의 원칙은 타운들로부터 나와서 전국을 석권했다. 모든 계급이 이 원칙을 지지했다. 이 원칙을 쟁취하기 위해서 전투가 벌어졌고 승리를 거뒀다. 이 원칙은 법 중의 법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발전에 걸맞는 빠른 변화가 사회 내부에서도 일어났는데 상속법은 국지적인 영향력들을 완벽하게 말살시키고 있었다. 법률의 이런 영향과 독립혁명의 결과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해지자 민주주의 쪽의 승리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선포되었다. 사실상 이 원칙의 수중에 모든 승리가 돌아갔으며 이에 대한 더이상의 저항은 있을 수 없었다. 상류계층들도 불평 한마디 없이, 저항 한번 없이, 이 원칙으로부터 불가피하게 파생되는 악에 대해서까지 복종했다.(p116)'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1>
미국시민 혁명은 대내적으로는 상속법을 통한 법률개혁과 대외적으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실현하면서 반대세력의 저항을 무력화 시키고 받아들여지게 된다. 아마도, <태백산맥>에서 남학의 사회개혁가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사회 개혁을 꿈꾸었을 것이고, 거슬러 올라가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역시 이러한 사회개혁의 선구라 하겠다.
'1893년 11월에 지방관들의 수탈행위로 전라도 고부, 전주, 익산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동학사>에는 "계사(癸巳) 11월 15일에 전라도 고부, 전주, 익산 등 각 군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민란이 한꺼번에 일어난 일이 있었다. 횡포, 탐학, 강압으로 가결전(加結錢), 가호전(家戶錢), 무명잡세며, 국결환롱(國結幻弄)과 백지징세(白地徵稅)며 유망(流亡), 진결(陳結), 은결(隱結), 허복(虛卜)이며 불효(不孝), 불목(不睦), 불경(不敬), 독신(瀆神), 상피(相避) 등 죄목으로 옭아매어 백성들을 들들볶아 먹는 까닭이라" 하였다.(p374)' 삼암 표영삼 <동학2>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일어난 동학혁명은 대내적으로 당시 제도적 모순에 대한 개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국 시민 혁명과는 달리 외세(일본(日本)과 청(淸)나라)의 개입으로 인해 좌절된다. <태백산맥>4권에서는 동학혁명 당시의 참상이 잘 묘사되고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 대장이 인내천(人乃天) 깃발 펄럭임스로 전주감영을 빼은 담에 나라가 불러딜인 청국군 일본군이 밀려들고, 종당에는 일본군이 독판침서 동학군이 패허든 대목을 이약허겄구만. 다 이긴 쌈에 일본눔덜이 훼방얼 놓고 뎀베들었는디, 그눔덜언 각단지게 총질얼 허는디다가 대포할라 펑펑 쏴질러뿐께로 지아무리 용맹시러운 동학군이라 혀도 당헐 방도가 웂었제. 우리 동학군이 지닌 무기라는 것은 창뿐이고 칼뿐인디, 맞부어 싸우겄다고 쫓아가다 보면 총에 맞어 수도 웂이 죽어갔제.(p54)'
동학농민혁명군은 우금치 전투(牛禁峙戰鬪), 1894)에서 일본군의 신식무기와 개틀링기관총 앞에 무수히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패퇴하게 된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주인공 탐크루즈와 동료 무사들이 개틀링 기관총 앞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로 등장하지만, 실제 일본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 쓰러져간 이들의 모델은 우리 선조들이었다.)
[사진]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출처 : http://egloos.zum.com/leesunggil/v/2993445)
만일 동학농민혁명이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혁명의 성과를 내고 우리는 왕정(王政)에서 민주정(民主政)으로 이행할 수 있었을까.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 ~ 1527)는 <로마사론>에서 이러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혁명적 변화는 다른 계기를 통해 원상태로 돌아가려는 내재적 동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모든 정부는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 존경을 받기 때문에 이 민주 정부는 어느 정도 존속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그 민주정부를 수립한 세대가 살아 있을 동안만 버티는 것이다. 그 세대 이후에 민주 정부는 곧바로 아무 규율 없는 방종한 자유의 상태로 추락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시민 개인이든 정부 관리든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각 개인은 제 멋대로 살아가며 날마다 무수한 피해 사례들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사태의 필요에 의하여 또는 어떤 선량한 사람의 제안에 의하여, 이런 방종한 상태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은 다시 한 번 군주제로 돌아간다.(p69)'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태백산맥> 제3권에서 나오는 짧은 대화 속에서 우리는 해방이후 극심한 혼란기 속에서 하루빨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의식 속에서 '혁명' 또는 '급진적인 개혁'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급진 개혁 움직임이 정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변화방안이었는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우리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고, 많은 혁명을 거쳤지만, 제대로 진전된 해결책을 찾은 문제는 드물었다. 적시에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는 이제는 후대의 짐이 된 채 쌓여만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혁명적 변화'가 아닌 '작은 변화'가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