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동로마군은 소아시아 반도의 남단 이수스를 돌아 622년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아르메니아 지방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수스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622년은 바로 마호메트(무함마드)의 헤지라가 이루어진 해였다. 우연인지 모르나 그 찬란한 헤라클레이오스의 승리가 당시에는 안중에도 없던 이들 이슬람 교도의 활약에 의해 장차 물거품이 된다.'
김경묵, 우종익 <이야기 세계사 1>
[그림] 무함마드와 헤지라 (출처 : http://ncc.phinf.naver.net/ncc02/2010/7/26/296/5-2.jpg)
<이슬람 문명>은 정수일 교수가 저술한 이슬람 종교와 문화 입문서(入門書)다. 이 책에는 이슬람 종교와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을 포함한 이슬람 문화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가 잘 되어 있다. 국내 몇 안되는 이슬람 전문가로서 이슬람에 대한 저자의 따스한 시선이 잘 나타난 책이다. 이 책의 많은 내용 중에서 잠시 생각이 머물렀던 부분을 정리해 본다.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탈출한 무함마드의 헤지라 후 100년 후에 이슬람 제국은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인도의 인더스강유역까지 진출하는 급속한 팽창을 이룬다. 이러한 급속한 이슬람 제국의 팽창은 로마제국의 국교가 테오도시우스 1세(Flavius Theodosius, 347~395)에 의해 기독교(基督敎, Christianity)로 정해지기까지 약 300년이 걸린 것에 비하면 매우 빠른 속도로 팽창하게 된다.
[그림] 이슬람 제국의 발전(출처 : http://study.zum.com/book/14979)
이러한 이슬람의 급속한 팽창이 가능했던 원인에 대해 저자는 AD 7세기 전후의 국제적 환경, 이슬람 고유의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체제, 이슬람 문명의 보편성과 세계성, 이슬람 문명의 관용성(寬容性)을 확산 원인으로 제시한다.(p57) 저자는 '이슬람 근본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슬람의 폭력성은 유럽에 의해 왜곡된 관념이라고 이 책에서 강조한다.
'이딸리아 스콜라철학의 대부 격인 신학자 아퀴나스가 느닷없이 내뱉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劍)"이라는 것이 마치도 이슬람의 표징인 양, 경전 속의 한 구절인양 오인되고 있다. 그 결과 이슬람은 폭력의 종교로 비춰지고 있으며 급기야는 이러한 "호전성"이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과 폭력의 원인이라는 식의 연역논리(演譯論理)로까지 이어지고 있다.'(p318)
'한마디로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허상(虛像)을 실상(實像)인 양 사변화(思辯化)하고 오도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계기마다 입에 오르내리는 "이슬람 근본주의'란 사실 얼토당토않은 일종의 허상이요 유령이다.(p316)... 이슬람 정치사상사에는 통칭 근본주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p317)
그렇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중용사상(中庸思想)'으로서의 이슬람 사상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가장 급진적인 이슬람 사상가의 이론 속에서도 중용이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를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기실 이슬람사상은 극단을 배격하는 동양적인 중용사상(中庸思想, wasatiyah)이다. 오늘날 이슬람세계에서 대표적인 "근본주의"집단으로 지목되고 있는 무슬림형제단 운동의 사상 이론가인 까르다위마저도 현대 이슬람 부흥운동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조류는 "이슬람적 중용조류(中庸潮流)"라고 하면서 그 내용으로 원초(전통)주의와 혁신주의의 배합, 불변요소와 가변요소의 균형, 경직성(硬直性)과 외세 추종에서의 해방, 이슬람에 대한 포괄적(신앙, 사회, 정치, 입법 측면) 이해의 4가지를 꼽고 있다.'(p319)
그렇지만, 이슬람 사상 운동의 한 흐름을 전체 이슬람 신앙으로 일반화 시키기에는 다소 무리함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슬람 신앙 안에서 '중용'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을까. 이슬람 경전인 <꾸란 Koran>을 통해 살펴보자.
'하느님(알라)의 종들이라 함은 헌납을 함에 있어서 헤프지도 인색하지도 아니하여 항상 중용을 지키고, 하느님 곁에 어떠한 신도 두어 숭배하지 아니하고, 합당한 경우가 아니면 하느님이 금하신 생명을 죽이지 아니하며, 간음을 하지 않는 이들이라.' <꾸란(코란)> 25:65
'너희들의 손이 형틀에 매인 사람처럼 목에 묶여 있도록 하지도 말고, 또한 그것을 너무 넓게 펼치지도 말지니, 이는 너희가 인색하다는 비난도 받지 않고, 반대로 너무 헤퍼서 가난하게 되지도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꾸란> 17:29
'아담의 자손들이여! 예배를 올리는 곳에 갈 때는 그에 적절한 의상으로 단장을 하고, 잔치에서는 먹고 마시되, 그 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하라. 그분은 지나치게 (낭비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시니라.' < 꾸란> 7:31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에서 잘 나타난 바와 같이 이슬람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BC 322)를 주석하고, 이를 서유럽에 전해주었을 정도로 당대에 많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이슬람의 경전(經典)인 <꾸란>에 나타난 중용사상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ka Nikomacheia>에 나타난 중용 사상을 잠시 살펴보자.
'그렇다면 모든 미덕(美德)은 그것을 지닌 것이 좋은 상태에 있게 해주고 제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동등한 양이란 지나침과 모자람의 중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덕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어떤 기술보다 더 정확하고 더 효과적이라면, 미덕이야말로 중간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여기서 미적이란, 도덕적인 미덕이다... 지나침과 모자람은 악덕의 특징이고, 중용은 미덕의 특징이다.'(1106a 15 ~ 1106b34)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사상은 주로 '도덕적인 면'에서의 중용이라면, 이슬람 경전에 나타난 중용은 생활윤리의 '실천척인 면'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차이는 있지만, 이슬람교에는 저자가 강조한 중용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중용사상만으로 이슬람교를 화합의 종교로만 규정하기에는 다음의 구절이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너희들은 싫어하지만, 너희들에게는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명이 떨어져 있느니라. 이 세상에는 너희들이 싫어하지만 실제로는 너희들에게 유익한 것이 있는가 하면, 너희들이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너희들에게 해로운 것이 있느니라.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 너희들은 그렇지 않느니라.' <꾸란> 2:216
개인적으로 이슬람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입문서적을 읽은 것이 전부이기에 '이슬람 문화가 어떤것인가?'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은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 문명>이 우리의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목적으로 씌여진 훌륭한 입문서임은 분명하지만, 종착점이 아닌 이슬람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PS. '이슬람'만이 폭력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성지탈환이라는 명분하에 이루어진 십자군(1099 ~ 1291) 전쟁과 유럽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1618 ~ 1648)을 보더라도 기독교에서도 종교의 폭력성이 나타난다. '종교전쟁'이라고 불리는 많은 전쟁은 종교를 명분으로 한 여러 복합적인 요인(정치, 경제, 문화등)이 결합된 결과물이라 생각하기에, 폭력성을 어떤 종교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