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시스 / 라케스 / 카르미데스 - 초기 대화편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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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 친구 사이의 정
용기 :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절제 : 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

<뤼시스>는 소크라테스와 메넥세소스, 뤼시스 간에 `우정`을 가지고 논한 대화편이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쓸모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누군가를) 필요로 하며, 친구가 되고, 사랑하게 된다고 논의를 시작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분들은 자네가 행복해지는 것을, 그리고 자네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을 그토록 완강하게 막으시는가?`(209e)
`우리가 더 잘 아는 분야들은, 헬라스인들이든 비헬레스인들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 우리에게 맡길 걸세.`(201b)

다음으로,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 후, `훌륭함과 나쁨`, `훌륭함과 훌륭함`, `나쁨과 나쁨`이 친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닮은 것들은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상반된 것도 친구가 될 수 없음을 밝힌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 쓸모없는 분야들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게 될까?(210c)`
`서로 가장 닮은 것들은 서로에 대해 시샘과 경쟁심과 적대감으로 가득 차고, 서로 가장 닮지 않은 것들은 우정으로 가득찰 수 밖에 없다.`(215d)
`올바른 것이 불의한 것의 친구이고, 절제 있는 것이 방종한 것의 친구이며, 훌륭한 것이 나쁜 것의 친구인가?`(216b)

결국, 소크라테스는 1차적으로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아름답고 훌륭한 것의 친구(216d)`라는 가정을 세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신이든 인간이든 이미 지혜로운 이들은 더는 지혜를 사랑하지 않으며, 무지해서 나쁜 자들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네....따라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아직은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람들일세.(218b)`

그러나, 이러한 1차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벽에 부딪힌다. `친구`라는 목적은 `욕구의 필요`라는 수단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에게 친근한 것`이 우리의 친구라는 논의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결론은 최초의 논의(서로 닮은 것은 친구가 될 수 없다)에 모순되므로, 결국 정의에 실패한다.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인 까닭은 나쁘고 가증스러운 것 때문이며, 훌륭하고 친한 것을 위해서일세.`(219b)
`훌륭한 것은 병이라는 나쁜 것을 고치는 약과 같다네. 그러나 병이 없다면 약도 필요 없을 걸세. 훌륭한 것은 본성이 그러하기에 나쁜 것 때문에 나쁜 것과 좋은 것의 중간에 있는 우리에게 사랑받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없는 것 아닌가?`(220d)
`욕구가 우정의 원인이고, 욕구를 느끼는 사람이 욕구를 느끼는 동안에는 자기가 욕구하는 것의 친구일세.`(221d)
`욕구하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욕구하네, 그리고 필요한 것은 그것이 필요한 사람의 친구겠지? 그렇다면 메넥세소스와 뤼시스, 연정과 우정과 욕구의 대상은 우리와 친근한 것인 듯하네.`(221e)
`우리가 훌륭한 것과 친근한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훌륭한 것들끼리만 친구가 될 수밖에 없겠지?(222d)`

<라케스>

<라케스>는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라케스, 니키아스 간에 이루어진 대화편이다.

`중무장하고 싸우는 법`이 젊은이들 교육에 유익한가`하는 질문(181c)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배워두면 젊은이들의 혼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185a)`으로 논점을 세분화한다. 이후 `미덕`의 부분인 `용기`로 한정하여 논의를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자기 아들들의 혼에 미덕이 덧붙여져 아들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는지 조언해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 아닌가요?`(190b)
`처음부터 곧장 미덕 전체를 고찰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가 미덕의 한 부분-용기-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해요.`(190d)

라케스의 용기
라케스는 용기를 혼의 인내라 정의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어리석은`인내에 대한 반론으로 논파당한다.

`나는 용기가 일종의 혼의 인내라 생각하오.`(192c)
`그대의 논리에 따르면 지혜로운 인내만이 용기군요.`(192d)
`폐렴을 앓는 아들이나 다른 환자가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청을 들어주지 않고 인내력을 발휘하며 거절한다면 어떨까요?`(193a)

니키아스의 용기
니키아스는 용기는 지혜라는 정의를 내리지만, 소크라테스에 의해 반박된다.

`나는 그대가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아는 일에는 훌륭하고 자기가 모르는 일에는 나쁘다고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러니 용감한 사람이 훌륭하다면, 그는 분명 지혜로울 것이오.`(194d)
`이분은 용기가 일종의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194d)
`토론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용기를 미덕의 일부로 간주했어요. 나는 용기에 더하여 절제와 정의 등등도 미덕의 부분이라고 부른다오.`(198b)
`그대의 주장대로라면 용기는 무엇이 두려움에 떨게하고 무엇이 자신감을 불러넣는지 아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사실상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에 관한 지식인 것 같아요.`(199c)
`지금 그대가 말씀하시는 것은 미덕의 일부가 아니라 미덕 전체입니다.(199e).`

결국 이와 같이 `용기`에 대해서도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대화는 끝나게 된다.

<카르미데스>는 카르미데스, 크리티아스와 소크라테스가 `절제`에 대해 대화하는 작품이다.
크리티아스는 두통있는 카르미데스를 소크라테스에게 소개한다. 소크라테스는 `혼을 치유하지 않고 몸을 치유하지 않으면 안된다(156e)`, `일단 혼에 절제가 생겨나 자리 잡으면 머리와 몸의 다른 부분을 치유하기는 쉽다(157a)`면서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카르미데스의 절제
카르미데스는 절제를 차분함으로 정의하지만, 소크라테스에게 논박당한다.

`선생님께서 물어보시는 것은 한마디로 일종의 차분함인 것 같아요.`(159b)
`그렇다면 카르미데스, 혼에 관련되든 몸에 관련되든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는 빠름과 활력이 느림과 차분함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네. 그렇다면, 절제는 일종의 차분함일 수 없고 절제 있는 삶은 차분한 삶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네.`(160c)

크리티아스의 절제
카르미데스는 절제를 다시 정의하지만, 사실 크리티아스의 정의를 옮긴 것에 불과하기에, 논박당한 후에는 크리티아스가 논의를 이어받는다. `제 할일을 하는 것`이라는 크리티아스의 주장은 `알지도 못하고 행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로 논박된다.

`나는 전에 절제는 제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누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161b)
`만약, 남의 것들에 손대지 않고 저마다 제 것을 제작하고 제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각자 제 외투를 짜고 세탁하고 제 구두와 기름병과 때밀이 기구 따위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규정이 있다면, 자네 생각에 국가가 잘 경영될 것 같은가? 절제는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닐세.`(162a)
`내 주장은 좋은 것을 아니라 나쁜 것을 만드는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만드는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라는 거에요.`(163e)
`그렇다면 의사는 자기가 유익한 짓을 하는지 해로운 짓을 하는지 모르고 무엇인가를 할 때도 있겠구먼.`(164c)

크리티아스 절제 수정
크리티아스는 이번에는 절제는 `지식`이라면서 다시 정의를 내린다. 이 정의에 따라 절제에 대해 논의하지만, 결국 `절제`가 어떤 유용함이 있는지에 대해서 결론 내리는데는 실패한다.

`차라리 나는 내가 동의한 것 가운데 일부를 취소하고 내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에요. 사실 나는 자신을 아는 것이 절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며, 그 점에서 나는 델포이에 `너 자신을 알라!`는 비명을 봉헌한 사람에게 동조해요.`(164c)
`절제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일종의 지식이며 무엇인가에 관한 지식일세.`(165c)
`다른 지식은 모두 다른 것에 관한 지식이고 그 자체에 관한 지식이 아니지만, 절제만은 다른 지식들에 관한 지식이자 그 자체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이에요.`(166c)
`크리티아스, 만약 절제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절제에서 대체 무슨 덕을 보게 될까?(172d)`
`설사 우리가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를 잘나가고 행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지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음과 나쁨에 관한 이 한가지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174c)
`내가 제대로 검토했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한 것이 우리에게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을테니까.`(175a)

<뤼시스>, <라케스>,<카르미데스>에서는 `우정`과 `용기`, `절제`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모두 뚜렷한 정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론이 내려지고 만다. 이 중에서 `절제`는 피지배계급에게, `용기`는 수호자 계급에게 필요한 것으로 <국가>에서 논의된다. 그럼에도, 초기 대화편에서 이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내려지지 못한 채 <국가>에서 `4주덕`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논의의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소크라테스(BC 469 ~ BC 399)와 공자(BC 551 ~ BC 479)가 만났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대화편을 통해, 공자는 <논어(論語)>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번지가 인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안연이 인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대답했다. ˝자신을 극복하여 禮(예)로 돌아가는 것이 仁(인)이다.˝)

아마, 소크라테스는 때에 따라 다른 정의를 하는 공자를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프로타고라스처럼 생각하고, 소피스트 취급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공자도 돈을 받고 가르쳤으니(풍우란, <중국철학사>中), 소피스트라 해도 할 말은 없었을 것 같다.) 반면, 공자는 소크라테스를 몸은 튼튼하지만, 폭넓게 생각하지 못한다면서 자로(子路)수준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이 두 사람이 어떤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한다면, `정의`만 하려고 본질을 파고들려는 `소크라테스`와 `상황에 맞게 설명을 하려는 `공자`는 동문서답을 하다 논의가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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