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 광해군일기,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왕조실록에는 2명의 폐주(廢主)의 일기가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이 시기의 기록들은 실록이라는 제목 대신 일기라는 표제가 붙는다.

일반적으로 폭군이라고 모두가 인식을 같이 하는 연산군과는 달리, 최근 광해군은 개혁군주로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인조반정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병자호란이라는 외침을 최소한 겪지 않아도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에서 출발한다.몇 해 전에 개봉한 <광해_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 역시 이러한 아쉬움의 또다른 발로가 아닐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광해군에 대한 상이한 시선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광해군 관련해서는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과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등이 이러한 상반된 관점이 잘 대비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읽기 전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광해군의 이미지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록속의 내용을 간적적으로 접하고 나서는 그와 같은 내 생각이 편향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왜란 중 분조(分朝)를 이끌며, 백성들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군주였다.
전란 후 백성들의 피폐한 삶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였지만, 계속된 궁전의 중수는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또한, 아버지 선조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에, 계속된 숙청을 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오히려, 백성보다는 집권계층의 권력 다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에게 개혁군주라는 칭호가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와는 반대로,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분명히 시대적인 흐름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었지만, 당시 시대적 이데올로기인 사대주의에 배치되었기에, 그는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광해군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광해군 실각`의 2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서민들의 경제적인 부담과 전례없는 외교의 실시. 이와 관련해서 경험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난다.

광해군은 왜란 후 피폐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궁궐중수를 실시했다. 왕권강화 측면의 이면에는 어느 정도 Keynesian economics의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2007년의 외환위기 당시 4대강 건설 등을 통해 국가경제를 위기에서 건져내려는 일련의 노력을 했고,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외교면에서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표방해서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이명박 정부는 실패로 판명된 자원외교와 미국 편향의 외교 정책으로, 외교면에서는 이명박 정부는 오히려 `인종`스러운 정책을 펼쳤던 것 같다.

다른 분야는 제외하고, 경제와 외교면에서 보자면, 우리가 겪었던 시대는 그다지 좋은 시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광해군을 통해 우리 시대를 비교해서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한, 지도자의 혜안은 분명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이지만, 그러한 혜안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리더십임을 광해군 일기를 통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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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상곡(夜想曲) 2017-02-04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은 이시기에 필망했어야 했다!!!!!!

겨울호랑이 2017-02-04 15:19   좋아요 1 | URL
^^: 조선 전기와 후기는 여러 면에서 다른 사회였던 것 같습니다. 천.지.인님 말씀처럼 사회개혁이 있었다면 이후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 수도 있었겠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야상곡(夜想曲) 2017-02-07 06: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은 그냥 임진왜란때 망했어야 했습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한민족의 다른 해법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