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십시오! 저로서는 올바른 것이란 '더 강한 자의 편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_ 《국가 정체》 (플라톤, 제1권 338c)
트라시마코스는 '정의(正義)란 강한 자의 편익'으로 규정한다. 강한 자는 자신의 편익을 위해 제도를 만들고 운용한다. 현실적인 모습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법이라는 제도를 유용하는 모습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본성이니까. 이 지점에서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단순히 권력을 탐하는 욕망이라기보다, 세계를 해석하고 자기 삶에 형식을 부여하며 가치를 창조하려는 근원적 충동에 가깝다. 그럼에도 트라시마코스의 '강자의 편익'은 니체의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양자는 모두 도덕과 정의의 배후에서 힘의 작동을 본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
오랜 역사 속에서 귀족이 권력을 가진 강한 자였고, 이들에 의해 도덕 등 자신들의 가치관이 법제화되어왔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은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이 있으며, 주인의 도덕은 귀족의 도덕이다. 왜 역사 속 지배자들의 입법은 주인의 도덕을 곧장 드러내기보다, 때로는 약자 보호·평등·죄책·의무·금욕의 언어, 곧 르상티망의 도덕을 통해 정당화되어왔는가? 트라시마코스에 따라 강한 자에 의한 입법은 '좋음'의 도덕이 보편화되는 최선의 정체가 되는 대신 노예의 도덕을 지속시키는 '르상티망의 입법'이 되었는가.
이것은 트라시마코스의 강자는 입법 권력의 소유자이고, 니체의 강자는 가치 창조의 유형이기 때문일까. 현실의 지배자인 트라시마코스의 강자는 법을 만들 만큼 강할 수 있지만, 그가 사용하는 도덕 언어는 이미 르상티망의 산물일 수 있다. 반면 니체의 강자는 사회적 신분으로서의 귀족이 아니라, 자기 안의 혼란을 지배하고 자기 삶에 형식을 부여하는 내적 지배자에 가깝다. 그는 '푸른 피'가 흐르는 혈통 귀족이 아닐지라도, 자기 가치의 입법자라는 점에서 도덕의 귀족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법의 귀족'과 '도덕의 귀족'의 차이가 아닐까. 아니면, 이는 이데아로서의 '정의'와 현실적인 '법' 사이의 괴리일까. 《국가 정체》가 선의 이데아를 본 철학자의 통치를 꿈꾼다면, 《법률》은 왜 법과 습관과 교육을 통해 인간을 다스리는 현실적 질서로 내려오는가? 이것은 선의 이데아를 향한 정의와 현실의 법 사이에 놓인 간극일까.
그렇다면 그 어떤 전문적인 지식도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를 받는 자의 편익을 생각하며 지시하오. _ 《국가 정체》 (플라톤, 제1권 342d)
트라시마코스는 강자가 법을 만든다고 말하고, 니체는 도덕이 힘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의 강자가 반드시 니체적 주인의 도덕을 입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지배자는 법을 만들 만큼 강하면서도, 그 법을 정당화하는 언어에서는 이미 르상티망의 도덕을 내면화했을 수 있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의 군주가 스쳐간다. 그는 도덕의 귀족은 아닐지라도, 법과 힘과 명분을 운용하는 법의 귀족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이 질문은 마키아벨리 사유로 넘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