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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전투 -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
앨리스터 혼 지음, 조행복 옮김 / 교양인 / 2020년 12월
평점 :
어둠 속에서 대열은 바닥에 누워 신음하는 부상자들을 밟고 지나갔다. 연이은 포격에 끈적거리는 버터처럼 변한 진창에서 병사들은 거듭 비틀거리며 넘어졌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추격하여 가차 없이 포탄을 퍼붓는 적이 듣기라도 할까 봐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무거운 짐을 진 병사들은 물이 가득 찬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면 미끄러운 비탈을 기어오를 수 없어서 결국 익사했다. 구덩이에 빠진 전우를 구하려고 멈춰 서서 손을 내어 주다가 둘 다 빠져 죽는 경우도 많았다. _ <베르됭 전투>, p.290

앨리스터 혼의 <베르됭 전투>는 전투 현장의 긴박함과 함께 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작전회의 끝에 나온 조금은 나른한 결정이 얼마나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불한 피의 대가에 비해 얻은 교훈이 얼마나 무가치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책의 영문명 <The Price Of Glory : Verdun 1916>은 그런 면에서 주제를 잘 담아낸다.
전쟁과 관련해 연구자들에겐 몹시 매혹적인 일이지만 참가자들에겐 몹시 당혹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순간, 자신들의 어려움에 사로잡힌 쪽은 적 진영의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좀처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_ <베르됭 전투>, p.254
저자는 팔켄하인의 '소모전'과 페탱의 '물류전'의 논리의 대립을 전투를 통해 보여준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동부 국경에 구축한 프랑스의 콘크리트 요새와 여기에서 상대에서 퍼부어지는 막대한 화력은 패색 짙던 프랑스에게 승리의 전환점이 되었고, 여기에서 얻어진 잘못된 교훈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오판으로 귀결되었다. 콘크리트 요새라는 '점'과 대포의 승리. 이는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얻은 교훈이었고, 이로부터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점을 선으로 늘리면서 마지노선을 구축했고, 막강한 대포를 구축하며 위치에너지(9.8mh)에 기반한 화력(E)으로 대항한다. 이러한 계획은 위치에너지를 전차(戰車)라는 운동에너지(1/2mv^2)로 전환하여 아르덴 숲을 돌파한 나치 독일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지만. 역사의 잘못된 교훈이 어떤 비극을 낳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1870년 이래로 군사 사상의 주기가 파멸적으로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았다. 1870년에 프랑스는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영구 축성에 과도하게 의지해 전쟁에서 졌다. 그 다음 전쟁에서는 이 비참한 패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거의 패할 뻔했다. 그리고 다시 그 경험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결과인 마지노선의 정신 구조는 너무 고통스러워 떠올릴 수가 없다. _ <베르됭 전투>, p.536
이러한 오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전장(戰場)이라는 현장이 아닌 후방의 작전 테이블에서 얻어진 교훈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 후반 출현해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전차가 제2차 세계대전에는 '움직이는 대포'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 프랑스에게 전차는 요새를 보조하는 소모품이었으나, 독일에겐 요새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기동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상과 상처뿐인 '피로스의 승리'에 대한 처절하게 반추하는 대신, 승리의 환상에 박제된 프랑스군 수뇌부는 철도와 보급이라는 전황에 최적화된 뒷북치는 대비를 하고 말았다.
보병과 포병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따금 제2차 세계대전 때 지상군이 중폭격기 승무원에게 느낀 감정과 비슷했다. 지상군은 폭격기 승무원들이 호사스럽게도 적군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잡았다고, 잠깐 출격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흩뿌린다고 생각했다. _ <베르됭 전투>, p.296
이처럼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격전 속에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병사들과 수뇌부들의 혼란상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참혹한 전쟁을 직접 경험한 이들은 죽어나가고, 살아남은 이들은 참상을 간접 경험한 이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전쟁은 후대에 어떤 교훈을 남길 수 있을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지상전의 양상은 '참호-포격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전차전'으로,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자주포에 의한 포격 + 드론에 의한 정밀 타격'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향후 AI와 로봇의 개발로 인간이 아닌 기계들에 의한 대리전으로 대체될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제 군 수뇌부가 아닌 개별 병사들도 전장에서 떨어져 마치 게임하듯 전쟁을 하는 상황이 닥쳐온다고 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피와 살이 튀는 냉병기 앞에서의 두려움 대신 모니터 뒤에서 마우스로 상대를 제압하는 상황 속에서 미래 전쟁은 더 참혹해지지 않을까. 이런 면에서 저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당부하고 싶은 베르됭의 교훈은 기술발전의 시대에 인간성 회복이 아닐까를 생각하며 독서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