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 오늘의 유럽을 낳은 최초의 영토 전쟁 1618~1648
C. V. 웨지우드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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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의 열풍이 일단락되면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를 통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루터파에만 국한되고 칼뱅파를 비롯한 다른 신교 종파는 제외되었는데, 이 불씨가 결국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신교연합과 가톨릭동맹 사이의) 일촉즉발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1617년에 보헤미아의 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도를 탄압하자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그를 거부하고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추대한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시작은 그랬으나 전쟁이 진행될수록 종교의 명분은 뒷전으로 나앉고, 유럽 각국의 국익이 점점 중요하게 대두된다. _ <30년 전쟁>, 옮긴이의 글, p15


 유럽 최초의 근대적 영토전쟁 30년 전쟁. 1618~1648년까지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전쟁들을 통칭하는 이 용어는 단순히 '30년동안 일어난 전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 전쟁을 명분으로 했으나, 그 이면에는 유럽 각국의 국익이라는 실리가 충돌한 전쟁이었다. 제국을 꿈꾸는 군주, 영지를 지키려는 제후, 신분 상승을 노리는 용병 대장, 생존을 위한 상인과 농민 등 다양한 주체의 이해관계가 얽혔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껍데기 아래 수많은 제후국으로 분열된 독일은 이러한 욕망의 충돌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고, 그 비극적인 대가를 치렀다. 이처럼 종교라는 중세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면서 국가와 민족의 이해관계라는 근대적 실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30년 전쟁은 '최후의 중세 전쟁이자 최초의 근대 전쟁'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독일 지역에는 독립 소국들의 방대한 집단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뭉쳐 중부 유럽의 지리적, 정치적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경쟁, 에스파냐 왕과 네덜란드의 경쟁, 가톨릭과 신교의 경쟁에서 독일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각국 정부는 그 점을 깨닫고 저마다 이 분열된 나라에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애썼다. _ <30년 전쟁>, p53


 <30년 전쟁>의 저자 C.V.웨지우드는 이러한 수많은 욕망들의 대립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마드리드, 파리, 런던, 스톡홀름, 빈, 코펜하겐에서 결정된 내용에 의해 마그네부르크는 약탈당했으며, 뤼첸에서는 대군이 격돌했고, 우체돔에는 스웨덴 군을 맞아야 했던 만큼 독일 전역에 재빠르게 전개되는 내용을 독자들 눈앞에 차분하게 그리고 작가만의 기준을 갖고 그려낸다. 작가는 주요 사건 전후로 핵심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데, 그 기준은 독창적이다. 대표적으로 30년 전쟁사 중 보기드물게 성군으로 인정받는 스웨덴 국왕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다소 박하다. 이는 곧 웨지우드가 전쟁을 바라보는 기준이 '유럽 다수에게 실질적인 평화를 가져다주는가'에 맞춰져 있으며, 전쟁을 통해 영웅이 되는 개인의 성취보다 그로 인해 고통받는 대중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구스타프를 옹호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그를 유럽 역사의 공인된 영웅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강력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어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신념일 뿐 증거에 입각한 견해는 아니다... 구스타프처럼 타고난 정복자는 아무리 평화를 희구하더라도 항상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_ <30년 전쟁>, p411


 전체 독일 인구의 1/3이 줄었을 정도로 독일에 치명타를 안긴 이 비극에 대해 많은 역사가들은 독일의 봉건제가 지속되고 근대화가 영국, 프랑스에 비해 뒤쳐진 결정적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이 거시적 흐름의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적절할 지 모르겠지만, 그 흐름을 헤쳐갔던 이들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30년 전쟁>의 저자 웨지우드는 전장의 전사를 그리면서도, 약탈을 피해 성당으로 피하는 노약자들을 함께 바라보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박진감 넘치는 전쟁사'가 아닌 '파괴의 문명사'로서 전쟁의 의미를 독자들과 함께 찾는다.


 전쟁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유럽의 압도적인 다수, 독일의 압도적인 다수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힘도 목소리도 없는 다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설득할 필요조차 없었다. 모든 결정은 그들을 고려하지 않고 내려졌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가 하나 둘씩 전쟁으로 끌려들어갔고, 모두가 진심으로 궁극적인 평화를 갈망했다. _ <30년 전쟁>, p641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30년 전쟁의 종결인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을 '근대 외교사의 탄생'으로 기록한다. 이 조약은 네덜란드의 독립, 합스부르크 세력의 쇠퇴, 프랑스의 부상이라는 결과를 낳으며 국가 중심의 근대 유럽 질서를 확립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국가의 관점' 대신 전쟁의 피해자, 즉 '대중의 관점'에서 전쟁의 의미를 찾는다. 저자는 농민 계층이 전쟁 기간 동안 겪은 끔찍한 고통을 상세히 그리면서도, 역설적으로 집단으로서의 농민이 전쟁 후 사회 내 다른 부문에 비해 상대적 강자로 떠올랐다는 통찰을 제시하며 전쟁의 비극적 유산 속에서도 미묘한 사회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30년전쟁>은 17세기 근대 유럽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보다 낮은 자리에서 올려다 본 의밌는 역사책이라 여겨진다...


 개인으로서 농민은 전쟁 중에 끔찍한 고통을 겪고, 엄중한 과세와 약탈, 폭력, 추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지만 집단으로서의 농민은 전쟁을 거치면서 그들이 부양하는 사회의 다른 부문에 비해 강자로 떠올랐다. _ <30년 전쟁>, p624



종교개혁 이후 불과 한 세기가 지난 시점에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교권을 재통합한다는 꿈을 버렸다. 가톨릭이 재통합에 실패한 것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원인은 있다. 교회의 운명이 오스트리아 왕실과 긴밀하게 얽히면서 왕실의 영토 욕심이 가톨릭 교회를 옹호해야 할 세력들을 분열시켰던 것이다. - P43

신교 군주들은 프리드리히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또한 가톨릭 세력은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는 것으로 외국의 간섭을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유럽에는 프리드리히나 보헤미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오스트리아 왕가를 두려워하거나 라인 유역을 탐내는 군주들은 많았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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