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의 세계사 히스토리아 문디 4
윌리엄 맥닐 지음, 김우영 옮김 / 이산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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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적된 기술과 지식 덕분에 대부분의 인간집단이 겪어야 했던 질병의 양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인간을 공격하는 미시기생체와 특정 인간집단이 다른 집단 위에 군림하는 거시기생현상의 틈바구니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럴수밖에 없을 것이다. _ <전염병의 세계사>, p308


 '미시기생'과 '거시기생'. 맥닐은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미시기생체와 그들의 숙주인 인간들의 상호연관을 통해 세계사를 읽어낸다. 일반적으로 과거 에스파냐군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시기에 천연두에 의해 다수의 원주민들이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 또는 14세기 흑사병의 유행이 가져온 중세 유럽의 변화 등 전염병이 가져온 큰 변화가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저자는 단순한 현상이 아닌, 거시기생과 미시기생의 합작품으로 해석한다. 즉, 에스파냐군(거시기생)이 아메리카 대륙을 쉽게 정복한 데에는 천연두(미시기생)가 원주민 사회의 저항력을 미리 파괴한 것이 결정적이었고, 14세기 흑사병(미시기생)이 유럽 인구를 급감시키자, 영주(거시기생)들이 농민을 통제할 힘이 약화되었고, 이는 결국 중세 봉건제라는 거시기생 구조의 붕괴를 앞당긴 역사적 결과다.


 이처럼 저자의 <전염병의 세계사>는 전염병과 인간과의 상호관계를 진화라는 세포차원으로부터 자연과의 관계 측면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의 동력으로 파악한다는 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병원성 기생생물은 인류가 자연생태의 동식물 분포형태를 왜곡시켜 새로운 생태적 적소를 만들어내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점거했고, 그 점에서 인류와 똑같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인류의 성공이란 한정된 종류의 동식물을 대량으로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일종에 침입해서 번식하는 기생생물에게 그것은 그들의 먹이장소가 매우 좋은 상태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_ <전염병의 세계사>, p74  


 전염병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그들은 때로는 적대했고, 때로는 협력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활동이 가져온 적대적 공생관계를 통해 인류는 문명을 일구었고, 다른 문명을 파괴했다. 


 유럽의 질병양상과 문화적/정치적 발전단계는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유럽인은 1494~1648년 사이에 바다를 통한 인간, 재화, 사상, 질병의 교류가 초래한 최초의 충격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오랜 문화적 전통에 대단한 압력이 가해졌다.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이라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폭풍은 그러한 압력이 표출된 결과였다. _ <전염병의 세계사>, p277   


  이처럼 맥닐은 종교개혁과 같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폭풍조차 질병의 교류가 가져온 문명 간의 충격과 적응 과정이라는 '생태학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 책 전반에 흐르는 저자의 이 같은 노력의 산물인 <전염병의 세계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잊혀진 힘을 끌어올려 역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들 중 하나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는 점에서 역사의 고전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의의와 함께 독자들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와 동력은 결코 간단치 않으며, 수많은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역사는 무수히 재해석될 수 있음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맥닐이 역사의 동력으로 주목한 이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끝나지 않았다. 과거 인류가 전염병에 속수무책이었다면, 이제는 역으로 미생물을 이용해 바이오 항체를 만들면서 그 관계를 역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맥닐의 시각은 이처럼 미생물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오늘날의 현대 생명공학 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분석틀을 제공한다. 만약 맥닐이 <전염병의 세계사> 개정판을 낸다면 오늘날 바이오 기술의 발달에 별도의 장을 추가해야 할 것이라는 상상을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오늘날 유기체의 진화는 인간이 자연생태계를 교란시킨 탓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인간이 감염성 질병에 노출되는 양상도 급변하고 있는데, 이는 생태적 관계가 폭넓게 조정/재조정되는 과정의 일부이며, 미래의 궤적은 여전히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결국 생물학적 진화는 인간이 자연의 섭리에 개입함에 따라 역사상 유례없이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 P14

이러한 질문에 잠정적으로나마 답하려고 궁리하다 보니, 역사가들이 지금까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역사의 숨겨진 차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인류가 감염증과 상호 작용해온 역사로서, 질병의 지배영역을 뛰어넘는 접촉을 통해 미지의 전염병이 전혀 면역력을 갖추지 못한 집단을 침범했을 때마다 나타났던 가공할 만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 P21

인간숙주와 전염성 생물체의 상호작용이 몇 세대를 거치며 장기간 지속되면서 양방이 적정 수준의 개체수를 유지한다면, 둘 다 생존할 수 있는 상호적응 패턴이 창출된다. 숙주를 빨리 죽여버리는 병원체는 그 자신도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와 반대로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생물이 기생할 수 없을 정도로 감염에 완벽한 저항력을 가진 인체도 병원생물의 생존을 위협하게 된다 - P29

사람이 다른 생물에게 미치는 생태학적 역할을 질병에 비유하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닌 듯하다. 언어의 발달로 인해 인류의 문화적 진화가 오래된 생물적 진화와 충돌해온 이래, 인류는 질병이 인체의 자연적인 균형을 파괴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자연계의 균형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다른 생물의 입장에서 볼 때 인류는 때때로 독성이 약화되기 하지만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관계를 스스로 학립하는 법이 없는 악성 전염병과 같은 존재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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