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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시대 3 - 이민과 세계무역 ㅣ 케임브리지 세계사 13
제리 벤틀리.산자이 수브라마니암.메리 위스너-행크스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5년 9월
평점 :
세계의 해상 및 육로 무역을 통해 은(銀)이 중국 시장으로 향한 것은 당연히 이익 때문이었다. 은을 실은 선박과 육로 교통의 화물에는 아메리카의 식물과 종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순히 은 시장에서의 이익만 기대했을 뿐이지만, 이를 계기로 이후 5세기에 걸쳐 지속될 복합 순환 구조의 상호작용이 시작되었다. 환경, 전염병, 식물, 인구, 문화의 힘은, 그리고 이들이 경제에 미친 여파는 16세기 이래 21세기 초엽까지 이어진 세계적 진화를 만들어갔다. _ <세계화의 시대 3 : 이민과 세계무역>, p398
생산, 소비, 교환. 일찍이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이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정의하고 이를 주제로 대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집필했다면, 케임브리지 세계사 13권 <세계화의 시대 3 : 이민과 세계무역>은 15세기~19세기의 세계를 이들 3요소로 연결시킨다. 15세기 이전 재정위기가 닥치기 이전 중국은 세계에 화폐(은)와 선진기술을 통해 만든 상품의 공급자였다. 마치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처럼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 오랜 기간 자리매김했던 절대강자의 쇠퇴는 도전자들에게는 또다른 기회가 되었다.
1400년에는 중국이 기술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1800년에 이르러 영국은 최초의 산업혁명을 거치며 세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는 중이었다... 포메란츠(Pomeranz)에 따르면 18세기 후기까지도 생활수준이나 석탄 이용의 측면에서 영국이 중국의 도시 지역보다 더 우위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 그곳의 노예노동, 값싼 원자재, 본국의 제조 상품을 소비할 식민지 시장 등이 영국이 도약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_ <세계화의 시대 3 : 이민과 세계무역>, p332
달러가 부족하면 달러를 찍어내면 통화공급이 가능한 오늘의 미국과는 달리 15세기 기축통화 은의 공급자였던 중국(明, 淸)이 수입국으로 변화한 사건은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중국과의 은 거래를 통해 차익을 실현하려는 에스파냐의 의도는 중남미 아메리카에서 대규모 은광과 플랜테이션 농업을 야기시켰고, 이를 위해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강제로 이주해야 했다. 대항해 시대의 후발 주자였던 영국과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를 따라잡기 위해 상업과 군사력을 결합시켜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로 가는 첫 출발을 여는 역사가 본문에서 펼쳐진다.
1700년경 VOC(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EIC(영국 동인도회사) 두 기업이 누린 성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덴마크의 역사학자 닐스 스틴스고르(Niels Steensgaard)는 "안전 비용의 국제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즉, 두 회사는 모두 경쟁사를 제압하기 위해 해군력을 배치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상품의 시장 판매 비용에 성공적으로 포함시켰다. _ <세계화의 시대 3 : 이민과 세계무역>, p445
이처럼 <세계화의 시대 3 : 이민과 세계무역>에서는 생산, 소비, 교환으로 연결된 세계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상품과 자본의 이동을 넘어선 '사상과 문화의 교류'가 어떻게 각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는지도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의 유교 문화 수용이다.
조선에서는 정교한 중국식 가족제도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송나라 시기 신유학 운동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중국 문헌들이 꾸준히 참조되었으며, 한국 전통의 잔재는 개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엄격한 친족 시스템과 엄밀한 중앙집권 귀족 국가 체제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1900년까지 그대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_ <세계화의 시대 3 : 이민과 세계무역>, p123
이는 당시의 교류가 단순히 물질의 교환에 한정된 것이 아닌, 한 사회의 정치와 사회 구조에 500년 이상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사상의 교류'였음을 보여준다. 마치 오늘날의 K-POP처럼. 독자들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오늘날의 글로벌 공급망 갈등이나 기축통화를 둘러싼 패권 경쟁이, 사실은 16세기 은(銀) 무역과 동인도 회사의 무력 충돌에서 나타난 멜로디의 또 다른 변주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을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이 점을 들고 싶다.